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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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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檍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에 다섯번 당선되었으며,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송산 박준규국회의장의 자형(姉兄)이 된다. 종교불교이다.

생애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를 1936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39년 큐슈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부 철도국(鐵道國)에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46년 대구대학교(청구대학교와 통합된 현 영남대학교) 법학과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14년 동안 법학교수로 활동하며 형법 과목을 담당하였고,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4.19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1960년대까지는 박정희3선 개헌에 반대하는 등 ‘바른말 잘하는’ 소신파로 불리었다. 그러나 결국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등과 반 김종필 4인 체제를 형성하였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연합하여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하였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그 후 1971년 6월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등이 일어나자, 야당인 신민당과 협조하여 친김종필계였던 오치성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장관의 해임안 가결을 주도하였다. 야당과 손잡고 박정희가 직접 임명한 장관 해임에 찬성하는 항명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0.2 항명 파동 참조.

항명파동으로 박정희의 분노를 사면서 자연스레 4인체제는 무너졌고, 백남억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쫓겨나지는 않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동부화재해상보험의 전신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1991년부터 5년간 (재)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1월 15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백종현(白種玹) 국민대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저서

저서로는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이 있다.

기타

허경영의 저서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