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필요|날짜=2015-07-06}}
{{군인 정보
|이름=박술희(朴述熙/朴述希)
|생애= 875?~945
|별명=
|태어난 곳=
|죽은 곳= 황해북도 강화((黃海北道 江華)
|복무=태봉(泰封)/고려(高麗)
|복무 기간= 901~918/918~945
|최종 계급= 대장군
|부대=
|지휘=태봉/고려
|주요 참전 전투/전쟁=
|서훈 내역= 태사 삼중대광(太師 三重大匡)
|기타 이력=
}}
{{군인 정보
|이름=박술희(朴述熙/朴述希)
|생애= 875?~945
면천]] |
|태어난 곳=
|죽은 곳= 황해북도 강화((黃海北道 江華)
|복무=태봉(泰封)/고려(高麗)
|복무 기간= 901~918/918~945
|최종 계급= 대장군
|부대=
|지휘=태봉/고려
|주요 참전 전투/전쟁=
|서훈 내역= 태사 삼중대광(太師 三重大匡)
|기타 이력=
}}
박술희(朴述熙 또는 朴述希, ? ~945년 10월 24일(음력 9월 16일<ref>『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혜종(惠宗) 2년(945) 9월 16일(기유)</ref>))는 신라(新羅) 말기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사람이며, 고려(高麗) 초기의 무신(武神)이다. 태조(太祖)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다. 면천 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고려高麗) 전기의 무신(武神)이자, 개국공신으로 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시대의 문신 박제상(朴堤上)과 백결 선생(百結 先生)의 후손이다.
==생애==
초기 생애 ¶
신라박씨선원세보에 의하면 그는 눌지왕시대의 문신 박제상과 백결 선생의 후손이라 한다. 박제상의 아들 박효원의 후손인데, 박효원이 아들이 없어 삼촌 박지상의 아들 충혼의 아들 등원을 양자로 삼았고, 그로부터 세계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대승 박득의이고 할아버지는 박기원이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박술희는 성격이 호탕하고 전장에서 용전분투하는 맹장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대에서의 경력===
혜성(현재의 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혜성(현재의 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권력투쟁===
그러나, 이후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의 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정종와 광종은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의 난(王規)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호족 세력과 왕권, 그리고 왕규의 난 사이에 얽힌 복잡한 권력 투쟁은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었던 박술희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혜종의 세력 기반은 미약하였고, 이복동생인 정종와 광종은 외할아버지의 세력인 충주 호족 세력과 왕식렴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외척인 왕규의 난(王規)도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조가 아니면 유지되기 힘들었던 고려 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박술희에게는 불운이었다.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박술희는 정종와 그를 지지하는 서경 세력에 의해 강화 갑곶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은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