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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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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교구장: [[1966년]] [[5월 31일]]
* 서울대교구장: [[1968년]] [[5월 29일]]
* 장례미사: [[2009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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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의 모습,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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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재학 시절의 김수환(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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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시절 전석재 신부와 김수환(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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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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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 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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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문장
[목차]

== 개요 ==





역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11대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서리) 12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13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역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초임 초대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 2대 장병화 요셉 주교


생가의 모습, 2016년 11월.


보통학교 재학 시절의 김수환(가운데)


학도병 시절 전석재 신부와 김수환(오른쪽)




입관 후의 모습



개요

가톨릭 사상 최초 한국인 추기경으로, 세례명스테파노(Stephen Kim Sou-Hwan). 선종 당시의 추기경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추기경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가톨릭 사제라는 종교인을 넘어, 20세기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이트.

생애

유년 및 학창시절

1922년 7월 2일 대구광역시 중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1]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 가롤로 신부[2]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참고로,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김순환'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에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김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동성상업학교[3]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에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 학생이던 김수환이 일본인들과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받을까봐 우려하여 쇼를 한 것이었다.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4]

이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 대학[5]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조치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6] 당시 김 추기경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해방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가 사망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게페르트 신부(1904~2002)의 일본 조치대학 시절 제자인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

학도병 징집과 광복, 사제서품

1944년,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1988년 선종)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그때부터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안동시 목성동성당[7]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김천시 황금동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대구대교구에서 사목했다.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 유학을 거쳐 서품 15년 만인 1966년 주교로 서품되어 그해 신설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대주교와 추기경 서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br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비레타를 받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미사에서br순명서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 만인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김수환 추기경 본인은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자기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8],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재임 사이에 잠시 임시관리자로 봉직한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9]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고[10]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마침내 1969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당시로서는 전 세계 최연소추기경이 되었다(47세).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 추기경은 "보잘것 없던 나를 주교에서 대주교로, 다시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가 선종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군사정권 시절 당시 광주대교구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지학순 주교, 인천교구나길모(미국인) 주교, 안동교구두봉(프랑스인) 주교, 전주교구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성탄절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11]

70~80년대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명동성당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들어선 군부독재와 5공화국 체제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독재를 비판하는 날선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아래 어록에도 나오는 '카인의 대답'이 대표적.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갈한 것도 유명한 일화. 이 밖에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광주대교구윤공희 대주교에게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1,000만원 수표를 보내고,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사태를 막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전두환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안타깝게도 실패했지만. 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시 광주 방문을 적극 추진하여 교황이 직접 금남로전라남도청 등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밝혀졌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에서도 당국 관련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당시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여러 민주화 사건에 많은 신경을 쓰고 서울대교구를 총괄하는 업무가 너무 중하다 보니[12] 이즈음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젊은 후배 사제에게 교구장을 넘기는 게 교구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던 터라 한국식 나이로 71세가 된 1992년 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서울대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답장이 더 걸작이었다. 답장 내용인즉슨... "나는 김 추기경보다 2살이나 많은데 지금도 교황으로 일하고 있습니다."결국 이 답신을 받은 후 계속 서울대교구장직을 역임하다가 1998년에야 사임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부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부정부패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13] 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김대중 정부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김 추기경의 활동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97년 12월에는 서울 성북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98년에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강연회'를 열면서 법정스님명동성당에 초청하는 등 종교 간 화해의 움직임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대북화해 움직임에 발맞춰 남북화해를 위한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천주교인이었던 것도 이런 좋은 관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것을 보면 김수환 추기경의 정치적 성향은 급진적 민주화와는 거리가 매우 멀고, 보수적 민주화 세력 중 하나인 김대중계에 가깝지 않나는 추측도 가능하다.

노무현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수도 이전, 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를 하며 당시 여당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덕분에 친일경력이 있니 없니 하는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래저래 참여정부와는 마냥 좋진 않은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된 내용 참조.

2005년 터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당시엔 사태를 언급하며 가슴 아파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황 교수 논문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엔 일반적인 사목활동을 했다.

사망과 그 이후


주여, 추기경 스테파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경,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사망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8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14]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당시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명동성당까지 줄지어 선 조문객 행렬의 총 길이는 300m였다고 한다.[15] 이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생전에 악연이 있었던 전두환도 조문을 위하여 명동성당을 방문하였으나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전직 대통령은 전부 직접 조문하러 왔는데 노무현 대통령만 직접 조문하지 않고 조전을 보냈다며 일부 언론에서 비판하기도 했으나, 조문이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측근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문제가 되었던 박연차 게이트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가급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조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한국 최초의 주교 서품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옆.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선종할 때 각막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김 추기경을 따라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들이 폭증했다. 특히 선종 이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사망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김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어록

제4공화국~제5공화국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남긴 명언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있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어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쟁취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다양한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다.

박정희 정부

박정희 당신은 압니까?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br - 1971년예수성탄대축일 메시지.[16]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입니다. br - 장준하의 영결 미사.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br - 박정희의 장례 미사.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br - 박정희의 장례 미사.

아버지 이 죄 많은 박정희를 용서해주십시오. br - 박정희의 장례 미사.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 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br - 박정희의 추모 미사.
다만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17] 훗날 김수환이 회고록에서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상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의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또한 박정희가 죽은 뒤 명동성당에서 고 박정희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18]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도 국모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으며,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박정희의 통치가 한결 누그러졌을 거라 평했다.

어쨌든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정희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전두환 정부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br - 쿠데타 직후인 1980년 초에 인사차 찾아온 전두환에게 한 말.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군에 의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진압이 도에 넘침으로써 군경을 포함하여 학생과 시민 등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데 대해 정부는 깊이 사과하고 그 같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를 정부는 엄단해야 합니다.br1980년 봄 시국에 관한 담화문.

주님께서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탕'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2명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릅니다."라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19]br -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추모 미사. 실제 육성.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br - 6월 민주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을 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협박하던 정부 관계자에게 한 말.[20]

김영삼 정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br - 1995년 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 당시 [21]

노무현 정부

선장인 대통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으나 100일 정도 지나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다.(...) 노 대통령은 말 바꾸기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2003년 6월 동아일보 인터뷰.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나? br -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대북유화정책기조를 비판하며[22]

개정 사학법이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국민들이 믿을 곳은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잘 해 달라.(...) (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 여러 명 있으니 걱정된다.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정권교체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만나

이후에도 "소수의 비리를 다수의 문제로 비화시켜선 안된다",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같은 사학법 개정에 강력 반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였다. 참고로 참여정부 당시 사학법 개정은 소위 4대 개혁 입법[23]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반대를 받았던 사안이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법의 경우 정치계 중심의 반대였고, 언론법의 경우 몇몇 거대 보수언론의 반대가 주를 이뤘지만, 사학법 개정은 이권이 걸린 문제라 전국의 거의 모든 사립학교재단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가톨릭뿐 아니라, 당시 사립학교법에 관해서는 종법사가 직접 밀어준 원불교[24]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종교의 주류 교단들이[25] 거세게 반대했었다. 이에 대해서 사학법 반대 측은 "전교조 등 좌파 세력들이 사학을 점거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찬성 측은 "이권 때문에 반대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을 찾는 사학 단체 관련자들은 위선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평가는 각자 알아서 할 몫이긴 하지만, 당시 여론의 힘을 받고 있던, 아니 여론을 떠나 사학법 개정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물론 김 추기경이 이권 때문에 반대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마냥 좋게만 평가하기 어렵긴 했다.

트리비아


  • 군종 신부에서 한군두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도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1984년까지 군종 신부로 입대할 수 있는 사관후보생 제도가 있었지만, 폐지되었다. 이는 "대한민국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에서, 신학생들이 사관후보생과 같은 특별한 제도로 입대할 수 있는 특혜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다.[26] 그래서, 천주교 군종교구군종 신부들은 반드시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신부들만 재입대로 지원할 수 있다.
  • 참 신앙인답게 다른 종교인도 천주교 신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27]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임을 고려할 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 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28]

  • 딱히 권위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한 예로 모 대학교 동아리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강당을 빌릴 필요가 생겼는데, 때문에 동아리 내의 가톨릭에 대해 무지한 한 학생이 성당에 강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가서 무작정 추기경실로 들어가서 강당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당한 게 좋다며 즉각 승낙했고, 후에 그 학생은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직책인지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이외에 성매매 업소 여인들을 돕고자 만들어진 시설에 찾아가 그녀들을 위로하고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윷놀이도 하며 많은 도움을 준 사실도 있다.[29]

  • 어떤 여대생이 한국의 유명인사에 관련된 인터뷰 과제의 상대로 김 추기경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다가 한 사제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화가 나서 한소리 해 주었는데, 당황한 그 사제는 김 추기경한테 돌아와서 얘기했다가 되려 혼만 나 버렸고, 김 추기경이 직접 그 여학생을 만나서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한 다음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여학생의 과제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문전박대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여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 박정희 정권 시절 반정부적인 성향을 보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불만을 품은 친정부 성향의 가톨릭 신자 몇 사람이, 바티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떤 사람을 만나, "김 추기경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서 내쫓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라망신 그리고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은 바티칸의 관리에게 김수환 추기경에 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였지만, 바티칸의 관리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당시 한국 주재 교황 대사였던 도세나 대주교를 통해 김 추기경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고 한다.[30]

  • 1995년 9월 24일에 방영된 열린음악회에서는 애창곡으로 <등대지기>를, 앙코르곡으로 <애모>를 불러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영상.

  •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먼치킨이었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영어, 일본어 역시 수준급이라고 하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도 상당한 수준.[31] 애시당초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울 정도로 능력은 출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유색인 출신 사제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꽤나 있었던 시대임을 김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 독일 유학 시절엔 공부하랴 강의 듣느랴 논문 쓰랴 바쁜 와중에도 독일로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되면서[32] 그들을 위해 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슬퍼하면서도 그를 잘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 추기경은 사회 바깥의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한다.

  •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과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게 관계자들의 평가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시성성 고위 관료와 교황청 관계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이 로마에 왔다는 소식에[33] '멀리서 오셨으니 김 추기경께서 편한 시간에 저희가 일정을 맞춰드려야 한다'며 편의를 제공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해 한국 천주교가 원하는 바를 교황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24일,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제대의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 박노해 시인이 지은 '거룩한 바보'라는 추모시가 있다.

어른이 그리운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
영하의 추위 속에
고요한 긴 줄
어둠 속에서
앞은 보이지 않고
걸어도 걸어도 뒤로 밀리는 걸음
이대로 다시 뛸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삶
멈춤
침묵
돌아봄
정화
울고 싶고 기대고 싶어도
의지할 언덕 하나 없어
삶의 무거움이 가슴에 응어리진 사람들
누구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아
거룩한 바보를 찾아나선 사람들
돈이 하늘인 세상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자리에
시위하듯 서있는 사람들
하늘이 거룩한 바보들을 택해
사람의 역사를 이끌어가듯
말없이 느린 행렬로
난 바보야 난 바보야
가슴 치며 가슴 치며
새벽 강물로 흘러가는 사람들


친일파 논란(?)과 실상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35]

김수환 추기경에게 친일몰이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강제적으로 징집된 일본군 장교였던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 되었던건 맞지만, 장교 교육과정에서 탈락되고 병사로 강제징집되면서 일본군에 복무했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초에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애초에 김수환 추기경은 강제징집이었던만큼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다르긴 했다. 비록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훈련과정에 들어있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낙오하는 형식으로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36] 다시 밑바닥 계급인 병사로 재징집되면서 일본 남단의 섬에서 미국의 군함이나 폭격기가 오는지 감시하는 보초임무만 맡았다. 당시의 일본군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고급인력으로 분류하고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없이 모두 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는데,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을 공들여 키워서 일본 본토에서 장교로 활동하게 만드려는 못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었던 조선인 청년들도 매우 많았으며, 사실상 총알받이 신세였던 카미카제 특공대로 징집된 사실도 흔했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구타가혹행위도 일상다반사였고, 만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미친 놈들처럼 반자이 어택을 했던 막장스러운 군대였다. 게다가, 사병도 아니고 장교를 사실상 강제징집으로 뽑는다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와는 백만광년도 넘게 떨어진 개판 5분전인 군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로부터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하거나 무슨 직위같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니다. 결국, 김수환 추기경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원하지도 않았는데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서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운한 경험을 하신 것이다.#

정치중립에 대한 이념재판


친일몰이는 사실 문민정부 이후 종교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고 한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진보진영의 현실정치 참여요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80년대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서울의 봄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까지 출범하자 민주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종교의 정치적 중립은 한국 천주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가적 어른으로서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고결한 입장은 천주교 일부에서 극렬하게 비판 받았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37]은 김수환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정쟁 참여를 독촉했다.

  • 함세웅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 자제를 이야기한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그 분은 시대착오적"이라고 공개 비판했다(2006).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탄핵시도에 대해 냉정히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 정의구현사제단은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염수정 추기경 등 역대 추기경 모두를 정치적으로 비판한 전력이 있으나, 정작 2018년 미투 사태에 소속 신부 고발에도 미봉책으로 일관하는 추태를 보였다.

  •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 선종에도 진보신당 등에서는 "친일 논란", "수구 몰이"가 이어지며 애도가 아니라 비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이에 진중권 교수는 SNS에 김수환 추기경처럼 살지도 못하는 이들이 배은망덕하다고 일침[38]했다.

사실상,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까지 동북아 유일의 추기경인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바티칸에 대적해 전세계 카톨릭의 인권 비난을 받기에 정통성이 모자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십 년간 김수환 추기경은 군사정권의 폭력사태에는 굳건히 맞섰다.

이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에게 진보-보수의 잣대로 매사에 선택과 발언을 강요한 것은 매우 후안무치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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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제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두 아들 동환과 수환을 위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 방학 중에 아들들이 찾아오면 이웃집에 간곡히 부탁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준비해 주던 터라, 두 형제가 너무 죄송스러워 식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 [2] 대한민국 해군에 군종신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원입대를 하였으며, 군종 신부로 대위 임관하여 한국전쟁베트남 전쟁에 군종사관 사제로 참전하였다. 이후엔 군종 신부들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해군 중령으로 예편했으며, 결핵환자를 돕는 일을 하다가 1983년 사망하였다. 참고로 동생이 추기경에 임명되자 누를 끼칠까봐 사적으로 만나는 걸 꺼렸다고 한다.
  • [3] 現 동성중학교&동성고등학교.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혜화동 성당과 바로 이웃해 있다.
  • [4]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에 방영되었다.
  • [5]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 예수회는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 [6] 2016년 2월에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신학교 시철 초기까진 진지하게 신부가 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은 개인상회를 열어 여태껏 형제들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꿈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러나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고 싶은 마음과 신학교 선생님들과 여러 친구들에게 여러 조언을 들으면서 꾹 참았다고 한다.
  • [7] 안동교구 주교좌성당.
  • [8] 성모병원과 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을 다른 학교에 매각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떠돌았다.
  • [9] 당시 수원교구장. 나중에 광주대교구 대주교가 됨.
  • [10] 서울대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던 수녀의 말에 따르면, 휴지통을 비울 때마다 코피를 틀어막은 휴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주교의 노고에 대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 [11] 이 발언을 마침 듣고있던 박정희가 매우 격노했으나, 날이 밝자 세계구급 화재가 발생하면서 묻혔다.
  • [12] 이 당시에는 천주교 의정부교구가 없었다. 고로 서울은 물론 경기도 북부지역의 본당까지도 그의 업무 관할 구역이었다. 의정부교구가 설정된 것은 김 추기경이 은퇴한 이후인 2004년.
  • [13]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93년 12월~94년 4월 총리 재임. 하지만 이후 차떼기로 명예에 왕창 금이 간 게 함정.
  • [14] 교황 또는 교황이 임명한 특사가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장례
  • [15] 김정남 저, 이 사람을 보라, 두레, 2012.12.05.
  • [16] 유신의 징조가 보이던 시절이다. 이걸 보고 격분한 박정희미사 송출을 즉각 차단한다.
  • [17] 김 추기경을 필두로 천주교 전체가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기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천주교가 상당한 눈엣가시로 보였겠지만 정작 박정희와 천주교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전쟁통이었던 탓에 결혼식장이 마땅치 않았다는 배경도 있지만 일단 본인과 육영수가 결혼한 곳도 대구 계산성당이고 딸 박근혜를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성심여중-성심여고-서강대)에 내리 보냈다는 것이 그 증거. 심지어 박근혜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세례를 받던 날에는 육영수를 직접 영세식이 열린 용산 원효로성당에 보내기도 했다.
  • [18] 출처 -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신문 엮음.
  • [19] 카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성경 최초의 살인자이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Am I my brother's keeper)?"라고 대답하였다.'라는 창세기 4장 9절을 인용한 발언.
  • [20] 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을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도 엮은 신의 한 수였다. 가톨릭추기경바티칸 시국의 시민이기도 하므로, 어지간한 막장국가가 아니고서야 고위사제인 추기경을 체포한다는 것은 세계적인 특히 서양권의 비난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꽤나 큰 모험이었다. 여담으로 글만 보면 비장한 분위기일 듯 싶지만, 김수환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시면 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담담한 어조였다고 한다.
  • [21] 바로 윗칸에서 언급한 6월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조차 하지 못한 명동성당의 공권력 투입이라는 무지막지한 일을, 김영삼이 성당 안에서 보호 중인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공권력을 투입하여 강제로 연행해가자 한 말이다. 실제로 문민정부는 초기의 금융실명제하나회 숙청 같은 개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것과는 반대로, 중반부터는 서서히 이런 실책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깎아먹었다. 그리고 IMF 크리로 자멸...
  • [22] 200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말에 격분한 당시 이해찬 총리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정부와 노 대통령이 마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지적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 [23] 과거사 청산, 언론 개혁, 국보법 폐지, 사학법 개정
  • [24] 원불교 재단 학교들의 경우 개혁 전부터 이미 개방형 이사제를 어느 정도 시행하고 있었다.
  • [25] 정의구현사제단 등 진보성향 단체들이 사학법을 지지하면서 종교 내 갈등을 빚기도 했다.
  • [26] 이 발언은,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천주교에서 매주 발매하는 주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를 나열하면서 처음 언급된 내용이다.
  • [27] 상기했듯,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도 병인박해순교했다.
  • [28]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종교라 여기고 지키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오버랩되는 일화다.
  • [29]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엔 성매매 업소 여인들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 좋아, 근처에만 와도 대놓고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 [30] 출처: 평화신문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32/70년대 민주화운동.
  • [31] 독일어는 신학교 우수 성적자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어느 정도 배웠고, 나중에 독일로 박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갔을 때 논문을 쓰기 위하여 마스터 했다고 한다. 영어의 경우엔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풀려났을 때 만난 외국인 사제를 통하여 기초를 배우고, 나중에 에서 전범재판 증언하러 들렀을 때 틈틈이 공부하셨단다.
  • [32] 주로 언어문제, 송금문제, 기타 잡다 등
  • [33]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시성 문제가 아니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 준비 때문에 교황청을 찾은 상황이었다.
  • [34] 김수환 추기경과는 인연이 있는 사이로, 김 추기경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뮌스터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 라칭어 추기경의 강의를 수강하며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인 적이 많았다고 한다.
  • [35] 김 추기경의 동성상업학교 5년 선배. 참고로 김 추기경만 군복을 입은 건, 신학생과 신부까지도 강제징집하는 일제의 만행을 천주교 소식통을 통해 알리려고, 귀국하기 전 배급받은 사관후보생 복장을 일부러 입고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 [36] 강제징집 당시 훈련소의 고위간부와 면담형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였는데, 일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여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위험한 발언을 한 김수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이었지만, 일본군 측에선 당장 죽이기보다는 최전방 보초역으로 배치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미군 폭격에 휘말려 알아서 죽을 것으로 생각해 차도살인처럼 크게 손을 안 댔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일본군 장교들에게 좀 맞았다고 한다.
  • [37] 미투에도 걸린 그 정사단 맞다.
  • [38] “엄혹한 시절 운동권을 끌어안아준 김 추기경에 대한 감사를 잊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다. 도대체 김수환 추기경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해서 추모를 해야 할 시기에 비판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느냐. 70년대 80년대 그 엄혹한 시절에 운동권 끌어안아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박정희한테 짓밟힐 때, 전두환한테 짓밟힐 때, 그나마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준 것이 김 추기경과 카톨릭 교회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