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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야구선수)

이동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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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동수(李東洙 / Dong-soo Lee)
생년월일 1973년 3월 24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북도 영천시
학력 대구칠성초-경상중-대구고
포지션 1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2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2~1997) br 롯데 자이언츠 (1997~1998) br 쌍방울 레이더스 (1998~1999) br SK 와이번스 (2000~2001) br KIA 타이거즈 (2001~2003) br 두산 베어스 (2003)
지도자 SK 와이번스 퓨쳐스 타격코치 (2016~2017)

목차

개요

3천만 원짜리 선수든 3억짜리 선수든 경기장에선 모두 똑같은 야구선수다.[1]

프로 생활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삼성 라이온즈곽채진과 함께 연고 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3년 뒤인 1995년의 활약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기대주였는지 알 수 있다. 타율 2할 8푼 8리, 22홈런(2위)[2], 81타점으로 중고 신인왕에 등극하게 되며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로 주목받았다.[3] 이 시즌 7월 25일 vs 한화전 9회말 2사에서 구대성에게 역전 끝내기 그랜드 슬램을 날린 적이 있는데, 이는 국내 최초로 3점차를 뒤집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이다. 이 이색 기록은 이동수와 김응국만이 가지고 있다. 저니맨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간혹 약한 타자로 기억되는 듯하지만 밀어치는 힘이 좋은 타자였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2군 시절 스승이었던 김충 2군 감독이 우용득 감독의 해임과 함께 1995년 시즌 후 팀을 떠난 데 이어 1996년 1루와 3루를 오가면서 김한수, 정경배와의 경쟁 대결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2년차 징크스를 겪었는지 몰라도 김한수가 방위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비 에러를 범하는 바람에 백인천 감독으로부터 수비 면에서 지적받으며 백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뒤늦게 발동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은 시즌이 마감하기 직전이라 빛을 못 봤고, 그 이후 1997년부터는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김한수의 합류로 3루에서 자리를 잃어 1루수로 보직을 변경하려고 했지만 1루수 자리마저도 이미 이승엽이라는 존재가 있어서[4] 이미 삼성에서 전력 구상에 이동수의 자리는 없었다. 1995년의 임팩트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잉여가 되어 버린 그는 1997년 6월 27일 투수 박석진과 함께 김종훈, 박동희를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 되면서 저니맨 생활이 시작되었다. 트레이드 과정에서 투수를 필요로 한 롯데와 외야수를 필요로 했던 삼성의 트레이드 결과가 딱 맞았다고 보며, 김종훈은 삼성에서 우승반지 3개를 따냈다. 물론 이동수 본인도 고향 팀을 떠나야 했던 아픈 기억이긴 하겠지만 당시 감독이 중고 신인왕이었던 이동수 대신 다른 선수를 택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는 일설도 있다. 실제로 삼성은 이동수가 1군에 있었던 1995년과 1996년에는 부진했고[5] 오히려 이동수가 없었던 199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항상 좋은 성적을 내며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기록을 세웠다.[6][7] 재미있는 사실은 삼성 시절 3루수 경쟁을 했던 김한수에게 나중에 부인의 후배를 소개해 주기까지도 했다는 것이다...?

롯데로 간 후에도 마해영 등에게 밀린 것도 있었으나 부상으로 별 활약을 못하다가 1998년 6월 5일 쌍방울 레이더스박계원과 함께 또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 김성근 감독 밑에서 부활을 하며 다시 재기를 했지만 쌍방울의 갑작스런 해체로 선수단 전원이 웨이버 공시되었고[8], SK 와이번스로 입단한 이후에는 다시 백업으로 전락하여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다 2001년 해태 타이거즈로 또 다시 트레이드된 뒤 1루수와 3루수를 오가며 중심 타선을 맡으며 재기하나 싶었으나 장성호의 성장과 더불어 다음 해부터 또 백업 신세가 되었고 2003년 시즌 도중 두산 베어스의 외야수 김원섭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9] 그리고 그 해 시즌 후 결국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당하며 현역에서 은퇴한다.

저니맨이긴 하지만 처음 입단한 삼성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뛰었다. 신인왕을 차지한 이후부터가 문제. 위에 서술된 대로 수비와 선구안에서 약점을 드러내며 6년차였던 1997년 시즌 도중에 트레이드됐고 그 이후에는 여러 팀을 다녔기 때문에 외야수였던 최익성이나 동봉철 못지 않게 저니맨으로 살아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오른손 거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이라는 역대급 슬러거가 등장하면서 묻혀 버린 감도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입단 당시의 이동수는 1992년부터 1994년도까지의 경우 1군 전력감이 아니었고 1995년에 신인왕을 차지했으므로 어폐가 좀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사실 1996년 시즌에서의 부진은 자신의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해임도 있지만 심리적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크기 때문에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노력했었더라면 완벽한 선수가 되었을거고 팀을 이끌었을 선수 중 한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인왕은 본인이 차지하고도 정작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영광은 다른 여러 선수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김재걸, 김종훈, 김한수, 박한이, 배영수, 양준혁, 이승엽, 임창용, 전병호, 진갑용 등등[10].

은퇴 후


은퇴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맡아오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간 대구방송(TBC)에서 프로야구 라디오 중계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설 스타일은 정말 차분하고 경기흐름을 잘 읽는 스타일. 그러나 배영섭이 호수비를 보일 때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중계했다(...). 2012년에는 해설 중 계속해서 디스하기도 했다. 그리고 차우찬이 만루홈런을 맞은 다음에는 방송사고로 오해할 정도로 침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실황녹음 으어

2013년에는 TBC를 떠나 대구 중/남구 케이블TV SO인 TCN에서 대구지역 유명 MC인 이도현 씨와 함께 삼성 홈 전경기를 중계방송했다. 다만, 현장 중계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보며 중계하는 방식이었다. TCN의 야구중계방송은 2013년 단 1년만 하고 폐지되면서 해설에서도 물러났고, 계명대학교 코치로 부임하였다[11].

2016년 SK 와이번스 2군 퓨쳐스팀의 타격코치로 다시 프로야구계에 복귀하였는데, 구단 측에서는 중장기적인 신인 육성을 위해 영입했다고 한다.[12] SK 팬들은 2016 시즌에 돌아온 짠물타선과 변비야구로 인해 김무관솩무원 정경배를 좀 밀어내 달라고 기원하는 중. 하지만 17시즌 종료 후 코칭스태프 개편과 동시에 계약이 해지되었다.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삼성 라이온즈 1군 경기 없음
1993
1994 6 14 .214 3 0 0 1 1 2 0 1 .429 .267
1995 125 420 .288 121 17 3 22br(2위) 81br(4위) 70 2 54 .500br(5위) .368
1996 94 241 .266 64 13 2 8 38 25 1 33 .436 .35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삼성 / 롯데 39 96 .156 15 1 0 1 7 2 0 7 .198 .21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롯데 / 쌍방울 82 186 .247 46 8 0 9 30 21 1 27 .435 .341
1999 쌍방울 레이더스 86 291 .320 93 19 2 19 68 56 2 60 .595 .43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와이번스 96 224 .259 58 11 1 14 40 34 1 44 .504 .37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SK / KIA 84 241 .274 66 11 1 15 49 39 0 50 .515 .395
2002 KIA 타이거즈 28 48 .229 11 1 0 0 8 3 0 8 .250 .33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3 KIA / 두산 34 52 .192 10 1 0 0 6 5 1 7 .212 .288
KBO 통산BR(10시즌) 674 1813 .269 487 82 9 89 328 257 8 291 .471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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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연봉에 연연하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말이다.
  • [2] 1위는 김상호로 마지막 22호 홈런을 칠 때까지만해도 이동수가 1위였지만 OB 베어스김상호에게 시즌 막판에 역전 당하며 2위가 되었다.
  • [3] 실제로 이동수가 중고신인왕에 등극하게 된건 은사인 김충 2군 감독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 [4] 사실 원래 포지션은 1루수였다. 그렇지만 포지션이 중복되는 바람에 여의치 않아 3루수로 전향했다고 봐야 할 듯. 이승엽이 좌익수 수비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 [5]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랫동안 팀을 이끌었던 삼성의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 [6] 하지만 그 1995년과 1996년은 오히려 관중몰이를 동원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 시기는 한국프로야구의 인기가 절정기에 달하는 시기였으니
  • [7] 오해하기는 쉽겠지만 사실 삼성을 망친 장본인은 따로 있었다.
  • [8] 1999년에는 친정 삼성과의 전주 홈경기에서 3홈런(8월 5일 더블헤더 1차전에서 1개, 2차전에서 2개)을 기록했다
  • [9] 김원섭 항목에도 설명이 있지만 그가 트레이드KIA 타이거즈에 온 선수라는 사실을 모르는 야구 팬들이 상당히 많다.
  • [10] 다만 이들 중, 양준혁의 경우 삼성에 오래 있긴 했지만 두번이나 이적한 적이 있고, 임창용은 4년간이나 뛰던 해태와 트레이드로 들어왔고, 진갑용은 두산에서 트레이드하여 영입하였다. 박한이는 2001년에 데뷔했고, 배영수는 2015년에 한화로 이적했기에 좀 애매하다.
  • [11] 검색해 보면 신일중학교 코치 또는 서울중구리틀야구단 감독도 이동수로 되어 있지만 동명이인이다.
  • [12] 공교롭게도, 복귀 날짜에 한때 몸담았던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1군 경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