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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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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융희제의 장례식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 [[3월 8일]]을 기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10월 8일]], 모후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건청궁 (경복궁)]]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친왕|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 겪으며 같은 해(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10월 12일]]을 기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왕족 정보
| 이름 = 순종 이척
| 원래 이름 = 純宗 李坧
| 그림 =
| 그림설명 = 원유관 강사포 복장을 한 이척
| 문장 =
문장설명 = [[대한제국의 국장
이화문(오얏꽃 문장)]]
| 작위 = 대한제국 황제
| 재위 =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섭정 = [[의친왕
의친왕 이강]](1907.07.27.~1907.08.07.)<br/>소네 통감(1909.07.12.~ 1910.05.30.)<br/>데라우치 통감(1910.05.30.~1910.08.20.)<br/> 야마가타 공작(1910.08.20.~1910.08.28.)<br/>데라우치 통감(1910.08.28.~1910.08.29.)
| 전임자 = 대한제국 고종
| 후임자 = (제정 폐지)
총리 = {{접이식 목록
제목=내각총리대신|
* 이완용
* 박제순
* 이완용
}}
작위2 = [[이왕가
창덕궁 이왕]]
| 재위2 =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 전임자2 = (신설)
| 후임자2 = 의민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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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호 = [[자 (이름)
자]](字): 군방(君邦) <br/> (號): 정헌(正軒)
| 연호 = 융희(隆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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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裕陵)
| 출생일 =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
1926|4|25|1874|3|25}}
| 사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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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 왕조 = 조선 왕조
| 가문 = 전주 이씨
| 아버지 = 대한제국 고종
어머니 = [[명성황후
명성황후 여흥 민씨]]
| 배우자 = 순명효황후 여흥 민씨(정후)<br/>순정효황후 해평 윤씨(계후)
자녀 = 無<br/>(양자 [[이진 (1921년)
이진]])
| 친인척 = 흥선대원군 이하응(친조부)<br/>의친왕 이강(이복 남동생)<br/>영친왕 이은(이복 남동생) <br/> 덕혜옹주(이복 누이동생) <br/> 완은군 이재선(이복 백부) <br/> 흥친왕 이희(동복 백부) <br/> 영선군 이준(사촌 형)
| 종교 = 유교(성리학)
}}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5일)은 대한제국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대한제국은 출범 당시 대한국 국제에 따라 조선 왕조의 법통을 이었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사실상 한국 황실의 혈통도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제27대 군주로 취급하기도 한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순종(純宗)
</ref><ref>{{서적 인용|url=|제목=고등학교 국사|저자1=|이름=|저자2=|날짜=2002|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쪽=343|확인날짜=}}</ref><ref>한국사 콘텐츠. 《순종(조선) {{웨이백|url=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76 |date=20190123010625 }}》</ref>

(坧), 본관전주(全州), 군방(君邦), 정헌<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3575273&sid1=001|제목=고종 황제가 순종에게 내려준 호, '正軒'|성=|이름=|날짜=2010년 7월 22일|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9-07-30}}</ref>(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이왕가의 수장인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순종은 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명성황후 여흥 민씨 소생이며,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으며 후사는 없었다.

생애

왕세자, 왕태자, 황태자 시절


익선관 황룡포 순종 어진

고종 광무제(좌)와 황태자 시절의 순종 이척(우)

대훈위 국화장경식을 단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

순종 융희제 이척의 사진 (1910년대로 추정)

순종 융희제의 장례식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에서 고종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 3월 8일을 기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10월 8일, 모후 명성황후건청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왕 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건청궁 (경복궁)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 겪으며 같은 해(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10월 12일을 기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그 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맛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해서 이가 다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홍륙의 유일한 세력 기반이 고종이었던 사실과, 김홍륙이 유배 당시에도 지속 성향 관련 형식으로 고종의 안위를 물었던 사실을 고려하여 보자면 실제로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정적들인 친일파가 김홍륙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위와 재위

1907년 1월 21일 부황 고종에게 대리청정 위임을 받았고 이어 같은 해 1907년고종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1907년 7월 19일을 기하여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대리청정이었던 황태자 이척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고종 양위 사건), 보위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 혹은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

순종의 황위계승자 책봉 배경 관련 논란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 남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복 동생 중 그 당시 나이가 가장 어렸던 영친왕을 황위계승자(황태자)로 봉하였다.<ref>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한 배경에는, 의친왕을 견제하려던 엄귀비의 입김도 작용했다{{출처|날짜=2008-9-16}}.</ref> 그러나 이복동생 중에는 의친왕도 있었고, 의친왕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시켜서 황태자로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는가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대한제국 역사의 미지수이다.

좌우간 1907년 8월 7일을 기하여 황위계승자 1순위급 후보였던이 대리청정 직위에서 물러나고 10일 후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계승자(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ref><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ref>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ref name="ohsy333">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ref>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ref name="ohsy334">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ref>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ref name="ohsy334"/>

재위 절정기와 대한제국 황제 통치권 피탈

즉위한 해인 1907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하였다.

이 무렵 일본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하여 청나라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한편 같은 해인 1909년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황제 순종의 실권은 제2대 대한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박탈되고 순종은 이듬해인 1910년까지 허수아비 군주의 신세가 되었다. 뒤이어서 제3대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급기야 한국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실권을 하며 1910년 경술한일합방늑약으로 인하여 사실상 일제가 한반도에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게 되었다.

퇴위와 생애 후반

1910년 일본 제국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으며,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아버지 고종의 뒤를 이어 그는 원치 않는 왕위를 이어받지만 이미 일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무렵이었다. 그는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도쿄를 방문해 일본 군주를 알현할 것을 압박받는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를 다해 마땅한 일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인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순종 실록』의 부록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7년 6월 8일: 남대문역에 직접 나가서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행하였다.
/ 6월 14일: 황궁에 나아가 천황과 황후를 봉황문에서 알현하고 현소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동궁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1926년 4월 25일을 기하여 심장마비로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아버지 고종황제홍릉 근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3.1 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1926년 5월 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했다.

가족 관계

{{참조|흥선대원군#가족 관계|틀:운현궁 가계도|설명=사친 조부 흥선대원군 가계의 관련내용은}}

순종에게는 아래에 언급된 형제/자매 외에도 여러 친형제와 서형제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 고종#가족 관계를 참고하기 바람.

* 조부(사친)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1898년)
* 조모(사친) :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1898년)
* 조부 : 문조(文祖, 효명세자, 1809년~1830년)
* 조모 :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8년~1890년)
** 아버지 : 고종(高宗, 1852년~1919년, 재위:1863년~1907년)
** 어머니 :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서제 : 의친왕(義親王, 1877년~1955년) - 귀인 장씨 소생
*** 서제 : 영친왕(英親王, 1897년~1970년) - 순헌황귀비 소생
*** 서제 :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1989년) - 귀인 양씨 소생
** 장인 : 민태호(閔台鎬)
*** 부인 :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1872년~1904년)
** 장인 : 윤택영(尹澤榮)
*** 부인 :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1966년)

대중문화의 순종

텔레비전 드라마

* 이구순 - 《독립문》(1984년, KBS1)
* 이진우, 이민우 - 《대원군》(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한영수 - 《덕혜
* 이승우, 최정 - 《찬란한 여명》(1996년, KBS1)
* 이태리, 곽정욱, 백승우 - 《명성황후》(2002년, KBS2)
* 조재현 - 《식객》(2008년, SBS)
* 안내상 - 《마이 프린세스》(2011년, MBC) - 이 드라마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허구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진

<gallery>

고종 황제와 순종

순종 황제 군복 사진

순종 황제 군복 사진

순종 황제 원유관에 강사포 사진
</gallery>

각주

{{각주}}

{{대한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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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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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황실 재단 수장
|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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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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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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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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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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