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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목차

1. 소개
2. 생애
3. 활동
3.1. 정치
3.2. 학문
4. 교육
5. 재력
6. 평가
7. 여담
8. 참조
9. 분류

1. 소개


조선시대의 관료, 유학자.


2. 생애

1527년, 27세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다. 34세에 문과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1568년, 선조 1년에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서 성인 군주가 될 것을 촉구하였다.

3. 활동

3.1. 정치

이황은 1545년(명종 즉위시기)에 을사사화를 겪었으며, 이 때 형 이해(1495~1550)는 양주로 유배가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황은 김안로, 이기 등 당대 권세가에게 위협을 받았으나, 신중한 처신으로 이 같은 사화(士禍)를 겪지 않았다. 우찬성, 대제학 등의 고위직에 올랐다.

40세 이후로는 어렵게 부탁해야 겨우 벼슬에 나가고, 벼슬에 물러나는 것을 자주 하여, 명종실록(13년 8월 5일 년 기사)에 따르면 명종이 요청이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황과 사림을 후원하던 고관 이준경 역시 이황이 산금야수(山禽野獸)처럼 툭 치면 고향으로 물러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 같이 조정에서 처신한 것은 조정에 아직 훈구대신의 세력이 강하였으며, 기묘사화, 을사사회처럼 과거 사림이 입었던 피해가 컷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조 즉위 초까지만 해도 윤원형, 이량 등은 이황을 ‘소기묘(小己卯, 조광조의 아류)’로 부르면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1] 신중하게 처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경연에서 명종과 선조에게 사화(士禍)가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걸 간곡하게 다짐하고, 이준경 등에게는 사림을 포용하라고 부탁했다. 또한 사림 내부 단속에도 신경을 썻는데, 기대승, 박순, 율곡 이이 등에게는 조광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2] 특히 이황은 기묘사회의 중심이 된 조광조에 대하여, ‘학력미충(學力未充)’[3]임에도 함부로 나서서 화를 자초다고 비판하였다.[4]


하지만 기묘사림의 명예회복과 이를 통한 조선 사림의 도통(道統)을 확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선조 즉위년에 기대승정몽주만이 아니라 김굉필,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발의하였으며, 이황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사현(四賢)으로 하여 현창(顯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사현'이라고 했지만 이황 자신은 이 4명 가운데 이언적을 제외하면 부족함이 있다고 봤다. 김종직은 도학 보다는 사장학(詞章學)에 뛰어난 인물로 봤고, 김굉필과 조광조는 저술이 없어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없다고 봤으며, 이언적의 경우에는 회재집(晦齋集)을 보고서 이를 명확히 알려서 올바른 학문을 퍼트렸기 때문에 널리 알릴 가치가 있다고 봤다. [5]

김굉필과 정여창의 유고 정리, 사묘 건립에 참가하고, 조광조외 이언적에 대해서는 공적을 알리는 행장(行狀)을 저술했다. 이로서 조선 사림의 도통을 확립하게 된다.

3.2. 학문

20세에는 주역을 공부했으며, 23세에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얻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43세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교정하여 출간한다.

이황은 전습록(傳習錄) 등을 지어서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하였는데, 진헌장과 왕수인(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를 비판하고, 이것이 선불교의 돈오돈수 처럼 근거없이 자의식에 빠질 우려가 높다고 보았다. 또 자신의 마음에 치우쳐서 사물의 객관적인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간과한다고 비판했다.

화담 서경덕 학파와 대립하였는데, 서경덕의 제자 남언경(南彦經)이 무의(無意)와 무욕(無欲)으로 담일청명(湛一淸明)에 이르고자 하였을 때, 이를 불교식 수행법이라고 비판하였다.[6] 올바른 정좌(靜坐)는 신비주의적으로 정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을 통제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갖추는데 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7]

== 향촌자치==
자주 귀향했던 이황은 단지 고향에서 은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동향의 선비들과 상의하여 조선의 향약 모델을 만들게 된다. 예안향약(禮安鄕約)과 온계동약(溫溪洞約)이다. 향악을 통하여 사림이 주도하는 향촌자치의 모델이 되었다.

4. 교육

이황은 서원을 공인화 하는데 앞장 섯다. 1541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 서원이 세워졌는데, 이황은 1550년(명종 5년)에 풍기에 후임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 서원을 공인할 것을 건의한다. 백운동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받고 국가의 공인서원이 되었다.

5. 재력

이황은 재력가이기도 했는데 말년에 360명의 노비, 3000두락이 넘는 방대한 전답(田畓)을 보유했다. 이황의 후손들이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통하여 퇴계의 자산 규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6. 평가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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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조수정실록 2년 6월 1일
  • [2] 퇴계전서 ‘기명언에 답하다’ ‘박순에 답하다’
  • [3] 배움이 부족함
  • [4] 퇴계선생 언행록 중 ‘인물을 논하다(論人物)’,
  • [5] 퇴계선생 언행록 중 ‘인물을 논하다(論人物)’,
  • [6] 퇴계전서 중 ‘남시보에 답하다’
  • [7] 퇴계전서 중 ‘김돈서에 답하다’, 퇴계전서 중 ‘이굉중에 답하다’


9.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