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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를 졸업한 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8기로 졸업했다.[1] 김종필, 김형욱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동기다. 서종철, 노재현, 윤필용 등과 함께 전두환 등 하나회의 주요 후원자로 꼽힌다.[2]
8사단장, 정보사령관 등을 맡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윤필용이 물러나자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나회를 뿌리뽑으려는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육군보안사령부가 휘발유를 불법으로 판매한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강창성을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됐다.
1975년 육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7년 육군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런데 1977년 대대장 월북 사건을 납북이라고 거짓 보고하였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김기춘 검사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의 국군보안사령부 축소안이 실행되었다. 또한 본인이 권력지향형 인물이 아니어서 보안사 권력 확장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대대장 월북 거짓 보고 사건의 여파로 1979년 제2군사령관으로 보직 이동했다. 보안사령관 후임자로 전두환을 적극 추천하였고, 갓 소장에 진급한 전두환이 핵심 요직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이 결정은 나비효과처럼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10.26 사태 후 규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이 됨으로써 전두환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후원자여서 그런지 12.12 군사 반란 이후 세 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 유일하게 유임되었고[3] 1980년 대장에 진급하였다. 제2군사령관 임기 중이던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의 계엄군의 지휘계통 상에 있었지만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유혈 진압에 있어서 진종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 때 사위인 조준웅 검사[4]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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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종채를 군내 요직에 중용했던 박정희도 대구사범과 육사를 함께 졸업했다.
- [2]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에 숙청된 윤필용과 달리 진종채, 서종철, 노재현은 10.26 사건 때까지 군에 영향력을 행사, 영남 군벌 3인방으로 불렸다.
- [3] 12.12 군사반란 당시 야전군 사령관은 김학원 제1군사령관(중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대장), 이건영 제3군사령관(중장)이다. 이 중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종채 제2군사령관을 제외한 제1, 3군사령관은 반란 이후 보직 해임되었다. 그리고 제1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제3군사령관에는 반란군의 핵심 맴버였던 유학성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 [4]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