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없습니다
곽태휘의 역임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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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FC No. 5 | |
곽태휘 (郭泰輝 / Kwak Tae-Hwi) | |
생년월일 | 1981년 7월 8일 (age(1981-07-08)세) |
국적 | width=28 대한민국 |
출생지 | 경상북도 칠곡군 |
종교 | 무종교 |
신체 조건 | 188cm, 85kg |
포지션 | 센터백 |
등번호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5번 br FC 서울 - 55번 br 경남 FC - 번 |
프로입단 | 2005년 FC 서울 |
소속팀 | FC 서울 (2005~2007) br 전남 드래곤즈 (2007~2009) br 교토 상가 FC (2010) br 울산 현대 (2011~2012) br 알 샤바브 FC (2013) br 알 힐랄 FC (2014~2016.7) br FC 서울 (2016.7~2018) br 경남 FC (2019~ ) |
국가대표 | 58경기 5골 |
목차
클럽 경력 ¶
프로 데뷔 이전 ¶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 에서 1981년 7월 8일 태어난 곽태휘는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멀리뛰기 선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왜관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축구에 흥미를 느꼈고 아버지인 곽인호씨에게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곽태휘의 말을 들은 곽인호씨는 처음엔 곽태휘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남들에 비해 너무 늦은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부가 없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순심고등학교 1학년때는 등교를 거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곽씨는 아들의 강한 고집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곽씨는 초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 왜관 지역 대표로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농사일을 하고 있던 곽태휘의 할아버지는 곽씨가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했고 곽씨는 결국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기에 곽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는 듯한 아들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곽씨는 곽태휘의 전학을 허락했고 부자는 곽씨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1997년 7월 14일의 일이었다.
당시 대구공고는 중학교 축구부가 없어서 대구와 경북 일원에서 선수를 육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구공고로 찾아온 곽인호 부자에게 곽병유 감독은 '축구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졸업할때까지 경기에 못 나갈 수도 있다'며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두 부자는 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며 간절하게 부탁했고 곽태휘는 우여곡절 끝에 곽병유 감독에게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에서 곽태휘는 금세 곽병유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기본기는 부족했지만 180cm라는 큰 키와 빠른 스피드는 충분히 대성할 재목이었다. 여기에 곽태휘가 항렬로 자신의 손자뻘이라는 것까지 알게되면서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애착을 느꼈다.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합격점을 주었고 곽태휘는 마침내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전학 이후 곽병유 감독에게 겨울 내내 특훈을 받은 곽태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한데다가 평발이라는 불리한 조건까지 있었지만 곽태휘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특히 높이뛰기 선수 생활을 통해 익힌 점프력과 큰 키는 곽태휘에게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을 시작한지 1년만에 큰 시련이 곽태휘에게 닥쳐왔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둔 2월, 곽태휘는 전지훈련에서 충주상고와 연습경기에 출전했다. 빗속에서 그라운드를 누비던 곽태휘는 경기 도중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상대 선수가 찬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했다. 서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일어나던 도중이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에 젖은 공은 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그라운드에 쓰러진 곽태휘는 왼쪽 눈의 망막이 찢어져 버렸고 경기 다음 날에 전안방출혈 증세까지 나타났다. 곽태휘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12시간 동안 망막박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곽태휘의 왼쪽 눈은 실명을 피하지 못했다. 망막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회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곽태휘가 왼쪽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알아볼 수 없는 뿌연 윤곽의 물체들로만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한쪽 눈이 실명된 곽태휘의 소식을 접한 주변 인물들은 곽태휘에게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곽태휘는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축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위해 학교를 1년간 쉬고 복학한 곽태휘는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 훈련을 거듭했다. 부족해진 원근감과 균형감각은 한 템포 빨리 움직이고 한발 더 뛰는 성실함으로 메꿔나갔고 3학년때 찾아온 허리디스크 역시 꾸준한 노력으로 이겨냈다. 투혼을 불사른 끝에 곽태휘는 성장을 거듭했고 고등학교 졸업 직전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포항 스틸러스 등 여러 팀들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고민에 빠진 곽태휘는 스승 곽병유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곽태휘의 고민을 들은 곽병유 감독은 곽태휘에게 중앙대학교를 추천했다. 팀의 명성을 좇기보다는 대학에서 기본기를 쌓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중앙대에 입학한 곽태휘는 실력을 인정받아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런 곽태휘를 눈여겨본 팀은 K리그의 안양 LG (현 FC 서울)였다. 안양 LG는 곽태휘가 중앙대를 졸업한 이후 바로 프로로 데려가겠다면서 입단 제의를 해왔고 곽태휘는 안양의 제안을 수락했다. 꿈에도 그리던 K리그 입성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이던 2004년, 또다시 곽태휘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3년간 상비군으로 활약했던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아테네 올림픽 본선 출전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 어깨 근육 부상까지 겹치면서 곽태휘는 선수 생할을 접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곽태휘는 부상을 털고 복귀하는데 성공했고 2005년에 FC 서울에 정식으로 입단한다. 실명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지 8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프로 데뷔에 성공한 것이다.
FC 서울 (2005~2007) ¶
2005년 FC 서울에 입단한 곽태휘는 리그컵에 주로 출전하며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다. 비록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곽태휘는 3년간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해 58경기를 치르며 조금씩 프로 무대에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2006년에는 여자친구 강수연씨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식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007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곽태휘는 본의 아니게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서울은 아시안컵에서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김진규를 영입하길 원하고 있었고 김진규의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는 김진규를 보내는 대신 곽태휘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는 곽태휘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던 서울에서 밀려나듯이 나가는 것도, 수도권을 떠나 지방인 전남 으로 가는 것도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전남 드래곤즈 (2007~2009) ¶
하지만 전남 드래곤즈행은 오히려 곽태휘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로 작용했다. 당시 전남을 지휘하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든 곽태휘는 전남의 주전자리를 단숨에 꿰차게 되었고 전남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포항과의 2007 FA컵 결승전에서 곽태휘는 자신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만한 활약을 펼친다. 2-2로 경기가 팽팽하게 전개되던 결승 1차전 후반 42분, 곽태휘는 페널티 지역 정면에서 오른발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이 골로 전남은 1차전에서 극적인 3-2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2차전에서도 전남은 곽태휘의 활약속에 포항에 승리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전남 감독을 지내며 그를 눈여겨본 허정무 감독의 부름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시작해 조광래 체제를 거쳐 최강희 체제까지 꾸준히 부름을 받았다. 다만 유리몸이 항상 문제였는데 2008년 한해에만 2번(3월,11월) 수술대에 오르는 등 전남에서는 2시즌 반을 뛰는 동안 한 시즌을 온전히 치른 적이 없었다. 2011년 울산 입단 이전까지는 K리그에서의 족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서울에서는 유망주 및 백업 수준이었고 전남에서도 2007년 FA컵 결승에서 골을 기록해 우승에 기여한것이 다였다. 전남 드래곤즈가 하위권을 탈피해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2009년에는 한 시즌내내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울산 현대 (2011~2012) ¶
2011년에는 울산 현대로 이적한 후 김호곤 감독의 베스트 일레븐만 주구장창 돌리는 전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상 없이 한시즌을 소화하면서 리그컵 우승과 K리그 정규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AFC 챔피언스 리그/2012년에서도 울산의 중심으로 맹활약하였고, 특히 결승전에서는 헤딩 선제골까지 기록하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위 사진이 바로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
그렇게 울산에게 우승컵을 안겨준 후...
알 힐랄 FC (2013~2016) ¶
2014년 10월 1일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알 힐랄이 알 아인을 상대로 1승 1패 골 합계 4:2를 기록하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1990년대만 해도 아시아의 깡패로 군림하던 알 힐랄이었으나, AFC 챔피언스 리그 체제로 개편한 이후로는 처음 결승이었고, 곽태휘 개인으로선 2012년 울산 이후 2년만에 다시 한번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다만 팀은 결승에서 서울을 꺾고 올라온 웨스턴 시드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맹활약으로 인해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베스트 11 중 한국인은 곽태휘 한명 뿐이었다.
한편 소속팀인 알 힐랄 FC와의 계약이 2016년 여름에 만료되고 친정팀 FC 서울로 복귀했다.
FC 서울 (2016~18) ¶
계약기간은 2018년 말까지로 8일 실시하는 메디컬 결과에 따라 정식 입단이 확정되게 된다.기사 다만 한가지 변수가 있으니 바로 나이. 계약이 만료되는 2018년에 곽태휘는 만 37세다. 관리시스템과 스포츠 의학이 발달한 현대 축구에선 자기관리만 잘하면 못뛸 나이는 아니지만 필드 플레이어에게 상당히 부담 되는 연령인건 분명하다.
곽태휘의 이적 전까지만 해도 FC서울의 부주장은 유현이였으나, 오스마르의 결장시 주장완장을 차고나온다. 그 예가 37라운드 전남전
곽태휘의 이적 전까지만 해도 FC서울의 부주장은 유현이였으나, 오스마르의 결장시 주장완장을 차고나온다. 그 예가 37라운드 전남전
일단 선수 본인은 2018년 월드컵 출전이란 동기가 뚜렷한 만큼 이를 위해 자기관리을 해나갈 것 이다. 서울이야 그정도 비용이 아쉬울 구단도 아니고 라커룸 리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인데다 당장의 수비불안을 해결하는게 급하니 추진한 영입이고. 황선홍 부임 초기에는 최용수 시절의 기조를 이어받아 쓰리백을 쓴 서울이지만 장기적으론 곽태휘를 중심으로한 4백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에만 참가하고 있으며, 명단에는 들지 못 하고 있다.
그리고 26R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선발 출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모습이었으나 후반 45분 심판의 어이없는 오심으로 시즌 첫경기에서 퇴장당했다. 패널티 박스 안에서 상태 크로스를 저지하다 허벅지에 공을 맞았는데 손에 맞았다며 패널티 킥과 경고를 줘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영상을 보면 팔에 닿지 않은게 아주 잘보인다. 다행히 상벌위에서 이 점을 참작해 퇴장으로 인한 출전정지와 제재금을 감면하여 다음 경기에 나설수 있게 되었다.
8월 24일 ACL 8강 1차전 산둥 루넝과의 홈 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산둥의 공격수 그라치아노 펠레를 꽁꽁 묶는 활약을 펼쳤다. 시즌 후반기에는 오스마르, 곽태휘 둘 다 발이 느려 발 빠른 크랙에게 손쉽게 돌파당하는 취약점이 두드러지면서 오스마르가 중원으로 올라가고 김남춘과 중앙 수비진을 구성했다. K리그 클래식 스플릿 마지막 라운드 징계로 심판 매수로 인해 승점이 삭감되어 승점이 동률이 된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전북을 꺾고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도 곽태휘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7시즌을 앞두고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ACL 경기를 치루면서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더욱 느려진 발과 공격수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공중볼 경합의 강점도 사라졌다. 수비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이지만, 집중력에 심각한 문제까지 드러내고 있다. 1차전인 상하이 상강과의 경기에서는 실점에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발이 빠른 우레이에게 드리블과 침투를 허용했고, 2차전인 우라와 레즈와의 경기에서 최악의 폼을 보이면서 5골 실점에 모두 관여했고 경기 도중 부상까지 당해 한동안 출전을 못하게 되었다. 4월 18일 FC 안양전에 부상 복귀 했으나 경기력은 계속 별로였고 여름쯤에 들어서는 폼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봐야 미달이기 때문에 계속 뒷공간을 털려 팬들의 암을 유발시키는 중이다. 그리고 8월 5일, 25라운드 대구 FC 원정에서 대구의 모든 골장면에 관여하면서 2-2 무승부를 만들며 서울의 리그 상위권 도약에 제동을 걸어버렸다.
이쯤되면 안나와야 하는게 맞는데 그럼에도 계속 기회를 받는 이유는 빌드업 때문. 서울의 빌드업 리더를 살펴보면 14시즌까진 김진규가 후방에서 빌드업을 도맡아 수행했다. 김진규가 노쇠화한 15시즌에는 오스마르와 박용우가 돌아가며 쓰리백의 중앙에 서서 빌드업을 수행했다. 김진규가 떠나고 박용우가 부진한 16시즌에는 오스마르가 빌드업 리더를 맡다가 곽태휘가 영입되자 나눠 맡았다.
문제는 17시즌. 오스마르와 곽태휘를 함께 쓰면 순발력이 너무 떨어져서 뒷공간을 감당할 수가 없다. 또한 오스마르를 내리면 그만큼 중원이 헐거워진다. 하지만 팀내 젊은 센터백인 황현수, 김원균은 발이 빠르고 경합능력은 좋지만 빌드업 능력이 없는 전형적인 파이터형이다. 6월 21일 대구전이나 8월 12일 수원전에서 증명되었듯이 이 둘을 세워놓으면 수비진에서 패스가 안올라오고 뒤로 물러나며 의미없는 패스만 반복해 양 풀백의 전진도 어려워지고 공격속도가 둔화되어 롱볼 의존도가 올라간다. 백업인 김원식은 역시 빌드업 능력이 전무하며 앞의 둘에 비하면 발까지 느려 황선홍 체제의 빠른 템포 축구에 적응못하고 있다. 곽태휘가 빌드업이 뛰어난 선수는 절대 아니지만 짬밥이 있고 킥력 자체는 좋다보니 오스마르를 센터백으로 내리지 않는 이상 곽태휘보다 발밑 좋은 수비수가 없다.[1]
문제는 작년보다 더욱 떨어진 체력과 집중력 때문에 발빠른 크랙 보유한 팀들 상대로 쓰기엔 부담스럽고 일주일 정도 휴식을 주지 않으면 폼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점. 결국 이 문제는 9월 13일 이웅희가 전역하면서 해결되었다. 이웅희가 복귀 하자마자 황현수와 투 파이터 조합으로 중앙 수비진을 구성하고 빌드업은 오스마르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려가서 맡으면서 곽태휘는 밀려났다. 이후론 후보 명단에 간간히 이름을 올렸다.
팬들 사이에선 심우연이 나갔으니 수비 시키지 말고 공격수로 돌려서 심우연처럼 타워 역할이나 맡기자는 의견이 많다.
18시즌 초반에는 이웅희에게 밀렸으나 이웅희가 강원전 자책골 이후 황선홍의 눈 밖에 나고 전 시즌 주장답게 다시 주전으로 발 돋움한다.
하지만 나올때마다 느린 발로 수비 불안에 기여하고 있으며 장점으로 꼽혔던 빌드업과 헤더 역시 평범한 수준이다.
하지만 나올때마다 느린 발로 수비 불안에 기여하고 있으며 장점으로 꼽혔던 빌드업과 헤더 역시 평범한 수준이다.
5월 12일 강원FC 와의 경기에서 헤딩으로 시즌 첫 골을 기록하였다. 김원균과 함께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계속해서 주전 센터백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부상 루머가 있는 이웅희를 제외한다고 쳐도 지난해 K리그 베스트11 후보였던 황현수, K리그1 팀 주전에 있었던 김동우(축구선수), 김원식 등 30대 초반이나 20대인 경쟁자를 모두 넘고 37세의 나이로 주전을 지키는 것은 어찌됐건 대단한 일. 하지만 이후 김동우와 김원균에게 밀려 8월 중순 현재 대기명단에도 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18시즌 종료후 자유계약으로 풀렸다. FC 서울이 재계약을 제안할 가능성은 없고, 나이를 고려하면 은퇴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2년 계약으로 경남 FC로 이적했다.기사
"다행히 강등 위기에서 벗어났고 선수들이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 팀을 떠나게 돼 마음이 놓인다. 서울이 잘 되길 바란다." _곽태휘, 경남 이적 후 첫 인터뷰
경남 FC (2019~) ¶
곽태휘는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선수다. 김종부 경남 감독
창단 첫 ACL 진출권을 얻은 경남 입장에선 나이가 38세라도 ACL 우승(울산)과 준우승(알 힐랄) 경험이 모두 있는 곽태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수비진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선수 입장에서도 11위를 하고도 보강할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스쿼드 정리조차 똑바로 안 해 센터백 머릿수만 넘쳐나는 팀보다는, ACL 출전권에 박지수의 이적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도 보다 수월하게 뛰어들 수 있는 팀에서 선수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게 백번 낫다.
대표 팀 경력 ¶
대표팀의 핵심 수비수(아시안컵에서는 잠깐 공격수)로 장기간 활약했음에도 월드컵에서 부상때문에 단 1분도 뛰지 못한 불운한 선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01~2003) ¶
김호곤호 시절 (2002~2004) ¶
2001년에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어 국가대표 커리어를 시작했다. 2003년 대구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고 올림픽 대표로 여러 경기들을 뛰었지만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해 올림픽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탓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경험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왼쪽 눈(사실상 실명...)과 평발, 허리디스크,어깨 근육 등 온몸이 종합병원이다보니 군대는 면제 판정을 받았다.
허정무호 시절 (2007~2010) ¶
2008년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본인이 지도했던 소속팀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월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하였다.
A매치 첫 골을 기록한 투르크메니스탄전 | 동아시안컵 중국전 역전골 장면 |
월드컵 직전 불의의 부상으로 눈물을 삼키다 |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 ¶
2014년 브라질 월드컵때는 대표로 선발은 되었으나 홍명보 감독의 취임 이후 올림픽 대표 시절부터 적극 중용되던 홍정호-김영권 라인에 밀려[5] 단 1경기도 뛰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동국에 가려져 그렇지 이쪽도 정말 불운한 선수.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인터뷰를 가졌으며, 당시 선수들에게 부족한 건 리더쉽이 아니라, 투혼이라고 밝혔다. 또한 홍명보의 아이들 설에 대해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닌 선수들이 대표팀의 분위기에 섞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소신있게 의견을 밝혔다.
2015년 AFC 호주 아시안컵 ¶
슈틸리케호 체제에서도 꾸준히 발탁되고 있으며, 2015 AFC 아시안컵 명단에도 들어갔다. 당초에는 김주영, 김영권, 장현수에 밀려 백업 수비수로 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하지만 김주영이 부상당하고, 장현수의 불안한 수비 및 카드 트러블 관리를 해야해서 조 1위를 경쟁해야 하는 호주와의 경기에 출장이 불가능하자 김영권과 함께 선발로 출전했다.
그리고 풍부한 경험으로 김영권을 커맨드하며 안정된 수비를 보여주며 무실점에 크게 기여했다. 이 경기에서도 김영권이 실수가 아예 안 나온 것은 아니나 김영권보다 경험이 많은 곽태휘가 옆에서 수비라인을 지휘하고, 제공권과 대인 마크까지 담당하면서 불안하던 김영권의 수비를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려놓는데 기여하면서 탄탄한 수비를 해냈다. 8강 우즈베키스탄전, 4강 이라크전에서도 수비진을 이끌며 전경기 무실점 승리에 일조했다.
그리고 결승전 0:1로 뒤진 상황에서 교체 가능한 공격수 자원조차 없는[6]상황이 닥치자 최전방 공격수를 자청했고, 슈틸리케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고 도박수를 던진다. 그리고 호주의 장신 수비진과 경합을 벌이다가 마침내 손흥민의 인저리 타임 극적인 동점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회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아시안컵 베스트 11에도 선정되며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국가대표 경력에 영광스러운 이력을 한줄 추가하게 되었다.
34세의 나이에 대표팀의 중심이 되다 |
슈틸리케호/2016년 ¶
아시안컵 이후로도 꾸준히 슈틸리케호에 선발되어 주전으로 출전 중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러시아 월드컵을 대비해 젊은 선수들 위주로 꾸리면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줄 20대 후반, 30대 고참선수 일부를 섞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곽태휘와 정성룡. 현 대표팀 수비 라인에서 곽태휘의 존재감은 상당한데 2016년 6월 유럽 원정 2연전에서 그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수비진의 무게감이 매우 달랐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곽태휘는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체력과 기량이 남아있는 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출전도 노리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월드컵 진출이 가능할까?
그러나 2016년 들어서 급격한 노쇠화를 드러내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중동에서 다시 K리그로 복귀한 2016년 중순 이후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는데, 예전부터 고질적인 약점인 느린 발과 민첩성이 노쇠화와 겹치는 바람에 대표팀과 소속팀인 서울에서도 구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슈틸리케호/2017년 ¶
2017년 6월 카타르전에선 베테랑으로써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패배에 한몫 단단히 했다. FC서울 팬 팟캐스트 '전격 서울사람들'에서는 이에 대해 "소속팀에서도 벤치인 선수를 대체 왜 국대에 데려가서 욕을 먹이냐"며 기용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후임 신태용 감독은 이란-우즈벡과의 2연전에서 발빠른 파이터형 수비수인 김주영과 김민재를 선발하고 곽태휘를 제외시켰다. 김영권과 장현수가 이 2연전에서 각각 주장완장과 장현수 쉬프트를 부여받아 앞으로도 중용될 것으로 보이며 신예 김민재가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대표팀 경력은 사실상 끝났다.하지만 김민재가 없는 10월 평가전 수비력은 상상초월이었던 것이 문제...
기록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 2008, 준우승 : 2010
- AFC 아시안컵 준우승 : 2015, 3위 : 2011
통산 성적 ¶
국가대표 ¶
연령 | 출전 | 골 |
U - 17 | 0 | 0 |
U - 20 | 0 | 0 |
U - 23 | 0 | 0 |
A 대표 | 58 | 5 |
종합기록 | 58 | 5 |
주요 개인 수상 ¶
- K리그 베스트 11 : 2011, 2012
- AFC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11 : 2014
- AFC 아시안컵 베스트 11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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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스타일 ¶
피지컬이 막강하다. 2010년 3월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디디에 드록바에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정대세도 한국 팀의 인상 깊은 선수로 190 장신에 힘 좋은 수비수를 언급했을 정도이다. 여기다 점프력도 엄청나다.[7]
이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대인 마크와 제공권 장악에 강점을 보이는 파이터형 수비수. 울산 철퇴 축구의 한 축으로 세트피스 가담시 무서운 존재감을 발휘하며, 3선에서 느닷없이 달려와서 내리 꽂는 헤딩슛이 일품. 2011년 울산에서는 9골을 기록해 같은 팀의 공격수인 김신욱보다도 많은 골을 넣어 팀내 최다득점자였을 정도.[8] 킥력도 나쁘진 않아서 중거리 슛이나 프리킥도 제법 많이 차는 편이다. 2008년 2월 동아시아컵 중국전에서 역전골을 넣었는데 뜬금없이 전방으로 오버래핑하여 슈팅을 때려 골을 넣는 장면은 공격수 못지 않은 공격가담을 보이기도 했다. 롱패스를 이용한 빌드업도 본디 커맨더형 수비수가 아니라는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팬들은 곽테리 또는 곽테라치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만 스피드가 느린 탓에[9] 공격수와의 1:1 상황이나 스피드 경합 상황이 오면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인다. 넘어지고, 손으로 잡아채다 경고나 프리킥 및 pk 헌납 등... 아시아 레벨에서 울산처럼 철퇴를 휘두르며 웅크리고 있는 팀에선 괜찮지만 국가대표에선 아무래도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수비진을 내리고 버티는 전술이 아니라면 발이 빠른 파트너를 붙여주어 상호보완 하는게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눈이 안보이기 때문에 파트너 센터백과 골키퍼가 무조건 커버링 잘 해줘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경험이 쌓임에 따라 수비라인 통솔능력과 전술적인 판단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덕분에 파이터형 수비수에서 훌륭한 커맨더로 변신했다. 슈틸리케호 시절 우즈베키스탄전에서의 플레이는 그 중 백미. 역대선수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지시를 통한 수비라인 변화 및 조율을 보여주었다. 감독들이 노쇠화 하며 신체능력이 떨어진 곽태휘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러한 커멘딩 능력 때문이었다. 다만 전업 커맨더라고 보기에는 빌드업 능력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다른 국가대표 센터백 중 이정수와의 호흡이 최악인 것으로 유명했다. 본래 허정무호 시절에는 둘의 조합은 그리 나쁘지 않았으나 이정수의 중동 진출 이후 급격한 노쇠화의 영향인지 최강희호 시기 열린 2013년 2월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전반전 내내 단 2번 패스하는 최악의 호흡을 선보이며 팀의 4-0 완패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 경기 이후 최강희 감독은 이정수를 대표팀에서 배제하고 곽태휘 중심으로 수비진을 꾸렸다.
이야깃거리 ¶
위에서 설명한대로 시각장애, 심지어 축구선수에게 최악인 평발에다 허리디스크까지 있던 상황에서 국가대표급 축구선수까지 대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후배 축구선수들에게도 귀감이 될 인물이다. 아니 귀감이 되어야만 하는 인물중 하나이다.
안정환을 잇는 간만의 꽃미남 축구 스타지만,화났을 때는 엄태웅, 찡그릴 때는 사카이 마사토 닮았다 이미 2006년 11월에 결혼한 품절남인데다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 인터뷰를 들으면 상당히 깬다. 결혼도 구미시에서 했다.
우수한 피지컬, 괜찮은 킥, 웬만한 공격수를 능가하는 결정력 덕분에 공격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인터뷰에 따르면 고등학교 시절에 축구를 시작했던 탓에 공격수고 수비수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본인도 다시 태어나서 축구를 하게 된다면 공격수를 하고 싶다고.
부상이 상당히 잦은 편이다. 축구선수를 시작한 이후 그의 부상 커리어 중 대표적인 것들만 종합해보자면...
- 1999년(고등학교 3학년) → 왼쪽 눈 실명
- 2000년 (1년 휴학 후 복학한 고등학교 3학년) → 허리디스크. 이후 허리디스크는 곽태휘의 고질병이 되었다.
- 2004년 (대학교 4학년) → 어깨부상. 이 부상으로 곽태휘는 선수생활 은퇴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 2008년 → 왼쪽 발목 인대 파열(3월), 오른 무릎 전방 십자인대 손상(11월)
- 2010년 → 왼무릎 내측인대 부분파열. 이 부상으로 곽태휘는 남아공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 2014년 → 왼쪽 발등 부상. 이것 때문에 곽태휘는 거의 4개월을 부상 치료로 날려먹었고 이로 인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월드컵에서도 홍정호와 김영권에 밀려 1분도 출전하지 못했다. 사실상 시즌아웃을 당한뒤 겨우 복귀한 선수들을 월드컵에 데려간 것을 고려하면 월드컵 당시 홍명보호의 선수 관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참조
의외의 사실이지만 한국 국적 운동선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68만 명으로, 76만명의 손흥민 다음으로 2위이다. 사우디 최고의 인기 팀인 알 힐랄에서 오랫 동안 뛰면서 좋은 활약을 보여줘 사우디 팬들이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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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빌드업 잘한다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한국 기준이다. 세계무대 기준으로도 수준급의 빌드업 능력을 갖춘 수비수는 홍명보 이후론 없다.
- [2] 당시 골장면에서 곽태휘는 전방으로 침투하여 골을 기록했는데 이때 득점 직전 패스를 받는 위치가 사실 오프사이드였는데 주심은 그냥 넘어갔다. 약간 행운이 섞인 골이라고 할 수 있다.
- [3] 사실 자책골 관련 문제는 시력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 [4] 강민수가 대신 들어갔다.
- [5] 다만 곽태휘도 월드컵 바로 직전의 가나전에서 가나 공격수들에게 수차례뚫리며 대패에 일조했기 때문에 할말은 없다. 그러나 이 당시 부상으로 인해 폼이 떨어진것을 감안해야 한다.
- [6] 유일한 최전방 공격수 이정협은 완전히 방전되어 뛸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나갔고, 조영철은 중앙 공격수로 쓰기엔 함량 미달임이 드러났다.
- [7]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 높이뛰기 선수였다고 한다. 다만 얼굴이 꽃미남 스타일이라서 겉보기에는 다소 약해 보인다.
- [8] 세트피스 시 키커한테 사람을 보지 말고 공간을 보고 차라고 하고 공이 오는 것에 집중한다고 하는데 강력한 피지컬 덕택에 공이 본인 쪽으로 오면 그 공을 제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헤딩이 정말 날카롭기도 하고.
- [9] 100m는 그렇게 느리지 않은 편이다. 손흥민도 2013년 이제까지 붙어본 선수 중 누가 가장 어려웠냐는 인터뷰에서 유럽에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아드리아누고, 곽태휘는 수비, 헤딩, 빠르기를 겸비한 아시아 최고의 중앙 수비수라고 언급했다. 다만 순간 가속도나 민첩성에서 느리다. 곽태휘를 칭찬했던 손흥민의 경우는 넓은 공간에서 달리는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