본명 | 정현철(鄭鉉哲 / 鄭賢哲[1]) |
출생 | 1972년 2월 21일(age(1972-02-21)세), 울산광역시 중구 |
본관 | 온양 정씨 |
소속 | 서태지컴퍼니 |
학력 | 울산중학교 (졸업) |
신체 | 172cm[2], 61kg, O형 |
가족 | 아버지 정상규, 어머니 강명숙br누나 정혜원[3]br6촌 형[4] 신해철 |
배우자 | 이지아 (1997-2006)br이은성 (2013년-현재) |
자녀 | 딸 정담(2014년생)[5] |
데뷔 | 1990년 시나위 4집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파일:유튜브 아이콘.png|width=24]]] br 서태지 아카이브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width=24]]]br [[[파일:트위터 아이콘.png|width=24]]]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width=24]]] [6]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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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과거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불러온 댄스뮤직, 힙합장르의 선각자이다.[7][8] 대표곡은 '난 알아요', '하여가', '교실 이데아', '컴백홈' 외 다수.
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 활동을 통해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렸으며, 이 힘을 밑거름으로 삼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당대 권위적인 한국 사회에 음악적, 비음악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이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들어가는 수식어 중 첫머리에 오는 클리셰는 단연 문화 대통령.[9] 시대에 파란을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 2013년 평창동에 정착하기까지 18년 동안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기자들을 피해 해외에 거주해 왔다. 하나의 활동기가 끝나면 잠시 휴식하며 영감을 얻고, 음악작업을 하고, 귀국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솔로 활동을 했다. 앨범 간의 텀이 수년씩 되는 것은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 때문에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음악작업에 있어서 지독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10] 팬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서형, 대장[11], 삑뽁이 아빠.[12]
80년대 메탈키드의 롤모델이었던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1992년 3인조 랩 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로 오버그라운드에 데뷔하였다. 당시 이태원 클럽 음악으로 천대받던 댄스 뮤직을 대중에게 알리며 1집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수성한 전설적인 뮤지션. 이후 3인조 활동을 통해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8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펑크,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이후 2008년부터는 고난이도의 작법과 자신의 뿌리인 두 장르(록, 일렉트로니카)를 접목시키는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발표하고 있다.
작곡, 편곡 및 작사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음악쪽을 보면 녹음을 마친 음반의 마무리 믹싱을 위해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로 쌩고생을 하는가 하면 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아토모스 싱글 땐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질 않나, 또 그게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규음반 발매의 기회를 노리고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음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국내 아티스트 중에 손에 꼽힌다.
앞서 짚은 대로 여러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한 음악적 색채와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또한 '가수 서태지'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태지는 음향 엔지니어링에도 조예가 깊다. 갓 20살 나이에 데뷔할 때 세션을 부르기엔 가난해서 1집의 엔지니어링과 프로그래밍을 도맡아 했는데,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 습관이 되어서 후엔 한국에 있는 자기 회사와 저택 안에 본인이 작업할 전용 스튜디오를 차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13] 현재는 자신의 일은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이 자기 손에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되었으며, 콜라보레이션도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외부 인물을 섭외하지 않는 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편.
또한 초상권 등을 포함한 가수들의 권리 안정과 수입 배분을 이끌어내는데 앞장섰던 가수인데, 서태지 이전에는 가수들의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리고 TV에 많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자신의 수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음반회사 및 기획사가 주는 대로 만족해야 했다. 연예인인데 차가 없어? 한 대 뽑아줘라, 수고했으니까 집 좀 좋은 데로 사줘라 이런 식(...). 가왕 조용필과 마왕 신해철조차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지만, 생 초짜 신인 서태지가 이런 고일 대로 고여있던 기획사들의 횡포를 깨트리고 정당한 자신의 몫을 챙겼고 그 후 너도 나도 그런 행보를 따라가며 가수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신비주의를 언급하면 반자동적으로 따라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 데뷔 초에는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도 안 되는 몸개그를 선보이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해 간단한 토크를 하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했지만 커리어 초반인 20살의 어린 나이부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며 자택을 24시간 포위하는 수백 명의 소녀 팬과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기자들, 음악밖에 모르는 방구석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등쌀에 나가떨어져 점차적으로 신변잡기에 대한 입을 아예 닫아버리고 만다. 이것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어 팬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슈퍼스타 서태지의 뒤를 캐거나 어떻게든 연락해 출연을 닥달하고 결과적으로 서태지는 더 꽁꽁 숨어야만 하는 무한루프를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는 결국 그가 24세의 한창 어린 나이에 눈물의 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출국하고 세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리는 잔혹동화로 끝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성적인 방구석 아티스트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떠안았을 때 개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겪을 대로 다 겪은 백전노장(?).[14]
성장 과정 ¶
1집 활동 당시 출연한 인간시대. 그의 성장 과정과 데뷔 당시 일상, 활동 모습이 담겨있다.
유년기 ¶
가회동에서 어머니 강명숙 씨와 아버지 정상규 씨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탄생. 누나로 정혜원 씨가 있다. 청와대 근처의 소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15]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 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 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집에서 된통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 묘사되었다.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
재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동중학교[16] 재학 시절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음악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길을 걷던 중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폼을 재고 싶고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뭔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17]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 내 시선 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학업과 학교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다 결국 몰래 담배 피우고, 땡땡이나 치는 학생이 되었다.[18] 이 시절의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인터뷰에 나와 있다. 중3 때는 담임 선생님의 단체 기합에 반항하여 교실을 뛰쳐나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담임 선생님은 체벌을 없애셨으며 졸업할 때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셨다고 한다. 서태지가 인생에서 가장 고마웠던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분이다.
(사진 설명 : 학창시절 서태지가 컴퓨터로 그린 밴드 '하늘벽' 로고.)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을 꼬드겨 5인조 스쿨 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면서 최초의 밴드 사운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악기를 산 본인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통기타, 피아노,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 날로 급조한 드럼(...)을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멤버들의 연주 경력도 그 나이 꼬마들답게 리더이자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 씨가 친형에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멤버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소꿉장난에 가깝게 시작한 밴드였다.
다만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이 밴드였다는 점에서 이 치기 어린 밴드가 언급될 의의를 갖는다. 어린 서태지는 당시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서태지가 모두 전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사진 설명 : 하늘벽 멤버들과 찍은 사진.)
고등학교 자퇴 ¶
서울북공고 진학 후 스쿨밴드 하늘벽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장장 2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서태지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사족으로 꽤 그럴싸한 명문으로 출처 없이 회자된 '서태지의 자퇴서'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밝혔다.
뮤지션 커리어 ¶
17세 저니맨 ¶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 입대로 별 활약 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중현의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인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한 아이가 매일 우드스탁으로 와선 몇 시간씩 제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곤 했죠.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죠. 내심 눈에 띌 만큼 머리가 긴 소년이 뚫어져라 공연에 몰두하는 걸 보고 헤비메틀 지망생이거나 팬이려니 했어요. 그렇게 1달 정도 계속되고, 말수가 적은 저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말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기타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죠.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타를 잡았어요.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은 요즘말로 '장난'이 아니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나위'에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무척 기뻐했어요. - 당시를 회상하며, 신대철
서태지 본인의 말대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신대철에게 돈과 함께 픽업 제의를 받았지만 돈을 마다하고 함께 활동하게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고, 시나위의 멤버가 된 후 우드스톡에서 매일 하루 반나절을 함께 연주 연습만 하며 살면서 바로 4집 앨범 작업에 착수해 베이스와 드럼 편곡을 담당했다.[20]
그러나 활동 기간 동안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 3명의 음악적 견해 차이[21]로 서서히 멤버 간의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제작자에게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예정된 공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나위 멤버들이 막상 공연장에 도착하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 짜는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등 말도 안 되는 무대가 서있었다고 한다. 크게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 측과 거하게 싸운 뒤 술을 마시고 뛰쳐나가고, 미처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기다리는 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는 결국 단 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안습의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22]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기획'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되고 본인은 불발되었다고 한다.[23]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24]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 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어머니가 차려서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었고[25],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양현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양현석과 팀을 꾸리기로 하고 제3의 멤버를 물색하며 이리저리 멤버를 갈아치워보다가 마지막으로 이주노를 선택하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26] 그중에서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서쪽의 TAIJI - 서TAIJI)이 주류였는데 시간이 흘러 서태지 본인이 별생각 없이 그냥 글자가 멋져서 지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은 자서전에서 서태지는 타이지에서 따온 게 맞다고 주장했다. 타이지처럼 실력 좋은 베이시스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쪽의 타이지를 줄여 서태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95년에 공개된 공식적인 인터뷰를 보면 신대철의 주장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대철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대철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출간된 이동연의 저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에서 저자 이동연이 서태지에게 예명 작명에 관한 질문을 했었다.
이동연: 말 나온 김에 예명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 당신의 예명인 '서태지'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추측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본 그룹인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엇고요, 성은 여러 개를 붙여 봤는데, 그중에서 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아무 뜻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2001년 6집 활동을 마치고, 음향 전문 잡지 사운드 온 에어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도 예명에 관한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해명했다. 현재는 없어진 웹진이라 웹 아카이브 링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SOA : 예전 X-JAPAN 의 베이시스느 TAIJI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지씨의 이름도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는 건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서태지 :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X-JAPAN의 TAIJI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엑스저팬은 즐겨 들었지만 베이시스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시나위 들어갈 때 그냥 본명보다는 멋있는 이름을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태자를 좋아서 썼고. 다음에는 지를 붙이고 이름에 어울리는 서자를 사용해서 이름을 만들었죠...
여담이지만, 서태지는 타이지보다는 히데를 더 좋아했다. 히데 사후 히데의 솔로밴드인 hide with spread beaver를 etp페스티벌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히데의 부모님은 서태지에게 히데가 실제로 연주하던 히데의 시그니처 기타인 옐로하트를 서태지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는 서태지의 대경성 뮤비와 히데의 핑크스파이더 뮤비 감독이 동일인물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
전설의 시작
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92년도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 작곡·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짧은 코너에 출연해 난 알아요를 불렀는데[28][29]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이러했다. 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참신하지만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8점) - 밴드 '다섯손가락' 멤버 겸 작곡가 하광훈[30]
음악은 새로운데 가사의 내용이 진부하다.(7점) - 작사가 양인자[31]
노래는 섬세한데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거 같다.(8점) - 방송인 이상벽[32]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 회 출연자이자 최저점 득점자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 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한 팀도 없었기 때문이다.[34][35] 하지만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랩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10, 20대 사이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36] <특종 TV연예>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태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신인무대의 평가는 시대의 변화를 자각하고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비해 평가가 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37]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서 활동한 2집, 3집, 4집에 대해서는 디스코그래피를 참고.
솔로(서태지 밴드) ¶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렇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은 지 2년이 흐른 1998년 7월 7일 갑작스레 5집을 발표 하였다. 당시 세계적 추세인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맨밴드 앨범.
5집 앨범 발매 후 기자회견은 언론 기자들과의 이메일 문답으로만 기자회견 인터뷰를 대신하고 일체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5집 노래 외의 미네뜨 CF에서 목소리만 들려주었을 뿐 국내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귀국하게 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서태지/세션 문서 참조.
개인사 ¶
비밀 결혼과 이혼 ¶
1996년 11월 20일, 일간지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 양[38]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인 것처럼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그런 강경 대응이 무색하게 기사에 딱 들어맞는 상대와 1997년 전격 비밀 결혼을 한다. 이후 199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결혼설의 사실 여부를 묻자 "낭설이다" 라며 거짓말로 딱 잡아뗀다. 기사 원문 이를 두고 부인(이지아)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란 의견도 있고, 어차피 결혼 사실을 밝혔어도 생활적으로는 바뀔 게 없었기 때문에[39] 팬들을 기만한 비겁한 변명일 뿐이란 의견도 있다.
다만, 처음부터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나오면, 언론이 사생활 관련 질문을 꺼내는 것을 어느 정도는 차단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이어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독자들의 뇌리에 남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때 결혼 사실을 밝혔다면, 인터뷰의 내용은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 매스컴에 부인에 대한 추측과 뜬소문이 도배되었을 것이다.[40]
실제로, 위에 언급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이어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독자들의 뇌리에 남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때 결혼 사실을 밝혔다면, 인터뷰의 내용은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 매스컴에 부인에 대한 추측과 뜬소문이 도배되었을 것이다.[40]
2000년 6집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때에는 이미 2년 반 정도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별거에 들어간, 사실상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훗날 상당수의 팬들이 이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 서태지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여기고 등을 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없다, 서류에 도장 찍는 관계가 싫으며,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동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파경에 이른 상황을 반영한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훗날 2008년에 방영된 서태지 컴백 특집 프로그램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는 (여자 친구가) 있어도 밝힐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2011년 4월 21일 <스포츠서울>의 보도에 의해 서태지가 최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와 이혼했으며, 이미 그녀가 제청한 위자료 및 재산분할 소송이 진행 중인 것이 밝혀졌고, 당시 정계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을 덮기 위해 해당 사건을 퍼트리길 종용하면서 연예가 전반에 핵폭탄급 파동을 일으켰다.[41] 서태지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만큼 수를 세거나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루머가 트럭 단위로 대한민국 인터넷을 휩쓸고 다녔다.당시 '감금설'에 대한 반박 이후 서태지는 본인이 설립한 소속사를 통해 이혼 사건에 관련된 일반 대중에의 아래와 같은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해명 자료가 실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전략)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 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략)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송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반려했다가 결국 합의서를 제출함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소송에 대한 개략적인 과정은 이 글에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고 참고해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2년이 약간 지난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언론을 탔는데,# 다음 해인 2014년 8월 11일 이지아가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지난 결혼생활에 대해 서태지를 언급하며 디스를 날렸다. 그런데 이혼합의서에 따르면 지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상호 공개적 비방 등이 있을 경우 일일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서태지가 소송 취하를 반려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가려 했음을 되짚어보면 이지아의 발언 수위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 방송 직후 디스패치에서는 발 빠르게 관련 기사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이지아에게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는 디스패치를 설립한 기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직후부터 끈질리게 매달려 온 일이었기에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디스패치의 정보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서태지가 대중의 온갖 비난으로 점철된 십자포화를 감내하고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지아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팬에게도 모두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실상 장장 14년에 걸친 이슈 종결.
은둔하던 슈퍼스타 ¶
요약하면 8집까지의 서태지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었다. 사실, 1990년대~2000년대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활동했던 가수들을 포함한 연예인들은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 팬 출신이 정말 많다.#
활동기에는 이런저런 소식이 나오지만, 비활동기가 되면 공적인 일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웬만한 해외 아티스트도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세상에서 증발해왔다. 얼굴 보기 어렵기로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던 인물.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은퇴 직전까지는 국내에 살아서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 8집까지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닷컴'에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본인의 여행 사진이나 RC카 등의 사물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근황을 전하는 것이 팬덤에 전하는 유일한 생존 신고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넬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 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때에도 특히 연락이 안 되어서(...). 로밍이 안 됐던듯 하다.[42]
그래도 다행히 재혼과 9집 활동을 기점으로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간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아왔고 수시로 부정했던 '신비주의'의 오명을 이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김종서도 2014년 서태지와 함께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아버지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장 해제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실 아티스트나 예술가들 중에는, 외부 환경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만의 작업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특히 서태지와 같은 원맨 밴드 레코딩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팬들의 오버 및 안티들의 루머로 서태지 혼자서만 신비주의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생긴 것뿐이지, 서태지의 성격은 이런 아티스트들의 여러 스타일 중 하나로 봐도 그냥 무방하다.
후에 매 앨범 발매 때마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곤혹을 치르는데, 그에 대해 서태지는 매번 "신비주의라는 것은 마법, 주술 등의 이미지와 같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며, 일과 사생활을 조금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답변을 했다.
예를 들어 자타공인 신비주의 뮤지션인 Sopor Aeternus와 같은 경우엔 서태지와는 달리 생년월일은 물론 본명까지 숨기고 다닌다. 평소 자신의 취미 생활까지 만천하에 공개한 서태지가 과연 신비주의의 발끝에라도 다다를지 의문이다. 거기다가 연예인/유명인에 대한 사생활 존중에 시끄러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자신의 사생활 공개에 대한 권리를 지킬 대로 지키고 있는 서태지가 신비주의로 오해 받은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심지어는 한국에만 해도 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TV 출연 횟수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며, 또 TV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활동 자체를 거의 안 한다. 오죽하면 집 앞 커피숍에서 더 보기 쉽다고 하겠는가(...). 가끔 TV에 나온다해도 노래 요청에서는 '콘서트 가서 들으라'는 식으로 대응하니... 그래도 새 앨범 발매하면 TV에 몇 번 출연해 노래도 부르는 서태지는 이에 비하면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서태지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공개를 꺼린 것 또한 새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각 앨범에 대한 이미지 컨셉을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서 알아서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는데[43], 이게 또 신비주의라고 언론에 뭇매를 맞은 셈이다.
엄밀히 말해 서태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킨 것이고, 물론 팬들과의 커뮤니티를 위해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 공개한 셈이니 자신을 완벽하게 숨긴 적은 없다. 한마디로 서태지 본인이 공개하기 싫어서 또는 공개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안 한 건데[44] 그걸 못 참고 난리친 언론이 문제다. 연예인이 모든 걸 다 드러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서태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일본의 뮤지션 GACKT 역시 한 TV 방송에서 자택공개를 했는데, 유독 녹음실만 공개 거부를 하였다. 때마침 신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 방송 스탭이 이 경고를 어기고 몰래 촬영하려다가 각트에게 들키자 각트는 그 자리에서 스탭에게 화를 내며 방송 스탭들을 전원 내쫓아버렸다.[45]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다소 과장된 발언인 측면이 짙어, 활동하면서 마주치는 것을 넘어 실제 인간적 친분이라기엔 신빙성은 없는 듯.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1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MC도 서태지와 말까지 놓는 사이지만 왠지 아직은 그렇게 친하지 않아보인다.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이종 육촌 지간인 故 신해철[46]과 시나위 시절 친분을 맺은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김종서의 경우는 서태지가 시나위에 있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하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당시 록 밴드들이 마약에 탐닉하는 등 비뚤어진 길로 쉽게 틀어지던 때였는데 자신이 그런 잘못된 길로 안 갈 수 있었던 건 김종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서태지의 취미 중 하나인 캠핑카 여행을 둘이서 자주 떠났다고도 하며 서태지와 아내 이은성과 함께 스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 (박신혜는 아내 이은성의 절친이라고 한다.) 9집 공개 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서로가 발언한 멘트를 보면 자주 만나 음악 얘기 외적인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등 아주 친밀한 교류가 있는 듯.
2014년 9월에는 라디오 스타에 故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는 발언 중 서태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 언급해 친척 관계는 원만한 듯.
한때 서태지의 상업주의 루머와 더불어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티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서태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리곤 하는데, 대부분이 믿을 것 없는 헛소리들이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크래시의 안흥찬이 중간에 서태지의 행보로 인해 서로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느니 하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 뮤지션으로서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서태지)"라거나 "쿨한 관계(안흥찬)"라고 하며 서태지의 컴백 공연에 안흥찬이 다시 게스트 뮤지션으로 나오는 등 루머를 일축시키기도 했다.
후에는 이 루머의 바톤을 NELL이 그대로 받았는데, 서로 간의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런 루머들을 섣불리 믿지는 말자. 멀쩡히 서로 잘 지내는 당사자들 가지고 이상한 루머 만들지 말고.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
총론 ¶
본인은 그저 랩 뮤직을 비롯해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고 비교적 겸허하게 말하고 있지만,[47] 반은 정답이긴 하다. 하지만 후술되는 것처럼 스스로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모습 등을 보면 서태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최고의 성공을 거머쥐고자 했다.
3~40대 이상 연령대의 팬을 지지층으로 하던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3년 연속 가수왕 먹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오버그라운드에 뛰어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판은 10대가 강력히 지지하는 댄스, 랩, 힙합 음악이 점령하게 된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인 96년도에 이르러서는 온갖 기획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티브로 삼은 청소년 가수들을 양산해내면서 X세대[48]를 기수로 삼은 젊은 세대가 가요계의 주 소비층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기획사에서 훈련한 그룹형 아이돌(젝스키스, god, H.O.T. 등)을 통칭 1세대 아이돌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그룹은 많이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 댄스 뮤직의 태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보는 경우가 많다.[49]
또한 이러한 흐름은 단지 대중음악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중문화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10대~20대가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그 모든 게 서태지의 존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따져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해야겠지만 서태지는 분명 그 흐름을 중심에서 주도한 인물이고, 그 흐름들은 많은 부분이 서태지로부터 파급, 파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존재,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한 거대한 임팩트와 영향력을 남겼다.
또한 기획사-소속가수 간의 노예계약 문제를 행동으로 격파해낸 첫 스타이기도 하다. 사실 서태지가 단지 그 시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며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음악이나 인기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보에 있었다.
1집 활동의 거대한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서태지는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 일이었지만 서태지에게는 1집 활동에서 얻은 엄청난 인기와 음악적인 작업은 물론 안무와 컨셉까지도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지만 보기좋게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물론 판매량으로 보면 동시대의 김건모, 신승훈만 해도 서태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지만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똑같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자신들이 작사 작곡 안무 짜고 기획사 사장까지 다 해먹는 서태지(와 아이들) 쪽이 훨씬 많이 벌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데뷔한 지 1년된 젊은 가수가 거대한 자본의 벽이나 업계의 관행을 자신의 음악과 인기만으로 모두 타파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머쥔 셈이고 당시 서태지 이전의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등, 소위 '딴따라'로 낙인찍혀있었던 연예인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문화 평론가 강헌은 당시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90년대 초로부터 2011년 이혼소송 때까지 진행형이었던 언론매체의 '서태지 죽이기'에 대해 강헌과 진중권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록은 이어지는 링크를 참조하자.# # 내용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하자면...
공연윤리위원회와 '시대유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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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2000~2001 Live Concert 태지의 화 - 시대유감 |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마지막 펀치를 날리고 KO를 시킨 결정적 인물이기도 하다. 사전심의제도란 새로운 노래가 나왔을 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 공윤에 사전검사를 받는 제도인데 여기서 시대유감의 가사 중 일부가 지적을 당하자 이에 반발한 서태지가 수록곡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아예 통째로 들어낸 상태로 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사전심의제도에 항의를 한 것.
그런데 공윤과 트러블을 일으킨 곡은 <시대유감> 한 곡만이 아니었다. <컴백홈>, <필승>,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51]는 앨범 발매 후에 문제가 되었는데, 앨범에 실린 가사가 사전 심의 때 제출한 가사와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때문이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지금은 잊힌 일이지만, 당시엔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자체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르는 큰 사건이었으므로 팬들이 받은 충격은 컸으며, 이를 계기로 팬들 사이에서 사전심의 폐지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래 알던 사람들끼리 조용히 논의하던 사전심의제도의 부당함과 폐지안의 통과에 대한 당위성이 서태지 팬덤의 힘을 등에 업고 사회 전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던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야기는 당시 서태지를 좋게 보고 있던 김대중 야당 총재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수면 위로 급격히 끌어올려졌고 해당 법률은 공론화를 통해 힘을 얻어 초안대로 깔끔히 폐지되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정태춘 등 선배 가수들이 긴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화제가 서태지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통해 사회 전반에 급격히 각인됨으로써 부당한 법률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인 피니시 블로우가 된 셈이다.
물론 시대유감이 해당 사건에 공헌한 부분은 폐지에 관한 법률상 세부적, 실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사전심의의 부당함에 대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침투시키고 국회에 해당 법안 통과에 대한 지대한 압박을 주는 대형 선전의 성공에 그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란게 여당이 통과시키기로 의중을 모았다고 해서 쾌속으로 처리가 될지, 또는 당내 반대표로 인해 여러번의 칼질을 당하며 절름발이 폐지안으로 전락할지, 혹은 의지 부족으로 몇 년을 표류하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아군의 희생을 딛고 최후의 깃발을 꽂은 병사가 조명을 받는 것에 누가 함부로 어떤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1라운드: 음악적 변신과 과열된 논란 ¶
1집, 2집까지는 청소년 팬들이 가볍게 좋아할 만한 사랑, 우정, 이별, 젊음에 대한 가사를 담으며 이렇다 할 사회적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공개된 3집에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교실 이데아>, 통일을 노래하는 <발해를 꿈꾸며>를 수록하며 성숙한 이미지로의 변신, 이전보다 자신이 담아두었던 이야기 등을 꺼내려는 등의 노력이 표면화되는데,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언론은 성숙하고 난해한 가사와 무거운 헤비메탈을 들고 나온 서태지를 온갖 논조로 사골처럼 달달 달여내서 서태지라는 인물상에 대한 거품을 엉망진창으로 부풀렸다. 수록곡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악마의 절규가 들린다는 괴담이 언론지를 통해서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고, 서태지가 그 보도를 접하고 "오, 그렇게 들려? 신기하네."라고 무신경한 웃음을 짓던 때[52] 이미 세상에서 그는 사탄 숭배자이면서 게이[53] 또는 심지어 남장여자라는 등 검증할 수도 없고, 검증되지도 못할 해괴한 루머에 기반한 괴물로 왜곡되어 있었다. 아마 나름 메이저급 일간지를 임신설[54]로 장식한 남자연예인은 서태지가 한국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당시 언론의 황색언론으로서의 작태는 대중들에게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를 넘는 혁명가나 사탄의 이미지, 또는 과도한 천재상을 부여할 만큼 지나쳤다. 확실히 대중의 호응으로 먹고 사는 스타로서는 이것 이상 없을 정도로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중음악 예술가 서태지의 담백한 부분은 이런 노이즈를 겪으며 대중에게서 잊혀지게 되었고 이 또한 오늘날 서태지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한 거품과 허상에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낀 팬들이 이탈하는 등 처음 안티가 생겼다.서태지 오빠가 악마였구나...
2라운드: 서태지 깎아내리기 ¶
그 다음 안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옐로 저널리즘이 극치를 달리던 2000년대 초반 솔로 2집 시점부터다. 사생활과 음악 활동을 철저히 분리하기로 한 서태지가 졸졸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곧 무지막지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보복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콘서트, 음악 방송 등등 활동시기에 세션으로 인디밴드의 연주자들을 규합해 공연을 다니자 인디 씬에서도 댄스가수 출신인 서태지가 돈을 벌려고 인디밴드 흉내를 낸다고 대거 반발 성명을 내고 안티 서태지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치며 안티가 대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이 만든 서태지에 대한 엄청난 거품을 그들 스스로가 남김없이 꺼뜨리고 오히려 쓰레기 아티스트로 매도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가짜 천재 서태지'에 대한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때는 인터넷에서 서태지를 까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자로서는 서태지 인형 뱃속에 순대를 넣어뒀다가 배를 갈라 뽑아 먹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해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노브레인이 있다. 노브레인 이외의 안티 서태지 운동을 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저항을 상품화 해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내세우는 자신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노브레인이 사실상 상업적 펑크로 방향을 틀었고, 닥터코어 911은 이정현 무대 뒤에서 핸드싱크를 시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면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노브레인은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밴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경우에 속하고 닥터코어 911의 경우는 원 기타리스트가 서태지의 라이브 서포트멤버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비슷한 처지(?)에 있던 크로우와 함께 서태지의 오프닝 공연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안티 서태지와는 상관없는 밴드다.
이런 시기에 서태지 팬들은 안티들이 말하는 대로 서태지가 사기꾼이자 비참한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수용인지, 아니면 한국을 벗어난 범주의 평론가에게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자비를 들여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보내 해외웹진에 리뷰를 의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다고 서태지의 음악성을 객관화하고 서태지 음악의 수준을 부정하는 시각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이 소포에는 6집을 포함한 서태지의 모든 앨범과 가사번역본, 뮤직비디오, 연혁 및 소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해외웹진에서 서태지 6집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가도 꽤나 다채롭게 나왔다. 단순히 좋은 앨범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보컬이 매우 인상깊다, 콘과 림프 비즈킷보다 뛰어나다는 극찬까지 있었지만 거의 모든 리뷰에서 Korn의 음악 스타일과 공통점이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이 평가가 거슬린 건지 맘에 든 건지 무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2004년 1월 29일에는 그 Korn을 Fear Factory와 함께 초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상황
3라운드: 떡밥 실종, 빠와 까의 대리전 ¶
2000년대 중반 7집 활동 즈음에는 서태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서태지 팬 외의 음악팬들이 지나친 서태지 팬들의 서태지 신격화 내지는 후한 평가에 반발하여 소위 '빠가 까를 만든다'라는 식으로 안티가 된 경우도 상당수 있다.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유난히 극성스럽다, 자부심이 강하다는 지적 또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이 인식이 때때로 강조되어 서태지 팬들이 광신도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특정 표본 등을 중심으로 설정된 과장된 인식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터넷 등에서의 민간 차원의 갈등 외에도 대형 언론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등, 외부에서의 이런저런 형태의 지속적 공격을 받아온 서태지의 팬층이, 반대로 유독스러운 결속력과 방어심리를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나 곡해된 해석에서 기인한 비판이 주어진다면, 매우 의견이 다른 팬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심의제 폐기 운동, SBS '한밤의 TV연예'에 대한 광고철회운동, 황색언론반대연합,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등의 활동에 서태지 팬들이 참여하게된 동력의 원천은 서태지와 관련되어 있는 불합리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성과는 작지 않다고 서태지 팬덤은 말한다.
4라운드: 뒤늦게 알려진 이혼, 그리고 재혼 ¶
결혼조차 알려지지 않은 슈퍼스타의 이혼과 재산 분할 소송 피소, 그리고 재혼 소식은 데뷔 연차에 비해 의외로 솔리드하게 일정 규모를 유지하던 팬덤 내부 일부 팬들의 극렬한 분노를 샀다. 분노의 요점인즉 사생활에 대해 팬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재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요점이야 어쨌든 팬사이트 별로 팬덤 규모는 두토막 세토막이 났으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서태지를 가장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가장 극렬한 안티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들은 각종 기사에 팬이었던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댓글로 달고 있다. 문제는 그 댓글 중에 사실인 내용이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악의적인 시선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느 아이돌 팬덤이나 마찬가지지만, 팬이던 사람이 안티가 되면 그것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서태지의 개인사에 대해 이렇다할 평가를 하지 않는 부류의 팬들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저러고 있나, 몸은 늙고 머릿속은 아직도 학창시절 오빠부대인가' 하며 이탈한 팬들을 극렬히 혐오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듯.
"아무리 팬들을 마누라라닭살 돋게 불렀다지만 정말 그대로 믿었냐"는 것인데, 이 마누라 호칭은 애초에 남성팬들까지 포함시킨 팬서비스 발언이었다(...)
"아무리 팬들을 마누라라
사실상 이혼 문제는 서태지가 부부 사이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공개적으로 모두에게 사과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역효과를 낳으므로 이 이슈로 만들어진 안티들은 서태지로서는 그냥 남은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짐인 듯.
최근의 행적 ¶
- 2012년 3월 23일에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여 서태지의 음악역사를 되짚어보는 서태지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공개했다.#
- 2012년 12월 27일 청담동 클럽 엘루이에서 20주년 기념 파티를 개최했다. 본인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게임행사 및 공연, 그리고 깜짝 전화연결을 하기도. 클럽 안에 모인 2천여 명의 매니아들은 열광했다.#
-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재혼한다고 발표했다.#
- 2014년 6월 23일 한 골수 팬이 서태지 자택에 침입을 했다가 체포됐다. 경찰은 이 사건을 불구속 기소 송치했다.
- 2015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토요일 헤드라이너로 확정 되었다. 당연히 팬들은 난리가 났지만 일부 락 커뮤니티에선 온갖 야유와 분노가 쏟아졌...었는데, 공연 이후 분위기가 반전되고 역대급 라이브였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 2014년~2016년 3년 연속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인생에 큰 불행이 찾아왔다. 2014년 말에는 이종 6촌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고 2015년 말에는 자신과 같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 오랜 친구인 이주노가 서태지의 이름을 빌려 최모 씨에게 1억 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소송당했다.#[55] 2016년 7월에는 이주노가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었다. 팬들은 이번엔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반응. 본인은 혐의를 일체 부인했으나 결국 실형을 선고 받았다.
- 9집 활동 종료 후 가족과 함께 떠난 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이용한 다이어리를 출시해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 2016년, 자신의 곡으로 만든 쥬크박스 뮤지컬 페스트의 공연장에 약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VIP DAY로 서태지 이외에도 GOD, 로이킴 등 다양한 가수들이 참석했다.
- 2017년 9월 2일, 데뷔 25주년 기념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2007년 15주년 당시 본인은 콘서트에 참여 하지 않고 짧은 영상으로만 출연했던것과는 대조적.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음원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리메이크 곡과 가수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가수 | 리메이크 곡 | 비고 |
방탄소년단 | Come Back Home | 가사 일부 수정 및 추가 |
어반자카파 | Moai | |
윤하 | Take Five | |
Loopy & nafla | 인터넷 전쟁 | 가사 일부 수정 및 추가 |
에디킴 | 이제는 | |
수란 | 슬픈 아픔 | |
헤이즈 |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 | |
Crush | 마지막 축제 | 밴드 wonderlust 편곡 참여 |
여담 ¶
- 외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한다. MBC 인간시대에서 다룬 서태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서태지의 외증조부가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던 육군 대장이었다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로는 독립 운동을 했다는데, 전처였던 이지아가 친일파의 후손이었던 탓에 어떤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결별을 '독립 투사의 후예와 친일파 후예의 이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다뤘다고도 한다.#
- 반면 친가 선조에 친일파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서태지의 셋째 할아버지인 정희석이 해방 전에 소속되었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 명단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검색해 보면 이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이는 친일의 기준이 지속성, 반복성, 자발성인데, 정희석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희석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국내에서 오케스트라를 맨 처음 만든 음악가로,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김원복·윤기선·이흥렬·이규용·나운영·정영재·김영애·이종태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만약 자발성이 있는 친일이었다면, 비밀리에 항일 운동을 펼쳤던 절친 김순남을 일제에 고발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해방 이후에 김순남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정희석은 20대였는데, 저 당시에 20대였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단체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일각에서는 있지만, 인터넷상에 나도는 친일파 명단의 신뢰성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분이 김수환 추기경. 이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기관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대한민국에 남아나실 어르신들이 없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명단은 무려 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올라 있어, 일각에서는 친일의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명단을 확대했으면 확대했지, 좀처럼 축소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이는 친일의 기준이 지속성, 반복성, 자발성인데, 정희석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희석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국내에서 오케스트라를 맨 처음 만든 음악가로,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김원복·윤기선·이흥렬·이규용·나운영·정영재·김영애·이종태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만약 자발성이 있는 친일이었다면, 비밀리에 항일 운동을 펼쳤던 절친 김순남을 일제에 고발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해방 이후에 김순남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정희석은 20대였는데, 저 당시에 20대였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단체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서태지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최연소 운전면허 취득자라고 한다. 서태지는 '그냥... 빨리 면허 따고 싶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긴머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긴머리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면 사람들의 시선이나 어른들의 한마디가 불편해서 빨리 자동차를 몰고 싶었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당시 서태지는 필기와 실기를 먼저 통과한 후 도로주행 시험을 1990년 자신의 생일, 즉 2월 21일 아침 첫 시험자로 미리 예약했다. 그리고 한 번에 통과해서 서태지는 만 18세가 되는 생일 아침에 운전면허에 최종합격하였다.[56]
- 영화 가필드에 출연하였다.#
- 몽골의 힙합 그룹 루미노가 서태지 아이들의 컴백홈과 원타임의 쾌지나 칭칭나네를 섞어 요상한 곡을 만들어 냈다 듣기 서태지는 이후 사후 승인을 해줬다관련기사
- 2008년 GM대우 토스카광고를 찍어 컴백 전에 소소한 이슈를 끌고 다녔다. 그런데 2015년 초에 있었던 9집 마무리공연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57]를 끌고와 토스카는 그새 팔아 치운 거냐(...)는 의견이 많았으나...아직까지 잘 타고 다닌다고 한다.[58][59]
-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에피소드에 '서태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연기한 사람은 박영규이며, 겁탈을 당한 부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가수 원미연의 3집 수록곡인 '그대 내 곁으로'는 서태지에게 받은 노래다. 2014년에 소격동을 부른 아이유와 더불어 서태지가 곡을 준 단 둘뿐인 여자가수. 다만 아이유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었으니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다. 다만 원미연은 생각만큼 그 노래가 히트하지 못해 서태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데 반 농담삼아서 자기가 무리하게 랩까지 소화해서 잘 안 된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당시에는 방송여건상 랩도 본인이 직접 전부 불러야 했었다고.
- 가수 허니의 'X라는 아이'라는 곡이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전 극비리에 작곡한 곡이란 이야기가 있으나, 전혀 아니다. 원래 따로 작곡된 노래에 서태지가 약간의 조언과 가이드용 랩 데모 8마디만 만든 것.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서태지의 음성이 실린 버젼은 이 데모 테이프에서 유출된 것이다. 허니의 기획사 직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매니저였던 최진열을 비롯해 전부 서태지와 연관된 사람들이어서 극비리에 도와줬다고.
-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할 때, 그의 매니저가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인은 홍콩 영화에서나 보던 수백만 원대의 비싼 초창기 핸드폰을 직업상 사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 서태지가 호기심에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특별히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뭔가 일 외적으로 다른 일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서태지의 이례적인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매니저는 서태지에게 "야, 이거 만 원도 넘어... 살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웃던 서태지는 일주일 뒤 그 다음 번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타게 되자 매니저에게 진짜로 만 원을 주면서, "그거는 나 주고 형은 이걸로 새 거 하나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물정에 어둡고 악기 구매할 때 물건 값 흥정도 못 해서 항상 다른 사람이 나서서 해야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시의 수익을 분배할 때에도 액수를 묻지도 않은 채 항상 "부모님에게 보내 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돈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아 별명이 서크루지.
- KBS의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가장 친한 지인으로 알려진 락커 김종서도 함께 출연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치약을 쓸 때 치약을 돌돌 말아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치약의 속을 열어서 잔여 분량까지 모조리 쓸 정도로 검소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인들에게 쏠 때는 확실히 쏜다고. 김종서, 그리고 매니저와 함께 인도 여행을 갔을 때 일행들이 지갑을 아예 꺼내지 못하게 하면서 여행 경비를 일체 본인이 부담하였다고 한다. 또 서태지 본인이 말하길 4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세금은 어떻게 내는지, 계좌 이체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몰라서 재산에 관련된 일은 늘 아버지께 맡겼었다고 한다. 맡겨놓고 있다가 필요하면 카드 받아서 쓰는 식으로 경제 활동을 해왔다고. 근래에 들어와서야 인터넷 뱅킹 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 KBS의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가장 친한 지인으로 알려진 락커 김종서도 함께 출연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치약을 쓸 때 치약을 돌돌 말아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치약의 속을 열어서 잔여 분량까지 모조리 쓸 정도로 검소하다고 한다.
- <컴백홈>을 패러디한 <컴배콤>이란 곡이 있었다. 음치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개그맨 이재수의 작품(?)이었는데, 망했다. 패러디로서도 후진 데다가 서태지한테 고소까지 당해 데꿀멍. 서태지가 음악 저작권 협회를 탈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믹한 컨셉으로 패러디한 것 때문이 아니라, 원작자의 동의 없는 발매. 즉 저작권 침해 문제 때문이었다. 이재수 문서에 언급되지만, 서태지에 대한 오마쥬라는 기획사 측의 주장이 어그로를 끈 탓도 있다.
- 서태지는 리메이크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음악을 팬들과 자신만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혔다. 가끔 YG엔터테인먼트나 서태지컴퍼니 소속 가수들이 라이브나 방송에서 서태지의 곡을 리메이크하다가, 최초의 레코딩 버전 리메이크로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필승'을 빌렸다. 후에 응답하라 1994 OST에서 리메이크가 성사되어 성시경이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너에게를 불렀다. 발라드곡을 발라드 가수가 부른 격. 성시경은 나레이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그리고 2016년 4월에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복면가왕에서 하여가를 리메이크 해서 불렀는데 이 역시 정말 이례적으로 리메이크를 허락받았기에 성사되었다.
- 스튜디오에서 보드 장갑에 보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 등으로 우리 나라에 생소하던 스노보더의 복장과 문화를 소개하여 스키장에서 마이너였던 보더들이 스키를 누르고 대세로 올라게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심지어 스노보드 종목인 프리스타일이란 이름의 곡도 있다. 세계적인 스노보드의 유행이 서태지가 등장한 때와 겹친 영향이 더 크지만, 서태지와 아이들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서태지와 함께 시나위에 있던 김종서, 이주노[60]는 우리 나라 스노보드와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거의 1세대다.
-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없는 가사[61]가 많이 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그래도 몬더그린 수준이었지만 솔로 데뷔 이후에는 음악 스타일 자체가 연주의 비중을 보컬과 비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레 가사가 잘 안들리는 경향도 더 강해졌다. 가사를 외우거나 가사집을 보지 않고 그냥 노래만 들으면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 그래서 한때 팬들에겐 그런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도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좀 많은데, 2집의 죽음의 늪 후렴구 가사 중 '피하지 않겠어' 뒤에 나오는 가사나,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그걸로 족해 족해'이후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62], 6집 인터넷 전쟁에서의 후렴구의 코러스로 들어가는 스크리밍 등, 심지어는 5집의 Take 3처럼, 가사집을 보지 않으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곡까지 있다. 게다가 Take 1의 경우 15년 일겅 남탕 콘서트에서 의미 불명 가사[63] 에 관한 팬의 질문에 서태지 본인이 직접 답을 했는데 원래 우리 말로 녹음을 하였으나 외계어(...)로 바꿔서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의미는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안 알려줄 거라고.(...)[64]
- 데뷔 초기부터 위천공(위에 구멍이 나는 병. 원인은 여러 가지다. 과로, 과음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술은 그냥 혓바닥에 할짝거리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고. 공개적인 행사에서 샴페인을 마실 때도 샴페인 거품을 앞니로 깨물기만 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65] 너무 힘들 때는 한 끼 식사를 우유로 떼워야 했다고 한다.
- 병역에 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은데, 94년말 연예인 병역 비리 파동에 따른 수사결과로 94년에 검찰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서태지는 성격장애[66]로 면제, 이주노는 피부과이상(문신)과 정신장애로 면제, 양현석은 병명미상으로 의병제대'이며,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다만 서태지는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제 사유를 위장 질환이라고 밝혔고 여기에 학력 미달이라는 설도 떠돌고 있다. 이는 실제로 고등학교 중퇴자들이 대기를 타다가 보충역(5급) 판정을 받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이는 1970년대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면제율이 높은 것을 그 다음 세대들이 오해하여 나온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군 입대 정원은 청년 인구수와는 무관하게 60만 명으로 항상 정해져 있으므로, 이들이 20대였던 90년대 초에는 지금 기준대로라면 현역을 가야 할 사람들이 방위 판정을 받는 일이 흔했다. 90년대 초 방위 유머가 유행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서도 1972년 출생자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다고 나와 있다
- 2010년대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갈 일이지만, 1990년대까지는 청년인구의 비율이 높았던데다가 복무기간도 2010년대에 비하면 길었던 시절이라 신체적, 정신적인 조건을 까다롭게 따져서 군대를 내보냈기에 2010년대 기준으로는 2급이나 3급 판정을 받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방위병이나 상근예비역, 공익근무요원으로 선발되는것이 일반적이었고, "서류면제"라고 해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면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이 아님에도 근시라서 면제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학력 미달이나 빈곤, 삼대 독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면제가 되었다면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으므로 세부적인 면제 사유는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이유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병역 비리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5급 판정이라고 해서 신체나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저 당시 5급이면 지금은 3~4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청년 인구가 감소한 2010년대에도, 과거 방위에 해당되는 사회복무요원이 대기를 하다가 면제 판정을 받는 일이 간혹 있다. 2018년 12월에 나온 이 기사에 따르면, 병무청 신체검사 4급 보충역 등급을 받고 사회복무요원 소집을 기다리는 청년은 기사 작성 당시 시점으로 5만 8천 명인데, 지방자치단체, 소방서,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내년에 소집할 사회복무요원은 3만 5천 명에 불과해 어쩔 수 없이 2만 3천 명은 2019년도에 소집되지 못하고 자동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역 가기엔 애매한 사람들을 예전에는 방위로 돌렸는데, 방위도 수요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남아도는 사람들이 면제가 되었던 것이다.
- 그래서 당시 기사에도 저학력으로 보충역 판정을 받은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며 병역 기피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 한편, 당시 언론 보도에 대해 서태지 측에서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할 것을 고려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67]
- 약 4년 후 수사 당시 상황을 회고한 1998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이경희 기자에 따르면, "가수 서태지가 만성위염으로, 탤런트 배용준이 약시로, 영화배우 박상민이 교통사고에 의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면제대상자로 인정됐다."라고 언급했으며, 1994년 당시 수사는 사전조사 불충분과 특혜와는 거리가 먼 대상자를 문제삼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고 설명했다. 기사 어느 기사가 맞는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 지금이야 이런 논란이 있으면 진단서가 공개되지만, 저 당시에는 병무청 자료 보관부터가 허접해서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수사 상황을 보도한 기사만 봐도, 컴퓨터에 입력한 자료가 없어 병무청이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병무청에 보관된 징병 관련 서류의 보관연한이 겨우 3년이라 자료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찰이 끈질기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자 마지못해 협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경찰 수사가 변죽만 울리다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탓에 같은 시기에 나온 보도라 하더라도 매체에 따라 면제 사유가 다르게 나온 경우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심지어 어느 연예인의 경우, 자신이 그런 이유로 면제되었는지 몰랐다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고(...)
- 주위 인물과 팬들의 성화로 지금은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한다. 중2 때 흡연을 시작했다가 고1 때 끊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컨텐츠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탓에 흡연장면이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8집 뮤직비디오의 촬영과정을 담은 다큐에서 자신의 테이블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이 아주 잠깐 나오는 등 약간의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번 남탕, 여탕, 혼탕을 주제로 한 클럽공연(일겅) 때 전자담배를 피우는(!!!) 퍼포먼스를 시전하여 팬들에게 충공깽과 심쿵을 선사하였으나 수년 전에 완전히 끊었으며 전자담배 연기는 단순 수증기라고 밝혔다. 최수종쇼에서도 담배 피우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건강에 나빠서(하희라의 질문)가 아니라 뻐끔거리기 때문이라고[68]. 참고로 시가는 원래 연기를 마시지 않고 입에 연기를 머금었다 뱉는 방식으로 피운다.
- 이는 1970년대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면제율이 높은 것을 그 다음 세대들이 오해하여 나온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군 입대 정원은 청년 인구수와는 무관하게 60만 명으로 항상 정해져 있으므로, 이들이 20대였던 90년대 초에는 지금 기준대로라면 현역을 가야 할 사람들이 방위 판정을 받는 일이 흔했다. 90년대 초 방위 유머가 유행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서도 1972년 출생자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다고 나와 있다
- 고종 사촌동생 강현구는 강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본래는 서태지가 6집 발매 직전 강현구도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던 상태라 서태지가 귀국하면 베이시스트를 맡기로 했으나, 귀국 날짜가 달라진 탓에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서태지에게서 베이스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69]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얼굴이 공개되면 괜히 서태지와 엮여 오해를 살까봐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70]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 국산 댄싱 리듬게임 펌프 잇 업 시리즈의 제작사 안다미로에서 서태지의 곡을 수록하려 했다. 난알아요/필승/하여가/우리들만의추억/울트라맨이야 등이 범주에 올라서 서태지컴퍼니 측에 연락을 넣었는데 수록은 하되 게임에 수록되는 사운드 부분을 직접 편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펌프 잇 업에 수록된 서태지의 모든 노래는 모두 서태지가 직접 편집을 한 뒤 안다미로에 보낸 것이다. 그 대신 자기 노래는 제대로 된 속도에 제대로 된 노래여야 한다며 러쉬 모드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정신.[71]
- 유머를 자주 구사한다. 그런데 그 유머들이 하나같이 썰렁하고 재미가 없다(...) 오죽하면 팬들도 장난반 진심반으로 노잼이라고 까고 있는 중.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본인은 개그를 좀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굴은 속여도 유머감각은 못 속이는 40대 아재답다.
- 데뷔가 워낙 오래된지라 서태지와 가까이 있어보고 싶어서, 닮고 싶어서 등의 팬심으로 연예인이나 방송계 직종 등에 종사하는 서빠들이 꽤 존재한다. 덕분에 메이킹 영상 등을 보면 스텝들 중에 싸인을 받거나 실물을 봐서 헬렐레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연예인들에게도 "연예인들의 연예인'"소리를 들을 정도.
- 우스갯소리로, 서태지가 컴백하면 음악 평론가들도 같이 컴백한다는 소리가 있다.
-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 중에 서태지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되지 않은 광고가 있다. 당시 은퇴 후에 미국으로 떠난 뒤여서 미처 녹음을 할 수 없어 대역이 대신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대역을 맡은 사람은 KBS 프로그램 스펀지의 권재영 PD로 스펀지에서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 자신의 단독 공연에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여 매 공연마다 기록적인 수준의 물자가 투입된다. 공연 시장의 규모가 해외에 비해 많이 작은 편인 한국에서 전폭적인 투자 없이는 해보기 힘든 실험들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서태지가 컴백할 때마다 업계의 노하우가 새로 쌓인다고 할 정도. 비단 음향만이 아니라 연출에서도 황당한 요구를 해오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경험이 공연 업계 전반으로 확산된다고.[72]
-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이다. 구한말 시절인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에 살았다고 한다.[73]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특유의 단어(일명 서울사투리)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과거 신해철과 스키장에 놀러갔는데 쉬고 싶다던 신해철을 부추겨 신해철은 스키를 탔고, 결국 신해철이 부상을 입게된 적이 있다. https://youtu.be/w8XrI7vY60M
- 굉장한 동안이다. 1972년생으로 현재 4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양현석(1970년생)이나 이주노(1967년생)는 그 나이대에 비슷해[74] 보이는데 서태지만 아직까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보인다. 물론 40대인지라 표정에 따라서 나이 든 모습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40대로는 절대 안 보인다. 이승환, 이선희와 함께 대표적인 동안 뮤지션 중의 한 명.
- 대한민국 가수 중 부르는 게 값인 공연료를 보유한 단 3명의 가수 중 한 명이다. 나머지 2명은 나훈아와 조용필이다.
- 제 3차 남북정상회담의 환송식에서 '발해를 꿈꾸며'가 송출되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가사말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 좋아하던 노래 중 하나인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오타쿠 ¶
오타쿠다.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아이들 시절부터 자기 기타에 닥터 슬럼프 코믹스 1컷을 붙여놓았고, 7집 당시 다큐에서 화장실에 원피스 만화책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와 괴짜가족을 좋아한다고.[75] 그외에도 시간나면 이것저것 보긴 하는 듯. 7집 당시 영상물을 보면 강 장관 절교해라면서 20세기 소년 대사를 패러디하는 모습도 나온다. 8집 수록곡 <틱탁> 프로모션 때는 마침 20세기 소년이 영화화되어 국내 개봉할 시기여서 공동 프로모션을 하기도 했다.
- 평소부터 RC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표현한거로 유명하다. 영상물을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RC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라 해도 될 정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즐겨온 취미생활이며, 2004년 블라디보스톡 때는 배에서 원격조종으로 RC를 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육아 때문에 잠시 휴업 중이라고.
- UFO, 미스터리, 특촬물 덕후이기도 하다. 사실 80~90년대에 어린이용으로 많이 나왔던 책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는 음악의 소재가 되거나 프로모션에 활용되기도 했다. 5집 수록곡 <테이크 1>은 외계유입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고, 장장 30분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까지 나왔다. 또한 6집 수록곡 <울트라맨이야>는 특촬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오타쿠를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서태지컴퍼니 내의 레이블인 괴수대백과사전 또한 80~90년대에 각종 괴수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 발매된 책자의 이름 괴수대백과에서 따온 이름[76]. 특히 8집은 모아이,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유명한 미스터리 떡밥을 집대성한 앨범이었다.
- 히데의 광팬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6집 태지에서 히데에게 영향을 받은 듯한 부분이 몇 개 보이며, 2002 ETPFEST를 개최할때 직접 히데를 섭외하면서 덕질의 최고봉에 다다랐다.[77] 물론 고인이 된 히데는 영상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고 SPREAD BEAVER 멤버들이 공연을 펼쳤지만... 하여튼 이는 히데의 첫 해외 공연으로 남게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들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던 히데의 꿈을 이루어준 서태지에게 최고의 선물인 고인의 메인기타였던 옐로우 하트를 하사했다. 일종의 바톤 터치의 의미라고도 하고, 박물관에 있느니 좋은 음악인에게 연주되길 히데도 바랄 것이라는 말과 함께.[78] 히데의 부모님은 리셉션장에서 서태지를 만났을때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요시키가 LUNATIC FEST에서 진짜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면서[79] 돌려준게 확인되었다. 사실 서태지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스프레드 비버 멤버나 엑스 맴버들이 가지고 있는 게 훨씬 어울릴거라 생각한 듯. 아님 나중에 히데 가족과 주변인들의 히데 팔아먹기를 눈치채거나... 그 후에도 서태지는 스프레드 비버의 키보디스트 INA와 히데의 절친한 후배인 루나씨의 베이시스트 J랑 7집 때 협업을 하는등 히데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 사실 만화 말고도 RC, 자동차(본인 소유로 람보르기니를 가지고 있다), 오토바이, 음향장비, 장난감 등 재력과 덕력을 고루 갖추고 골고루 다 소화하는 능덕이다(...) 한번 손을 대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기질이 강한 데다 손재주도 좋은 편이라 타고난 훌륭한 오타쿠다.
사회 참여 ¶
- 소셜테이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나마 사회 현안에 대해 메시지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2003년에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문화연대를 비롯한 30여 개 시민 단체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7집 앨범을 구상 중이던 서태지도 동참한 것. 서태지는 공식 홈페이지에는 덕수궁터 내 미대사관 신축 반대 배너를 띄워 서명 운동에 협조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 광화문 사거리에 열린 공연에는 당시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피아가 노개런티로 출연했는데, 여기에 서태지 컴퍼니는 회사 차원에서 거리 공연에 필요한 장비 등을 지원했다고 한다. 링크 결국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 2003년 3월에는 이라크전과 파병을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하고 성명서도 냈다. 기사 다만 활동 기간이 아니었으므로, 성명서는 원타임의 송백경이 대신 나와서 읽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이미 6.25전쟁을 통해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과 살아도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수백만의 이산가족의 비극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상 유례 없는 전 세계적인 반전여론 앞에서도 평화 및 외교적 해결을 버리고 행해진,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는 이라크 전쟁은 전 인류에게 인간다움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미국 행정부에게 죄 없는 이라크의 많은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았 습니다.
부시 미국 행정부는 즉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여 이라크 국민들이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정의에 대한 믿음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부끄러운 전장 앞에 대한민국 젊은이의 파병을 반대합니다.
특정국가의 자국이기주의가 빚어낸 침략전쟁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론과는 반대되는 한국정부의 파병계획에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은 침략전쟁을 부인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여 정부는 더 이상 국익을 명분으로 이라크전에 대한 굴종적인 지지를 통해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단 한사람의 대한민국 젊은이도 당당하지 못한 외교의 희생물로 내몰아서는 안 될 것이며 2002년 월드컵 당시 세계에 널리 보여준 우리 민족의 저력이 강대국의 침략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라는 부끄러운 현실로 가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전쟁파병 계획을 즉시 철회하기를 촉구합니다.
저는 한국대중음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라크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며, 반전평화운동을 펼치는 문화인의 대열에 서서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2003년 3월 25일 서태지
- 이러한 행적 때문에 반미 가수로 인식되어, 2004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을 그런 의도로 해석하는 기사까지도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영주권을 갱신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굳이 미국 영주권을 갱신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 기사
- 한편 당시 정치권에서는 서태지가 어떤 정당을 반대하는지를 밝힐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이재오 의원은 연예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경고하면서 문화 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태지의 팬을 자처했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도 그가 붙여 준 것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콘서트 당시엔 화환을 보냈다. 또한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까지 했으나 서태지는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번 만남을 거절해 오다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4년에야 처음으로 만났다. 대통령 당선 전과 재임 시기에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서태지를 곱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허지웅이 있는데,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수록곡 <발해를 꿈꾸며>도 김대중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고 의혹을 보냈다. 링크
- 이 때문인지 서태지는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발언도 홍보에 이용될 수 있다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감명 깊게 보았고 이를 계기로 원작 소설도 읽었다며 소설 파이 이야기를 추천하기도 했다.
- 1996년에 개원한 국내 최초의 장애인 전문 치과 병원에 기부한 사실이 20년 만에 알려졌다. 기사
팬 사랑과 역조공 ¶
1993년부터 경호업체 'TRI인터내셔널'이 서태지를 경호하고 있다. 이 업체의 김성태 대표는 서태지를 경호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기사
그런데 이 책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도 경호와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들이 인터넷에서 회자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경호업체와 계약할 때 팬 경호 조항을 넣었다고 한다. 절대로 팬을 폭행해서는 안 되며,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콘서트 전날에 팬들이 밤을 새고 있는 것을 알고 경호 업체를 보내 지켜주기도 했다고. 이를 갈무리한 블로그 글
재산 목록 1호는 팬들이 보낸 종이학이라고 한다. 2015년 3월 1일에 열린 앙코르 콘서트에서 언급했다. 이미 2007년에 데뷔 15주년을 맞아 팬들이 보낸 종이학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찍이 과도한 조공은 받지 않았다.
1995년도 3월, 잡지 인터뷰에서 20년 후에 팬을 만난다면 커피를 사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링크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에 커피 역조공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2년 12월에 영등포 CGV THX관에서 <서태지 특별 상영주간> 동안 서태지 공연 실황을 상영했는데 이 시기에 맞춰 6층 카페 건물을 빌려 서태지 카페를 운영한 것. 음반이나 티켓 등 서태지 팬이라는 증표를 보이기만 하면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했다. 종이컵은 서태지 팬덤의 상징인 노란색이었는데, 서태지가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갔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에도 서태지의 일러스트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벤트는 서울을 비롯해, 대구광역시, 부산, 광주, 제주까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12월 3일엔 대구시민운동장 주변, 5일엔 광주무등경기장 주변, 7일엔 부산사직종합운동장 주변, 제주도는 3일부터 7일까진 제주도 조안스튜디오에서 커피 버스를 운영했다.
2014년 12월 24일에는 평창동 자택으로 팬 300명을 초대하는 평창동 원정대 이벤트를 열었다. 기사 팬들에게 손수 포장한 선물 주머니를 나눠 주었는데, 기본 아이템은 여러 종류의 과자와 홍삼액, 핫팩이며, 여기에 서태지 브릭, 케토톱, 기타 피크 등이 랜덤으로 들어갔다.
방송에는 안 나왔지만, 팬들이 쓴 후기들을 보면, 집 앞에 푸드트럭을 세워 두고 율무차, 커피 등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인원이 많은 관계로 집 마당에서 팬들을 맞았기 때문에 마당 곳곳엔 난로를 설치했다. 즉, 자택 마당에서 진행한 팬미팅인 셈.
그런데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팬들을 추운 데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꽁꽁 언 초코파이만 던져 주었다는 내용으로 둔갑했다. 사실, 당시에도 그리 화제가 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일부 어그로꾼이 뒤늦게 거론하기도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자기 블로그에 퍼 가 조회수를 올리려 하는 블로거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일설에 따르면, 서태지의 팬이었지만 그가 결혼한 뒤 안티로 돌변한 일명 뭉클이 이벤트 당첨자 중에 포함되어 악의적인 왜곡 글을 인터넷에 퍼뜨렸다고 한다. 이 자는 나중에 익명제 사이트로 옮겨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한다.
유명인들의 스타 ¶
한때는 사실 지금도 문화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라서, 현재 활동하는 연예인들 중에서도 팬들이 많다. 연예인만이 아닌 유명인, 공인들도 포함한다. 이 외에도 언급된 사람이 있다면 추가 바람.
- 김남길 : 2014년 인터뷰에서 지금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여담이지만, 김남길의 대표작인 선덕여왕을 본 진(방탄소년단)이 김남길을 보고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은 방탄소년단의 멤버가 되어 서태지와 한 무대에 섰다.
- 김생민 : 연예가 중계에서 20년 동안 리포터로 근속하며 서태지와의 인터뷰를 전담했다. 스스로 밝히길 변치않는 팬이라고 한다. 서태지도 김생민과의 인터뷰를 선호하며, 김생글씨 라고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김생민이 과거 성추행 미투로 인해 연예계 생활을 불명예로 마감했기 때문에 차후 서태지 리포터가 누가 될지 의문이다.
- 故 김대중 전 대통령 : 서태지를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메신저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서태지 역시 고인의 통일관을 지지하여서 교류가 있었으며 음반사전심의제 철폐 노력도 기울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당시에는 팬들이 고인에게 청원들을 보내자 이를 달래는 글도 쓰곤 했다. 2004년 서태지의 7집 앨범 활동기에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남을 가지고 서태지는 자신의 싸인CD를 선물했다. 현재도 김대중 도서관에 가면 서태지의 싸인CD를 볼 수 있다. 고인이 서거했을 때에는 음악인 서태지의 이름으로 조화 화환을 보냈다.
- 권상우 : 서태지가 공연했던 2014 MAMA에 참가했었는데,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서태지 선배님 무대 보러왔다고 밝힘.
- 데니 안 : 자신의 팬이 서태지를 욕하자 정색하며 화냈다는 얘기가 유명.
- 문근영 :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팬이라 밝혔다.
- 손호영 : 위에 소개된 데니 안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팬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원작으로 한 스토리에 서태지의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 < 페스트>에 주연으로 나와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 슈가(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멤버들 중 가장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 피셜로 인증했다. 2017년 9월 21일에 방송된 두시 탈출 컬투쇼에서 언급했다. 해당 방송 20분 무렵부터 나온다. 신보 기자회견에서 최근 참여했던 서태지 25주년 콘서트에 대한 질문에 함게 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영광이었다고 밝히기도. 방탄소년단은 서태지의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인 'Come Back Home'을 커버하기도 했다. 멤버들 모두가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출연해 Come Back Home을 불렀고, 멤버 중 뷔와 정국은 서태지와 같이 하여가를 부르기도 할 정도.
- 성시경 : 매우 열렬한 팬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시경 특유의 직설적, 소신 성격을 보면 당연할지도. 이 인연으로 2013년 그의 명곡 <너에게>를 리메이크했다. 서태지 곡 중 최초의 케이스.[80]
- 성유리 : 서태지가 던지는 껌을 받기 위해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밤의 TV연예에서 밝혔다.
- 신화 멤버들 : 신혜성은 2001년에 SBS 도전천곡에서 난 알아요를 불렀으며, 김동완은 자신이 텐텐클럽 MC를 맡았을 때 신화 멤버들과 아카펠라로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리믹스(...)
???이이↗예에에에도입부를 재현하기도 했다. 이민우는 최근까지도 2014년 10집 컴백 콘서트, 25주년 기념 콘서트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심은경 : 서태지의 SHOW 광고에 함께 출연하였고 8집 활동 총정리 DVD인 398에서는 덕심이 가득한 나레이션을 맡았다.
- 유아인 : 꽤 오래된 팬이다. 전국투어 때도 목격된 바가 있다.
- 유진 : 괌에서 살던 시절 서태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 윤진서 : 서태지의 7집 활동 뮤직비디오들에 출연했다(로보트,Heffy End,Live Wire). 뮤직비디오 비하인드를 보면 7집 앨범에 싸인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7년 15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MC를 맡았다.
- 이은결 : MBC의 능력자들에 출연하여 팬심을 인증했다. 서태지 능력자로 나온 일반인도 기억을 못 하는 예전 TV방송에서의 율동도 기억하고 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수록곡 '너에게'의 엔딩 연호까지 알고 있었다.
- 이적 : 이적의 텐텐클럽을 진행할때 서태지의 신보가 임박하자 공재 출연 요청 게시판(...)까지 개설하며 팬들에게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결국 서태지가 출연하자 신이 나서 진행했었다. 정말 만나뵙고 싶었다고 기쁨에 겨워서 진행.
- 이정현 : 연예계로 데뷔한 이유가 서태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 이준기 : 서태지의 8집 컴백때 특별 프로그램에서 인터뷰어로 나와 팬심을 과시했다. 미니 콘서트와 ETP에 초대해달라는 말에 서태지는 그래도 줄을 서야 한다(...), 표를 사서 오라(...)고 화답했다.
- 지코 : 롤 모델이었던 서태지와 한 무대에 섰다. 2014년 MAMA 때 서태지와 함께 <컴백홈>을 공연했고, 이때 일은 자신의 솔로 앨범 수록곡 가사에도 언급했다.
- 최강희 : 싸이월드 미니홈피 한켠에 서태지의 사진만 따로 올려놓는 게시판이 있었다.
- 최송현 : 자신의 SNS에 팬심을 과시해왔으며, 2008년 ETPFEST 기자회견에서는 사회를 맡아 '16년 만에 서태지를 만나게 되서 꿈을 이루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2년에 팬들을 대상으로 서태지컴퍼니에서 주최한 클럽행사 '마지막 축제'에도 팬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최태성 : 트위터를 통해 팬임을 인증했다. 후에 인스타그램에도 서태지와 관련된 내용을 올리기도
- 타블로 : 에픽하이 멤버들이 모두 골고루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타블로는 확실한 서빠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라디오에서도 서태지의 노래를 선곡하기도 했고, 미국 생활 당시 하여가를 듣고 다녔으며, 박명수의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사전 심의제도가 아직도 있었다면 에픽하이는 앨범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분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 라디오에서 서태지의 팬이 보낸 ETPFEST 섭외축하 꽃다발을 자랑하기도 했다.
- 하현우 : 서태지가 최초로 방송한 V Live에 진행을 맡아 함께 출연했는데 방송이 아닌 개인 팬미팅(...)을 하고 갔다. 스스로도 팬심으로 진행해서 팬들의 말들을 잘 전해드리지 못한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2017년 9월 2일 진행되는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오프닝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한다.
- H.O.T. : 멤버 전원. 특히 문희준은 서태지 콘서트에서 여러 차례 목격담이 존재하며, H.O.T. 해체 이후 록 음악을 시도한 솔로 초기 행보가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이다.
- NELL : 멤버 전원. 이 때문에 서태지가 본인들을 서태지컴퍼니에 영입했을 때 서태지가 본인들의 우상이라 기뻤다고 밝혔다.
수상 내역 ¶
- 2000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4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8 MKMF 남자가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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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명을 鄭賢哲로 표기한 기사도 있었다.
- [2] 3집 당시 코디 인터뷰에 따르면 항상 등이 구부정한 자세라고 한다. 그 탓인지 프로필보다 작아 보인다는 목격담이 많다.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방탄소년단의 지민과 같이 선 모습을 보면 173.6cm인 지민이 2~3cm는 더 커 보이는데 서태지가 나이 때문에 키가 다소 줄었을 수 있다.
낼모레 50살인데 당연한 거다.. - [3] 1970년생으로 2살 터울이다. 직장 때문에 한때 일본에 거주했지만 현재는 홍콩에 살고 있다. 여담이지만, 2014년 MAMA 때 서태지가 누나네 집에 놀러 갔다고 한다.
- [4] 양측 모친끼리 사촌관계다.
- [5] 가운데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는데 외자 이름인지 서태지가 만에하나 있을 해코지를 걱정해 공개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 [6] 실제 서태지가 직접 트윗하는 것은 아니고 서태지컴퍼니 관계자가 대신 소식을 전해준다.
- [7] 댄스 음악의 경우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나미,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의 80년대에도 댄스 가수들은 분명히 있었다. 모든 노래들이 현 댄스음악과는 다르게 트로트와 같은 성인가요풍(소위 뽕삘)의 리듬과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고전 유로비트를 섞은 리듬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서태지의 등장 이후로 팝뮤직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리듬의 댄스 뮤직 즉 현 시대의 한국 댄스음악 스타일을 정의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힙합의 경우 서태지가 힙합크루를 만들고 활동한 정통 힙합가수, 래퍼는 아니지만 서태지의 랩으로 인해 '한국어로도 랩을 만들수 있다', '한국에서도 흑인 음악 장르가 성공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전 국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뮤직이 전 국민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후 랩과 힙합을 전문적으로 다룬 가수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며 90년대 후반 경부터 PC통신 유저들이나 교포출신들 사이에서 힙합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며 시작하고 발전한 것이 현재 한국 힙합계의 시작이다. 타블로도 하여가 노래를 듣고 영향을 받았음을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바 있다. 즉 힙합계에선 서태지가 일종의 뿌리이자 자양분이 되어준 셈이다. 비유하면 비틀즈가 하드록이나 메탈 밴드는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헬터 스켈터라는 명곡이 70~80년대 하드록, 메탈 장르의 프로토타입을 개척한 것과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
- [8] 사실 한국에서 힙합의 선각자는 서태지와 아이들 보다는 현진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미 2년 앞서 NEW DANCE 앨범으로 힙합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대중에 선보였으며, (랩이라는 요소를 아주 최초로 소개한건 아니다.) 공전의 히트곡 "흐린 기억속의 그대"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 흔히 말하는 힙합패션을 유행코드로 만들기 시작한 것도 현진영인것은 맞다. 다만 서태지가 일으킨 신드롬적인 인기와 파급력에 있어서는 비교불허한 수준이었으며 본격적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팝느낌의 댄스뮤직, 랩뮤직, 프로토타입의 힙합문화를 제대로 퍼뜨리고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류 문화장르로 개척한건 서태지라고 봐야함이 옳다. 그리고 앞선 각주에서는 댄스요소가 있어서 힙합이라 절대 말할수 없다고 나와있으나 애초에 힙합이나 랩뮤직 장르의시초가 70년대 중후반 뉴욕의 클럽 등지에서 믹스되어나온 '댄스뮤직'이 그 기원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와 같은 그룹들이 데뷔한 90년대 극초반 시기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붐뱁, G-펑크 등으로 이제 막 세분화되기 시작되었을 때이며 여전히 댄스 뮤직과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의 시대이다. 당시 본토에서도 여전히 힙합하면 힙합이라는 어원 그대로 엉덩이를 들썩대며 춤추기 좋은 댄스뮤직의 한 갈래라는 인식이 강했고 지금와서 사람들이 힙합하면 생각하는 자전적인 메시지의 가사와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는 오히려 90년대 중반부터 2pac이나 이스트 코스트 붐뱁 래퍼들인 노토리어스 B.I.G., Nas와 같은 뮤지션 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 [9] 2014년부터는 동년도 발매된 9집 수록곡 중 회고적 성격을 띠는 '90's Icon'의 영향으로 '90년대 문화대통령'으로 쓰이고 있다.
- [10] 맘에 드는 소리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베이스 앰프만 만지거나, 드럼 한 소절을 1달 동안 녹음하거나...
- [11]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 2004년 밴드 멤버들이 했던 말을 팬들이 차용했다.
- [12] 이은성이 임신 중일 때 준비 중이던 9집의 Chrismalo.win의 삑뽁삑뽁 소리에 아기가 격하게 반응해서 태명을 삑뽁이로 지었기 때문. 9집부터 아빠 이미지가 되면서 이 별명의 지분이 부쩍 늘어났고, 팬들도 이 기믹을 잘 써먹는다. 콘서트에서 서태지가 "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팬들이 "육아에서 해방되세요"라고 대꾸할 정도. 가수도 팬도 나이가 들었다.
- [13] 다만 이 때문에 '하여가'에서 이태섭의 기타 파트 카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서태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떠나서 프로듀서는 앨범의 모든 것을 총괄할 책임이 있으니까. 3집에서 외국계 세션을 대거 기용한 것은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 [14] 물론 8집 전후로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성북동에서 생활하긴 했는데, 이때의 생활상은 오직 김종서만 알고 있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럽게 평창동 이사를 했고, (하필이면 이 이사가 언론에 걸려서 이사에 대한 내막이 또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안습한 상황) 그 후는 우리가 보는 대로 결혼 후 육아의 무한루프. 9집 들어 그의 활동이 2015년 펜타포트 참가까지 계속 되는 데엔 육아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싶어서 라는 선경험을 겪어본 팬들의 의견이 넘쳐난다.
- [15] 정독도서관 옆,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앞마당 부지가 어린 시절 집이 있던 곳이라고 방송에서 밝혔다.
- [16] 특성화고인 대동세무고등학교와 같이 있었다. 1993년에 폐교되었다.
- [17]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학교 교사들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잘못을 했어도 절대로 교사한테 맞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교사가 자신을 구타하려고 하면 학교를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반항아.
- [18] 원래 이 부분은 서태지가 '일진'이었다는 식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흡연, 불성실한 학교생활 등과 같은 일탈행위로 따지자면, 당시의 서태지는 충분히 불량학생 부류에 들어갈 만하다. 그러나 불량학생도 급이 있는 법. 서태지가 일진의 가장 주된 특징인, 주변 학생들에 대한 학교폭력 및 집단괴롭힘, 민폐를 행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전무하다.
- [19] 서태지와 김종서가 그렇게 짤없이 나가버리고는 신대철은 오경환과 함께 신대철과 자유를 결성하여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시나위 5집 멤버에 오경환은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뮤즈에로스, 라디오데이즈 등의 레전드 밴드들에 그 이후에도 꾸준히 참여하였고, 드럼 교실도 여는 등 나름 락계에서 알아주는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경환이 2018년 5월 간경화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알려졌다.
- [20]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김종서의 제안으로 실제 나이보다 2살 올려 20살로 속여서 활동했다.
- [21] 정통 메탈을 고집하던 리더 신대철과 달리 김종서는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록을 주장했고, 서태지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신대철은 서태지에게 고전 록 밴드들도 들어보길 권유했으나, 서태지는 고전 락밴드를 듣는 것을 고역처럼 여겼고, 새로운 장르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신해철 왈, 락 말고 다른 장르는 전부 쓰레기라고 선배들에게 세뇌를 받던 시절이라고(...)
- [22] 공연 사기는 서태지 본인이 이동연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해체 원인이고, 신대철은 이이제이에서의 인터뷰에서 신대철이 서태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데 대해 서태지가 반발한 것이 직접적인 탈퇴의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 [23] 시간이 흐른 뒤 캔기획의 강승호 대표는 엠넷 비틀즈코드 2011년 6월 23일 방영분에 출연해서 "그 당시 악기 만지는 걸 좋아하던 서태지가 다른 회사에 갔다가, 그쪽 레코딩용 콘솔을 보곤 나와 계약을 못 하겠다고 통보해왔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서태지, 강승호 양쪽 다 친분이 있는 매니저 최진열이 쓴 책에도 보컬과 연주자 둘 다는 불필요하기 때문에 '강승호가 김종서만 영입하고 서태지는 거절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강승호의 증언은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팬들의 심기를 고려한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 [24]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본 공연을 하면서 지켜 본 바로는 서태지의 일본어 실력은 능숙해서 통역 없이 혼자 일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 [25] 무궁화 밴드 멤버의 서태지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일 끝나면 집에가는 애"(....)
- [26] 신대철이 자신의 책 '뛰는 개가 행복하다(2014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시나위 가입 후 서태지라는 예명으로 바꾸겠다고 하길래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서태지 본인이 서태후의 '서태'와 타이지의 '지'를 합친 거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 [27] 특종 TV연예의 심사위원 전영록은 '메탈밴드의 서태지가 이렇게 앳되고 예쁜 얼굴인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 [28] 재미있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였는지 개그맨 지석진도 무명가수 시절 부른 '난 알아요'라는 곡으로 거쳐가기도 했다.
- [29]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를 특종 TV연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매니저를 맡았던 최진열 씨의 증언으로 그 이전에도 많은 매체에 출연했다고 한다.
- [30] 바비킴, 변진섭, 조관우, 이루에게 곡을 줬던 작곡가. 현재 예당엔터테인먼트 음악본부장으로 임재범의 빈잔을 편곡했다. 그리고 하광훈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1년까지도 악플에 시달리게 되었다.(…)#
- [31] 한국 록계의 초기 거장 김희갑의 부인이자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작사, 드라마 작가 출신으로 김수현 작가의 동기.
- [32] 아침마당의 전 수장. 공교롭게도 11년 경력의 아침마당을 첫시작한 게 고작 이 프로그램 나온 지 5일 전이었다. 지금은 불교TV에서 프로그램 진행 중. 당시 특종 TV연예에서는 연예평론가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에 대한 칼럼을 많이 썼다. 덧붙이자면 세시봉 멤버의 일원이었다. 물론 직접 노래한 것은 아니고 당시 세시봉에서 사회를 봤다고. 연예 및 음악 평론은 그 당시부터 시작했다고...
- [33] 황해 & 백설희라는 1950~60년대의 전설적인 배우 & 가수 부부의 아들이자 딸인 전보람은 티아라의 멤버. 자신 자체도 발라드록의 대가이다. 2008년 17집 발매. 영상을 보면 진행자 임백천이 별도의 수식어 없이 바로 "전영록 씨 안녕하세요!"(방청객 와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34] 정확하게는 '8점 셋, 7점 하나'로 평균 7.75이며 여기선 끝의 5를 반올림해서 7.8로 발표했다. 그 당시 매니저 최진열이 방송 끝난 후 방송국에서 "기껏 출연하라고 해놓고 엿먹인다"라고 흥분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인 데다 서태지는 이 프로그램의 음악 담당이었다(스태프롤에도 이름이 나왔다).
- [35] 2014년 김구라의 인터뷰에서 서태지는 '원래 당시 프로그램 컨셉이 가수들에게 평론가들이 혹평을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라며 당시 평론가들을 감싸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36] 엄밀히 말해 서태지가 <특종 TV연예>의 혜택을 본 게 아니라, <특종 TV 연예>가 서태지의 덕을 본 것이다.
- [37] 농담이 아니다. 으레 신인들이 기 죽어서 활동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연예계는 인기가 깡패인데...
- [38] 이지아의 본명은 김상은이다.
- [39] 당시 은둔 생활하는 서태지를 추적하는 TV프로그램이 있었을 정도로 결혼 사실과 관계 없이 서태지는 언론의 목표 대상 1순위였다. 여기에 결혼을 공개한다 해도 어차피 못찾을 서태지가 갑자기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은둔 생활을 안 해도 될 걸 결혼 공개 때문에 은둔하게 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을 받는 상태에서 결혼 사실을 밝힌다면 부인에 대한 온갖 추측과 뜬소문이 퍼지면서 가족들이 간접적으로 많은 고통 받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 [40] 인터넷 초창기였던 당시에도 서태지의 부인과 자식을 등장시킨 팬픽들이 넘쳐났던 것은 서태지의 사생활에 대한 팬들의 호기심이 지대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음악에만 집중하자는 팬들은 이런 팬픽 문화를 못 마땅하게 보았지만 말이다.
- [41] 이런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이 사건은 연예가중계 같은 연예뉴스가 아닌 각종 케이블 및 지상파 뉴스에는 물론 KBS 9시 뉴스 메인엔 네 번째, SBS 8시 뉴스에는 1보로 떴다.
- [42] 해피투게더에서 출연했던 절친 김종서의 증언에 따르면, 바깥에 5분 다녀올 거리를 다녀오는 데에도 1시간 정도의 준비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 [43] 6집 발매 직전 이 서태지 죽이기가 가장 극도로 달했다. 서태지가 앨범이 나오기 전 모든 언론 및 미디어에 출연 거부 및 인터뷰 거부를 하였고,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 촬영조차도 엿보는 것조차 못하게끔 서포트 멤버도 비공개로 하고 있었다. 당시 연예가 중계나 한밤의 TV연예와 같은 연예뉴스에서 짤막하게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는 서태지의 모습이 찍히긴 했는데,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지라 각 멤버 중 누가 누군지도 분간이 안 갔을 정도였다. 물론 서태지는 후에 자신의 이미지와 멤버 공개는 컴백콘서트에서 처음 밝히는 것으로 하겠다라고 전하고 인터뷰 및 출연 거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으나, 이미 서태지 죽이기는 시작되어 있던 상태였다.
- [44] 특히 6집 발매시기 자체가 2년 만의 신보에다가 4년 만의 공연활동 재개라는 서태지 본인에게도 팬들에게도 특별한 시기였다. 6집 컴백공연 자체가 활동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서태지가 팬들에게 전해주는 깜짝선물쇼였는데, 그걸 미쳤다고 시작 전에 다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서태지는 6집 컴백쇼를 성황리에 마친 후 인터뷰에서 언론 인터뷰를 거부했던 이유를 이런 거였다고 밝혔다. 서태지 성격상 과격한 표현만 안 썼을 뿐이지 말을 풀어보면 이런 거다. 스포일러하고 보여주는 게 서프라이즈 선물이 될 리가 있나.
- [45] 각트 개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이러한 원칙에 철저하다. 드라마나 영화 출연진에 대한 인터뷰도 미리 스포일러가 안 되는 선 안에서 모든 인터뷰 준비를 영화/드라마 제작진들이 감수한다.
- [46] 어머니끼리 사촌, 외할머니끼리 자매. 여담으로 둘이 처음으로 안면을 튼 게 서태지와 아이들 2집 당시였는데 그때까지도 정작 친척인 줄 서로 몰랐다고 한다.
- [47] 실제로 데뷔 첫해 대상을 받고 소감이라고 했던 말이 그냥 랩 음악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요...
- [48]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10대~20대 초반 청소년.
- [49]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과 같은 서태지 출현 이전의 댄스가수들은 물론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당대 가요계 원탑이나 업계 최고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기록으로 봐도 히트곡들은 많았으나 앨범판매량이 100만장에 못미치며 가요대상 수상기록도 전무하여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에는 확실히 못미쳤다는 것이 정론이다. 엄연히 이들의 전성기 당시 가요계에선 여전히 가왕 조용필, 공식적인 가요계 최초의 밀리언셀러 변진섭등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 [50] 방송, 언론, 음반업계 등.
- [51] 이 곡은 KBS에서도 방송금지되었다.
- [52] 참고로 헤비메탈 밴드인 주다스 프리스트도 거꾸로 재생하면 '자살해'(do it)이 들린다며 주다스 프리스트 노래를 듣다가 자살한 학생의 부모 등에게서 소송을 당했는데, 이때 주다스 프리스트의 대답은 "우리가 그런 거 넣을 거면 'CD 더 사라'나 '나가면서 T셔츠도 사라'라고 했을 것이다"(...)라며 비꼰 적이 있다.
- [53] 홍석천이 커밍아웃하고 매장당한 것이 몇 년도인지 생각해보면 이 시기 게이라는 단어는 인격살해에 가까운 단어였다.
- [54] 서태지가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게 아니라 서태지가 몸소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2009년 뫼비우스 투어 당시 서태지는 "나는 임신도 가능한 남자"라며 셀프 디스를 시전한 바 있다
- [55] 정작 이주노 건은 많은 팬들도 의아해 했다. 그냥 태지한테 빌리지 왜 이름을 빌려서 타인에게 돈을 빌렸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 이주노는 동생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이 빚을 갚아준 건 양현석이었다. #
- [56] 출처 서태지 아카이브
- [57] 배우 박상민이 타는 그것 맞는다.
- [58] 참고로 2대 중 한 대는 서태지가 08년 ETPFEST에서 관객 경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 [59] 일단 나름 차덕후답게 다양한 차를 소유하고 알려져있지만, 많은 매니아들에게 익숙한 것은 6집과 7집 당시에 타고 다녔던 현대 에쿠스 (이른바 에쿠서라고 하는)다. 물론, 토스카(이건 애칭이 토서카로 알려져있다.)를 소유한 뒤에 에쿠서의 행방은 묘연하다. (물론 평창동 자택 혹은 서태지컴퍼니 건물 주차장에 있겠으려니 하고 추측만 무성하다.)
- [60] 이주노의 소속가수 영턱스 클럽의 멤버 송진아는 심지어 이주노의 영향 때문에 스노우 보드에 빠져 나중에 가수 때려치고 스노우보드 선수가 되었음.
- [61] 잘 안 들리든지, 아니면 분명히 가사는 가산데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다.
- [62] 팬들과 방송에선 '내 사투로 내가 늘어 놓을래'로 단정지었다.
- [63] 티라키소리모올라키솔졉이라 들린다.
- [64] 다만 5집 Seo Tai Ji 앨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특히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당시에 만든 앨범이었기 때문. 그 때문인지, Take 5를 자주 셋리스트에 올리기는 하나, 나머지 곡들을 셋리스트에 잘 안올리려고 하고 (특히 Take 3는 Quiet night 투어에서야 첫 라이브가 나왔고, 방송 등에서도 5집에 관련된 이야기는 잘 안 하려고 하는 모양. (게다가 실제 5집 전후 상황은 이지아와 관련된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야기 하기가 어려운 것이 맞는다.) 즉, 아무리 매니아들이 Take 1의 외계어로 바꾼 가사를 원 가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 [65] 그러나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어려운 자리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 술잔을 입에 대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했는데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 것 보면 위가 안 좋아서라기보다 술에 취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듯.
- [66] 당시에는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한 사람들을 정신장애로 판단하여 군 입대에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는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그런 이유로 성격장애 판정을 내렸다면 록 밴드 출신들이 유독 면제율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 [67] 본 위키니트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은 폐간된 음악잡지 <뮤직라이프> 1995년 2월 호 또는 3월호에서 담당 기자가 언급했다. 해당 잡지 스캔본 갖고 계신 분은 추가 바람 아무튼 본인은 성격장애를 인정한 적이 없다.
- [68] 담배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고 입안에 고인 것을 뱉어낸다는 뜻. 매니저였던 최진열 씨도 같은 말을 했다. 잘 모르겠다면, 숨을 참은 채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하면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 [69] 서태지가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빨강색의 베이스 기타라고 언급했다. 아마도 잭슨인 듯.
- [70] 다른 개토네이션의 멤버들도 얼굴에 페인팅을 하였다.
- [71] BGA, 스텝, BPM측정까지 모두 다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건 사실무근. 물론 협의과정 중에 위의 정보를 참고하여 수정한 것은 사실이다.
- [72] 대표적인 예시로 2008 ETP의 등장씬에 쓰인 캡슐에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9 ETP에는 2008에 쓰인 캡슐을 다시 쓰기 위해 보수하는데도 또 다시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고.
- [73]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같은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손석희 앵커, 김태영 前 국방부장관, 성우 고 장세준 등이 있다.
- [74] 양현석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엔 노안이라는 말이 많았다. 얼굴이 젊을 때보다 많이 안 늙어서 지금은 노안까지는 아니다.
- [75] 재미있게도 괴짜가족 주인공 고테츠의 한국판 이름은 변태지.
- [76] 괴수들 특유의 킹왕짱 먼치킨 스런 이미지 때문인지 자신의 레이블 (괴수인디진)내의 뮤지션들 또한 그런 킹왕짱 먼치킨 뮤지션이 되길 바란다는 의미까지 포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굇수들이 되었다.
- [77] 여담이지만 파타와 히스도 Dope Headz라는 밴드의 멤버로 참석했다. 후기 영상을 보면 서태지와 대화를 나누는 파타를 볼 수 있다.
- [78] 간혹 일부 서태지를 싫어하는 히데 or 엑스재팬의 팬들이 실제 기타가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함께 있던 스탭의 후기가 공개되면서 급짜식됐다. 그리고 그냥 페르난데스 시그네쳐 모델이라면 돈 있는 대로 있는 서태지한테 굳이 선물을 하겠는가? 악기 구입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서태지인데 말이다. 또 다른 부정적인 의견은 이것이 히데 주변인들의 일종의 마케팅이라는 시선인데. 그 이유 중 큰 것이 히데의 유족들이 히데가 사망한 이후 다방면으로 고인을 돈벌이용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hide museum의 경우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팬클럽의 모금 운동이나 지방 자치단체의 보존 요청 등을 무시하고 철거해버렸을 정도. 이 경우는 그냥 할 말이 없다.(...)
- [79] 요시키 -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면서) "진짜입니다."
- [80] 후에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며 밝힌 바로는 서태지 역시 성시경의 너무 팬이라서 허락해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