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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생애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1971년 수도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94년 아이오와대학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에 체류하였다. 시 창작과 번역을 같이 해왔는데,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였다.

가족이 없었고,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에서,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 직전의 단계까지 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는지 2014년 퇴원해 경주시에 정착했다. 2016년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발표했다.

198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인으로서 황지우, 이성복과 함께 아주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2010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세계

개요

한바탕 난장이 훓고 지나간 후의 권태와 상념에 대한 뒤돌아봄,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허무를 담은 시로, 우리나라 현대시인들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인기 작가가 됐다. 작품세계가 끔찍할 정도로 어둡고, 자기 과거에 대한 노출이 적나라하다. 비극적 사랑에 의한 슬픔 혹은 인생의 덧없음에 의한 공허감, 자기연민 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찢어발기며 냉소한다. 그런데 그러한 어둠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게 반전이다.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등을 냈고, 번역서로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메이 사튼의 '혼자 산다는 것' 등을 냈다.

기억할 만한 시구들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자화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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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푸른 물의 상처가 내린다.
떠도는 스물 넷의 이마 위에,
하나씩 벗기며 벗어 버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눕는 꿈 위에
쏟아지는 비와 푸른 채찍질.

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
부끄럽게 비어 버린 알몸에
죽은 꿈의 문신이 돋아난다.
시간이 황량하게 고인다.

누가 열렬한 슬픔의 눈을 뜨고
꽃의 중심에서 울고 있나
하나씩 꿈을 떠나보내며
누가 빈 몸으로 울고있나

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꽃. 상처. 스물 넷.
('비 꽃 상처'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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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부엉이 한 마리가 창가에서
나를 꼬나보기 시작했어.
나는 허둥거리며 내 몸의
모든 기관들을 닫아 버렸지만
부엉이의 눈빛이 오토머신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어 열고
노란 방사선을 쏘아 부었어.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차갑게 융해되어 갔어.

이윽고 잠, 닫혀진 회색 강철 바다,
속으로 한 사내의 그림자가 숨어들어
내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고
환각처럼 들리는 창가에서, 누구시죠?
내게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러 붓는, 누구시죠?
내 사산(死産)의 침상에 낮게 가라앉아,

누구시죠? 누구 누구 누구......?

밤부엉이가 밤새 내 지붕을 파먹었어.
아침엔 날이 흐렸고
벌어진 큰골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었어.
이미 죽은 내 몸뚱이 위에
누군가 줄기차게 오줌을 깔기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떠나갔어.
('밤부엉이' 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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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젖은 덤불 속에서
五官의 마디를 풀고 있다.

무거운 인연을 하나씩 벗으며
출렁이는 욕망도 쏟아 버리고
오직 청동빛 목청 하나만으로
세월의 긴 함정을 뛰어넘는
그리운 저 親族의 얼굴.

허무의 가장 빛나는 힘으로
푸른 하늘에
투신하는
새.
('새' 전문)
.
.
.

거미는 시멘트 벽을 따라 기어가고
내 상상의 게는 머릿속 개펄을 가로지르고

혼절할 듯한 푸른 밤

그가 오는 시각을 나는 안다
꿈의 먼 물결이 떨리고 창가에서
담배를 문 내 입술이 먼저 타들어간다.

그가 오는 시각을 나는 안다.
불 꺼진 창문들이 험한 표정으로 흔들리고
젖은 포도 위로 숨죽인 비명이 번져 가고
갑자기, 저승에서 이를 닦고 있는
내 어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이윽고 아득하게 코피가 터져 흐르고
타오를 듯 푸르른 이 세계의 공포 속으로
내가 내려서기 시작한다.
안개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마침내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너,
지금
내리는 밤안개의
등뒤에 숨어 있느냐?
('對敵'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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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붕붕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즐거운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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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제기동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행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 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 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는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 갔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 그때마다 마른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야윈 팔을 치켜들고 나직이 말씀하셨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197X년의 우리들의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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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 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
나는 이 지상에 흰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
나쁜 놈 , 널 죽여버리고 말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 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오 개새끼
못 잊어!
('Y를 위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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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시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맂바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시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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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몸 속에는 스물 다섯에
내가 버린 童貞이 흐르고 있다.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처럼
황량하게, 다시 늘 그리웁게.

그 여자의 두 손가락으로 쉽게 나는 열린다
무한을 향해 스스로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첫사랑의 여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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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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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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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삼십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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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던 것이 자리잡고
머리골 속에서 쓸쓸함이 중력을 갖고
쓸쓸함이 눈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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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근처의 깊은 그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바다에 눕는다.
('수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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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흘리는 곳,
어디로 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여성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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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뒷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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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기억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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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해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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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마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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