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 신라 → 고려(高麗) |
관등 | 각간(角干)(?) |
자칭 | 장군(將軍) |
성씨 | 이(李) |
이름 | 아자개(阿玆蓋) / 원선(元善)(?) |
아내 | 상원부인(?), 남원부인(?) |
아들 | 견훤, 능애, 용개, 보개, 소개 |
딸 | 대주도금 |
부 | 작진(酌珍) |
모 | 왕교파리(王咬巴里) |
증조부 | 김구륜[1] |
거점지 | 신라 사불성(고려 상주) |
생몰연도 | ? ~ ? |
목차
출신 ¶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정확히는 진흥왕의 3남 구륜(仇輪)이 아자개의 증조부라고 한다. 구륜의 손자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아자개라는 것이다. 이비가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은 책이지만, 삼국유사 견훤조가 이를 인용해 내용이 알려져 있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의 현손이라고 써 있는 계보가 있지만 다른 것을 떠나 진흥왕은 576년 사망했고 아자개는 900년경에 활동했으니 300년이 넘게 나는 시대 차이상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자개가 진흥왕의 현손일 수는 없어서 이 계보는 정확하지 않다. 후백제의 정통성을 위해 아자개의 혈통이 조작되었다는 게 유력하지만[3] 실제로 아자개의 가문이 신라 외척의 후손이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
사실 아자개의 선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백제 부여씨의 후손이며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직계 8대손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상주 지방에서 막강한 힘과 재력을 갖추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던 걸로 보아 보통 가문은 아니었던 건 확실한 듯.
생애 ¶
본래는 성주가 아닌 농부였는데 훗날에 집안을 일으켜서 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반 농민이라기보다는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지방의 토호 노릇을 하던 부농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4] 이후 9세기 말엽 신라가 서서히 몰락하며 망해갈 조짐을 보이자 경상북도 상주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켜서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였으며, 후에는 상주 전 지역을 장악하였다.[설화]
두 명의 부인에게서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얻었다고 전하는데,[6] 그 중 장남이 바로 견훤이었다. 왠지 모르게 낮은 신분에서 큰 세력가로 성장했다는 점이 아들인 견훤과 무척 흡사한 면이 있다.
견훤 외에도 4명의 아들들인 능애, 용개, 소개, 보개 등 역시 당대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고 하는데 당시 아자개가 일개 농민의 신분에서 일약 지방 성주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일에도 자식들의 공이 컸을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인 견훤과 세력을 마주보는 묘한 처지에 있어서 그런지 늘 아들인 견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부자가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국경이 맞닿는 바람에 분쟁이 일어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고도 한다. 심지어 견훤이 신라 군대에 들어가 말단병부터 시작하여 힘들게 비장 벼슬을 얻었는데 도중에 아자개가 반란을 일으켜 상주를 점령하는 바람에 벼슬을 버려야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견훤이 왕건이 상주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을 알고 자신이 먼저 상주를 무력으로 삼키려다 아자개와 동생들의 반대가 완강하여 포기하였다는 설도 있으니 그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 주변의 패권을 두고 왕건과 싸울 때도 견훤 입장에서는 고향이었을 상주는 끝끝내 왕건의 편으로 남았다. 인근의 예천군이나 안동시의 일부가 견훤의 세력권으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아들 견훤의 대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훼방을 놓은 수준이라, 아마도 아자개는 왕이 된 견훤의 출세에 강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코 정상적인 부모로써의 모습이라 볼 순 없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후에 견훤이 아닌 왕건에게 상주 땅을 바쳤다. 이에 왕건은 크게 기뻐하여 고려로 오는 아자개를 맞이할 적에 마치 아버지를 모시듯이 우대하였으며, 아자개의 환영식을 열 때에는 상석의 자리를 놓고 다투던 두 대신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이는 아자개의 상주가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근접하여 상당한 전략/전술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라이벌의 아버지가 귀부했으니 후백제를 까기 위한 좋은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태조인 왕건을 띄우고 적이었던 궁예와 견훤을 깎아내리는 기술이 많은 책들에서도 아주 좋은 소재인 견훤의 아버지라는 걸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아자개가 귀순해왔다.' 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때문에 견훤의 아버지와 이때 항복해온 인물이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그런데 동명이인이 맞다면 그럼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왕건이 그를 정성들여 예우했는지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견훤의 부친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한 게 맞다고 보는 게 대세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 ¶
작중에서의 생몰년은 837년 ~ 935년.[7]
고려 귀부를 환영하며 왕건이 벌인 연회에서 즐거워하는 아자개옹.
전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김성겸이 열연하였다[8]. 극중의 아자개는 제멋대로이며 주책이 많은 노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김성겸이 아자개의 캐릭터를 상당히 개성적이고 코믹하게 연기하여 화제가 되었다. 극중 등장한 박술희나 애술과 함께 개그 캐릭터의 한 축을 차지한다. 단, 등장 초기에는 아직 코믹하게 망가지지는 않았고 다소 언행이 거친 면이 있는 토호 수준이었다. 거기다 일자무식에 바깥 사정에 어두운 양길과 달리 최승우가 찾아왔을 때 "쯧쯧쯧. 이름을 들었는데 아깝구만. 자네같이 유식한 친구가 왜 견훤이 같은 놈 밑에서 일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본격적인 개그 캐릭터가 된 것은 박술희를 만난 후.(43회)
견훤은 아자개의 장자이지만 계모와 사이가 나빠서, 계모와 그 자식들을 총애하는 아자개와 대립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채택했다. 그 후에 나온 대중교양서인 임용한의 '전쟁과 역사'에서는 견훤의 동생들 이름에는 '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데 견훤의 이름에만 'ㅐ'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견훤만 어머니가 다른 자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자개는 자식인 견훤이 자기랑 갈라서고 성씨도 갈아버렸다면서 화를 내고 미워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한편으론 나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장면도 있지만.
극중의 설정상 전처의 호칭은 '상원부인', 후처는 '남원부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계모인 남원부인과 이복 동생인 용개는 견훤을 특히 싫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극중에서 남원부인은 대주도금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상주를 떠나 완산주에 들어가게 되면 견훤의 신하가 될 것이고, 그리 되면 변방으로 쫓겨나면 가야하며,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될 것이므로 가면 안 된다고 한다. 용개의 경우에는 설령 형인 견훤이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잘 대해주려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까지 그렇진 않을 것이라며 매우 불신하는 입장에 있었다. 대주도금의 동생으로 나오는 보개의 경우에는 견훤을 따르는 누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좀 더 온건하게 말은 하지만, 그 역시 별로 견훤을 좋아하는 입장은 아니다. 아자개의 고집에다가 주변 사람들이 이러하니 견훤의 설득이 먹혀들어갈 구석이 없다시피 하다.[9][10] 견훤의 입장에서 보면 남원부인은 그야말로 가정불화를 조장하는 만악의 근원, 악역이나 다름없지만, 남원부인의 아자개에 대한 애정만큼은 진심이다. 늙은 남편을 등쳐먹을 궁리만 하는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의 후처 클리셰와는 다소 동떨어진 의외의 캐릭터. 왕건과 충주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아자개는 "이 부인이 항상 날 이렇게 추켜세워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고, 아자개가 중병에 걸려 앓아누웠을 때는 손수 대소변을 받아내며 헌신적으로 간호하고, 100살이 다 되어 귀신처럼 늙어버렸을 때에도 아자개를 이용하거나 떠나지 않고 항상 곁을 지키면서 백년해로하는 닭살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편 쪽이 주책이 심해서 문제지(...).
견훤은 상주 지방의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화해하려고 시도하지만, 계모와 그 아들들이 견훤을 싫어하여 방해하는데다가 무엇보다 아자개 본인이 견훤과 엇나가고 있으니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사실 아자개는 장남인 견훤이 자신의 밑에서 함께 하기를 원했으나, 견훤이 성을 바꾸고 독자적인 세력까지 이뤄버리자 이에 크게 섭섭해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계모가 옆에서 뻐꾸기까지 날려대니 더 버틸 재간이 있을리가 없다. 최승우가 찾아와 태황제로 모시러 왔다고 했을 때는 은근히 욕심을 내기도 했지만, 견훤이와 자신은 부딪치면 싸우기만 할 거라고 생각해서 곧 포기해 버린다. 아자개 말로는 견훤과 자신은 성격이 똑같기 때문에, 같이 있으면 서로 충돌만 할게 뻔하니, 차라리 따로 지내는게 양쪽 모두에게 낫다는 것.
왕건이 대주도금을 연모하던 박술희를 상주로 보냈는데, 박술희는 놀라운 친화력으로 아자개의 비위를 맞춘다. 아자개는 이전에 한번 대주도금이 이끄는 상주군과 박술희와 신숭겸이 이끄는 척후대의 교전을 들면서 박술희보고 산도적같이 생겼다 한다. 이에 박술희가 <대학>의 구절[11]을 들어 '사람을 겉보기만 보고 미워하지 말라'라고 재치있게 응답하자 무식한 줄 알았는데 제법 유식하다라며 인식을 바꿔간다. 이 만남 직후에 열린 연회에서 아자개는 박술희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며 한층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데 박술희 한 명이 아자개를 살살 꼬셔 급 친해지는 동안 백제에서는 단 한 명도 아자개의 비위를 맞춰 그 대항마로 떠오른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박술희의 엄청난 친화력을 알 수 있다. 견훤과의 사이가 워낙 좋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박술희 역시 첫 대면은 상주를 침공한 적국의 장수였던 만큼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견훤의 친동생이자 아자개의 아들인 능애도 물론이거니와 후백제 최고의 브레인 최승우조차 아자개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적국의 장수'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자개와 친분을 쌓기 유리한 점도 있었는데, 능애가 아자개에게 오건 최승우가 오건 아자개가 견훤을 경멸하고 무시했던 이유. 즉 '근본을 부정했다' 라는 것은 도저히 바꿀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런데 박술희를 경계했던 이유는 '적국의 장수=영토를 빼앗고자 하는 나쁜 놈' 이라는 것 하나뿐이었고, 박술희는 술이라는 선물 공세를 퍼부어 그 공식(?)을 단번에 깨버렸다. 거기다 후백제에 능애나 다른 인물이 오면 후백제와 함께하자느니, 상주에 병력을 주둔하겠느니, 충주를 치는데 사벌성을 빌려달라느니[12] 같이 아자개가 싫어하고 머리아파할 발언만 하는 반면에, 박술희는 어떤 요구조건 없이 (그야말로 무조건) 아자개의 비위를 맞춰주니 아자개가 박술희에게 친근감을 느끼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왕건과 박술희는 아자개를 상보[13]라 부르며 선물 공세까지 펼치며, 철저하게 아자개의 비위를 맞추었고, 사벌성을 왕건 측에 우호적인 중립지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견훤은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해서 대체 이 자식과 무슨 원한이 있으시길래! / 아버님만 아니었으면 그냥 다 싹 쓸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터인데...!하다가 파진찬 최승우에게 진시황과 여불위의 고사를 언급하면서 공격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언급한 적도 있다. 물론, 말로만 그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백제에서 온 사람이면 친족이든 신료이든 가리지 않고 푸대접한 반면[14], 박술희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크게 후대하다가 급기야 왕건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기에 이른다.
아지태가 처형당하고, 궁예가 도인의 약을 먹고 깨어나 강장자를 쳐 죽일 시점에선 아자개는 아예 한 달에 한 번 박술희를 보는 걸 인생의 낙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때 쯤엔 완전히 소인배 광인이된 궁예가 무조건 살인으로 사건을 해결할려고 하는지라, 철원 황궁에서는 긴박하고 심각한 분위기의 장면들이 나오거나 사람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전개까지 나오는 반면에, 유독 상주 지역을 보여주는 씬에서는 주로 박술희와 아자개가 같이 노는 장면으로 인해 코믹한 분위기가 연출된다.[15] 그러다 왕건이 철원을 빠져나가고자 나주로 발령나갔을 때 박술희 역시 나주로 불려가게 되었는데, 아자개는 이제 뭔 낙으로 살아야 하냐며 매우 아쉬워한다. 그동안 박술희 덕분에 지역이 평온했는데, 앞으로 상주지역이 시끄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하는건 덤. 박술희의 후임으로는 이흔암이 왔는데, 이흔암은 아자개를 별볼일없는 늙은이 취급했고, 아자개 역시 이흔암을 푸대접한다. 그동안 박술희는 물론이고, 태봉국 실세이자 황제의 의형제인 왕건에게 '상보' 소리를 듣고 산 아자개에게, 이흔암은 첫대면에서부터 다짜고짜 '노인장'이라고 불러 가족들 전원의 심기를 건드린데다, 박술희와 달리 이흔암은 일자무식이며 태도까지 오만불손하니 아자개가 이흔암을 싫어하는건 당연지사.[16]
그 와중에 강비와 두 태자들까지 끔찍하게 살해한 궁예는, 빨리 후삼국을 통일하려면 상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신라와 후백제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전에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이 멸망해버렸다. 아자개 입장에서는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종간이 언급했듯이 멸망직전의 태봉국은 이런 힘든 전쟁을 전개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왕건이 즉위한 이후 갑자기 병(육종)에 걸려서 고생할 때[17] 왕건이 박술희를 통해 보내온 천년 묵은 산삼을 먹고 운좋게 완전 회복한다. 그것도 그냥 천년 묵은 산삼도 아니고 '봉삼'이라고 따로 이름까지 붙어있는 네임드였다. 이 때 견훤도 부랴부랴 전국을 수소문하여 오백년 묵은 산삼을 구하여 최승우를 통해 보냈으나 이미 아자개는 천년 산삼을 먹고 회복한 뒤였다(…) 아자개는 최승우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구박해서 보내버린다.[18] 결국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아자개는 고려로 귀순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견훤은 군대를 상주 지역으로 출병시켰지만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아자개는 철원으로 떠난다. 그 동안 피까지 토하면서 속을 썩여오던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결국 "아버님! 아버님! 정녕 우리가 부자간이 맞사옵니까!!"하고선 피를 토하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리고 고려 귀순 이후 수십년을 더 사는데 견훤이 폐위당할 때쯤 다시 한번 더 등장한다. 고려가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을 때 그대로 철원에 남았는데, 귀는 먹긴 했지만 그래도 정신은 멀쩡한 데다 견훤의 계모와는 애정이 두터운지라 그렇게 초야에 묻혀 사는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고려는 견훤과 접촉하고자 박술희를 아자개에게 보내는데, 이때 박술희는 대주도금과도 잠깐 재회하였고[19] 그 후 아자개에게 견훤의 폐위 소식을 알려준다.
100세에도[20] 정치적 감각은 대단하여 견훤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예전의 기상을 찾기도 했다. 견훤이 신검에게 쫒겨난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황제랍시고 거들먹거리더니 꼴 좋게 됐다며 웃다가. .. 곧바로 통곡을 한다. 성까지 바꾼 아들이지만, 그래도 황제라서 아무 걱정 안하고 있었는데 너무 불쌍하다며 눈물을 펑펑 쏟는다. 연을 끊고 사는듯 해도 여전히 견훤을 아들로 생각하고 있단 증거라, 사실 견훤이 궁궐을 짓는다는 소식에 '그놈이 제법 하긴 하는 모양이다' 라며 내심 뿌듯해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30회), 고려로 귀순했을때 그를 상보로 모시는 왕건과 함께 말을 타면서 '고려 왕과 백제 왕이 다 내 아들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이런 모습은 은근히 비춘 적이 있다. 아예 작중 인물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애증이 섞인 거라고 하기도 한다. 일생동안 견훤과 대립했던 계모마저도 견훤의 소식을 듣자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아자개 본인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 드라마엔 나오지도 않은 막내를 뺀 견훤 소생의 모든 손자를 잃은 셈이 되었으니...
견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아들을 걱정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렇찮아도 경보 대사의 설득에 서서히 마음이 약해져 가고 있던 견훤은 이 편지를 보고선 여러 복잡한 감정에 눈물을 흘렸고, 그 후 고비의 간언까지 더해져 몇 일간의 고민 끝에 자신이 세운 제국을 자신이 거두기로 결심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아, 황제가 되어 그동안 백제를 잘 다스려 왔음을 안다. 허나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너를 미워했던 것은 니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의 핏줄을 부정하고 갔기 때문이었다. 이 늙은이는 어느덧 백 살이 다 되어 간다. 그 동안 니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허나 견훤아, 너의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게 되었구나. 내가 너를 떠났는데, 너의 아들이 또한 너를 버렸다 한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이냐. 어차피 너는 자식도 잃었고, 나라도 잃었다. 고려 황제는 덕이 있는 사람이야. 너의 일신을 부탁하여 보마.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재미있는 것이 아자개의 재등장 이후 왕건, 경보 대사, 장화왕후와 충주부인(신명순성왕후) 등은 아자개 상부가 아직도 살아계셨느냐며 감회에 젖는 장면을 보인다.[21] 박술희는 직접 아자개를 만나는 내내 눈물을 지었다. 이 때 왕건은 아자개의 장수를 기원한다며 다시 수백년 된 산삼을 박술희를 통해 전달했지만, 아자개는 199화에서 견훤이 고려로 귀순한 직후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CNTV버전에선 이 장면이 편집.) 견훤의 환영 연회 직전에 복지겸과 내군 부장의 대화가 잠시 나오는데, 일부러 밤낮으로 머루주를 계속 마시고 죽었다고. 이에 복지겸은 노환으로 운명한 것이라며, 불문에 부치라고 명령한다. 물론 극중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인물로서의 아자개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명이다. 아마도 정황상 대우는 받고있지만 국가의 지도자에서 몰락해버린 늙은 아들을 다시 직접 재회하기에는 괴로웠던 모양이다.[22]
방영 당시 견훤까지 고려로 넘어온 시점에서 견훤이 철원에서 아자개를 만나는 장면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작진에 따르면 본래 견훤과 아자개가 대면하여 아자개가 이놈아. 아들이란 원래 다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구상했다고 하지만 지나친 역사왜곡을 피하기 위해 결국 집어넣지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 마지막의 극적인 장면을 기대한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제작진이 지나친 역사왜곡을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그렇게 방영했다면 끝물인 드라마 불씨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선은 지켰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드라마),근초고왕(드라마),기황후(드라마)라고 나온 것들을 보면
작중 아자개하면 떠오르는 아이템은 머루주. 묘사를 보면 상주쪽 특산물로 보이는데 아자개는 오직 이 술만 마신다. 아자개와 친해진 박술희는 늘 얻어 마셨고, 나중에는 본인이 따로 구해서 찾아오기도 했다. 박술희 후임으로 상주에 왔던 이흔암도 몇동이 얻어서 가족들과 나눠 마셨다. 머루가 포도과라 머루주도 일종의 포도주인데 다른 인물들은 다 투명한 곡주를 마시는데 아자개쪽만 포도주를 마시니 눈에 잘 들어온다.
드라마에서의 그 인기 때문에 실제 아자개가 장악하였던 상주 지역의 현재 영농조합법인의 이름도 아자개이다. 흠좀무. 냉동식품 떡갈비의 CF에도 출연했다.
태조 왕건 종영 1년 후 방영된 무인시대에서 견훤 역의 서인석 씨는 이의방, 견훤의 계모 역의 故 이미지 씨[23]는 이의방의 아내, 그리고 아자개 역의 김성겸 씨는 이의방을 탐탁치 않아하던 경진(경대승의 아버지) 역할로 다시 나온다. 물론 단순히 배우가 겹치는 것 뿐이지만 당시 시청자 게시판에서는 이 인물 관계를 가지고 전생을 운운하는 글들도 많이 보였다. 확실한 것은 견훤과 아자개 부자지간 악연은 계속되고 있단 거다. 그 전에 제5공화국에서는 서인석 씨는 노태우로, 김성겸 씨는 최규하로 분해 나오기까지 하였다. 어쩐지 대통령 라인(...) 악연은 과거진행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에서 김성겸 씨가 수 문제 양견으로 나왔는데 작가도 똑같아서인지 양견의 묘사가 태조 왕건 속 아자개의 이미지와 너무 오버랩된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이름이 연개소문이 아니라 주말 시트콤 '수나라 네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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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흥왕의 3남. 견훤의 후손이 썼다는 <이제가기>에서는 증조부라고 나온다.
- [2] 아들이었던 견훤의 성도 이씨였으나 어째서인지 견씨로 개명하였다. 아무래도 일국의 군주로써 정통성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포기했다는 설도 있다.
- [3] 당장 왕건도 당숙종의 후손이라고 신빙성 거의 제로에 가까운 자칭을 했다.
- [4] 전근대시절에는 가문의 뼈대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근본없는 출신이라면 사람들이 아예 따르질 않았다. 잘 살펴보면 의병장들도 최소 몰락한 양반가문이다.
- [설화] 견훤의 어머니와 정을 나누고 지렁이 등에다 바늘을 꽂아놓았다는 유명한 사나이가 그 집을 떠난 후에 여인의 아버지가 임신한 딸을 아자개에게 주어 보냈다는 설화가 있다.
- [6] 설에 따라서는 4명이라고도 한다.
- [7] 견훤이 고려에 귀부할 즈음에 박술희가 아자개를 찾아가 수백년 된 산삼을 선물하는데, 이 때 아자개는 크게 기뻐하며 '그럼 날더러 백 년을 더 살란 얘기야? 내 나이가 백 살이 가까워! 구십 하고도 아흔이야.'
그럼 180세??라고 한다. - [8] 2001년 9월 2일 시작된 동시간대 SBS 일요시트콤 <여고시절>에 학교 교장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중도하차했는데 김성겸은 다음 해 1월 27일 <태조 왕건>에 재등장하기도 했고 <여고시절>은 전문연기자가 아닌 MC 등이 출연한 탓에 전달력이 미흡했던 데다가 억지웃음을 유발했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선정적 소재와 폭력성, 수준 이하의 대사 등으로 비난을 샀고 당초 일요일 오후 9시 50분에 방송되었으나 SBS가 유리구두를 통해 주말 특별기획드라마를 부활시킴에 따라 2002년 3월 3일부터 10시 50분으로 변경됐지만 동시간대 MBC 타임머신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결국 2002년 가을개편으로 막을 내렸다
- [9] 대주처럼 한 가족으로서의 입장으로 보면 꽤나 괘씸하기 그지없는 발언들이지만, 그 시대의 정세와 후백제 말기에 벌어질 혈육 살해의 참극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된다. 이와 관련하여 용개의 대사 중 "형님이 우리를 잘해 주려고 해도 그 주변이 그렇지가 않을 것"(제77화 중)이라는 말은, 역사를 전지적 시점에서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아자개 가족들이 중립을 고수하는 이유로 꽤나 설득력을 준다.
- [10]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배 다른 동생이라도 여자인 대주도금이나 아버지인 아자개 정도야 견훤이 봐 줄 수 있어도 남동생인 용개, 보개나 새어머니인 남원부인은 견훤 밑에서는 위험할 일들이 너무 많으니 저 설정이 상당히 상식적이기도 하다. 아자개가 설정상 오래 살기는 했어도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인데, 아자개가 죽은 후라면 견훤이 맘 먹고 이복형제들이나 새어머니를 제거하는데 걸림돌도 없어지는데다, 설령 견훤이 그런 마음을 안 먹더라도, 견훤 주변에서 굴러온 돌들을 놔 둘 리도 없는 판이다. 이러니 대주보다도 오라비들이나 어머니가 더 강경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당연한 것.
- [11] 대학 8장 '수신제가' 의 구절로, 원문은 '所謂 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른바 집을 다스린다 함은 그 몸을 닦는 데 있다는 것은 사람이 그 친하고 사랑하는 곳으로 편벽되며 그 천하게 여겨 미워하는 곳으로 편벽되며 그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곳으로 편벽되며 그 슬프고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편벽되며 그 거만하고 게으른 곳으로 편벽된다.'
- [12] 물론 아자개가 점령한 곳 외의 빈 지역들에 병력을 주둔시켜 궁예군의 남하를 대비하겠다는 얘기였지만, 부자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짜고짜 상주의 빈 땅들을 접수한다고 하니, 아자개가 좋게 볼 여지가 없었다. 결국 분노한 아자개는 아들 능애에게 벼루를 던졌다(33회). 물론 아자개 역시 자신의 세력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후백제가 상주의 빈 땅들을 접수하는것을 묵인해주긴 했으나, 후백제에 대한 아자개의 불안감과 적대감은 더욱 강해지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최승우의 계책은 결과적으로 후백제가 상주를 얻는데 도움이 되질 않았다. 후백제의 우려와 달리 정작 궁예와 왕건 측은 조령의 험준함 때문에 상주를 가만히 놔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 [13] 尙父. 극 중에서는 '상부'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상보'로 읽어야 한다.
- [14] 동생인 능애는 벼루까지 맞고선 끌려서 쫓겨나는 수난을 당했고, 공직도 매정하게 쫓아냈다.
- [15] 맨날 '견훤이가 뭘 또 하려다가 실패했다지!!ㅋㅋㅋㅋㅋㅋㅋ' 라며 비웃는게 저 양반과 남원부인의 낙.... 아들 일인데 맨날 팝콘 튀기고 있는 걸 보면서 대주도금은 그야말로 환장해 미칠 노릇이지만... 가족간에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대주도금의 말은 항상 남원부인이나 아자개의 쿠사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부자사이가 참...
- [16] 아자개는 그냥 머루주나 한동이 던져주고 보냈고 이흔암은 그냥저냥 지내면 되겠지하고 만다.
- [17] 이때 의원들이 치료하는 씬에서 "아갸갸갸갸갸갸갸갸" 하는 소리로 비명을 질러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었었다고(...)
- [18] 아자개는 내심 견훤이 자기를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다리던 견훤은 오지 않고 그 신하들만 오는데다가 (남원부인의 말처럼) 고려에서 산삼을 보낸 탓에 마지못해 부랴부랴 찾아 보낸 것으로 보이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 [19] 그녀는 불교에 귀의하여 무상스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스님이 된 상태에서 그녀와 재회한 박술희의 씁쓸해하는 표정이 안습하다.
- [20] 견훤이 사망할 시점에 70세였으니 이로써 둘의 나이 차는 30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견훤이 장자임을 감안하면 당대로선 상당히 늦게 자식을 본 셈.
- [21] 사실 이건 아자개라는 캐릭터가 수십화 동안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그것도 꽤나 중요한 역으로 재출연하는 것을 보정(?)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사소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작중 오류라고 해도 될 만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를 할 때 박술희를 따라가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던 아자개가 끝내 철원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 [22] 아자개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 했다. 자신이 보낸 편지에도 이야기 했듯 그 오랜 세월 내내 아들과 제대로 화합한 적도 없었고, 내내 발목을 잡다시피 했다. 그런 아들이 다 늙고서 집안일 때문에 몰락해 적국이었던 고려로 귀부를 하러 오는데 마음이 편할리 없었을 것이다.
- [23] 2017년 11월 28일 신장 쇼크로 사망한지 2주만에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