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gn=left&width=21.6px 1913년생 기업인 겸 정치인을 제외한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성곤(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쌍용그룹|{{{#796E65 쌍용그룹 회장}}}]] | |||||
쌍용그룹 창업 | ← | 초대 김성곤 | → | 2대 김석원 |
이름 | 김성곤(金成坤) |
출생 | 1913년 8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
사망 | 1975년 2월 25일 |
본관 | 김해 김씨 삼현파 22세손 |
가족 | 부친 김광도br 모친 김봉옥br 배우자 성곡 류원정br 슬하 4남 2녀 |
별일 없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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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발간 '성곡 일화집' 제목[1]
개요 ¶
출생 ~ 청년기 ¶
사업가로서 ¶
정치 ¶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황태성과 같이 주요 역할로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다 1958년 달성군에서 자유당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4.19 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종필과는 껄끄러운 사이로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함께 김종필을 견제하였다.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4][5] 이 과정에서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성곤은 학창시절 박정희의 큰형인 박상희와 절친이었기 떄문에, 어린 시절부터 박정희를 보아왔으며 사석에서는 박정희와 자녀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정희는 김성곤한테 정치자금을 모으라고 시켰다.
한편 야당 정치인 중 유진산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정계 은퇴 이후 말년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자유당 | - | 당선 |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 민주공화당 | - |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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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곤이 생전 자주 쓰던 말이다.
- [2]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 김성곤은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 [3] 보성전문학교 상과 시절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풀을 뽑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국민대에서는 김성곤을 학교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양대 건학 공로자로 기념, 추모하고 있다.
- [4]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 [5]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