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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2.27.~2002.6.12.[* 정승화 그가 살아온 모든 일생의 일수가 총 26769일.]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기간 | 1948년 ~ 1979년 |
임관 | 육사 5기 |
최종계급 | 대장[1] |
최종보직 | 육군참모총장 |
소개 ¶
생애 ¶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 봉산면 출생이다. 상관을 잘못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임관한 뒤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월북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보임되어서 참전하였는데 군단장이 유재흥 장군이었고 그 전투는 현리 전투였다. 이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다. 탈출할 때 한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5.16 쿠데타 때는 방첩대장(현재의 명칭은 국군기무사령관)을 역임했다.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의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 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이 때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들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이 사건을 덮기로 하였다. 김재춘은 5.16쿠데타에 가담해서 한때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랐으나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 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정권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장, 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0.26 이후 ~ 87년 대선 전 ¶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터지는데 1979년 10.26 사건(김재규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였던 정승화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자세한 사항은 10.26 사건 문서로.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문서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고,[2]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육군본부에 갔으며,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3]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그래서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모진 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당시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당시 특전사령관)가 정 총장의 연행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를 하고 신군부를 제압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들만으로 신군부 세력들을 막을 수 없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마저 믿었던 부하들에게 잡히고 만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지 않고 온갖 고문을 동반한 수사를 받고, 군사재판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강제 예편)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자 수치였으며, 그간 받은 장교 급여분도 이병으로 동일 기간을 복무할 시 받을 돈을 제외하고 전부 몰수당하고 군인연금 수혜 권리도 박탈되어 경제적인 위기도 겪었다. 수감기간 중 한미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이 생일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 준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사망까지 ¶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가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그것이 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의 김영삼-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거기다가 재야 진보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등 두명이 하나로 단일화됬어도 노태우가 대선에 당선될일은 없었을것이라고 한다.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무혈입성)이 유력하였다. 정승화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전격 등장했다.
공식선거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바로 전날 김현희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었고, 3김이 서로 먼저 대통령 해보겠다고 동시출마하는 병크까지 터뜨려,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36%, 김영삼-27%, 김대중-26%, 김종필-7%[4], 즉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강등 조치된 장교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본 헌병감), 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외려 군사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이 87년에 제정된 헌법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전두환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가 특별사면 혜택을 받아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이후 1999년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6대 회장에 당선되어 쿠데타 피해자 출신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임기 중이던 2002년 6월 12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었다.
미디어 매체에서 ¶
문화방송의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MBC 성우 정승현씨가, SBS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MBC 성우 최병학씨가,[5]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씨가 정승화 역을 맡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정종준씨가 분했다.[6] 영화 자체가 블랙코미디이다 보니 꽤나 우유부단하고 코믹하게 나오는데 육군본부 앞에서 자신을 못알아보는 초병에게 내가 육군참모총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씬은 이 영화의 백미. 영화 속 설정상 여자에는 사족을 못 쓰는 것은 덤.
특히 제5공화국에서는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김영삼의 제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집앞에서 후배 고명승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하자 "전두환이가 보내서 왔나? 가서 전하게. 그렇잖아도 고민 중이었는데, 결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만 가보게." 라고 말하는 간지나는 장면이 나왔으며, 해당 대사로 인해 평소 서민들의 아버지 역할로 자주 출연했던 박인환의 연기력이 재평가 되기도 하였다.
기타 ¶
- 10.26 당시 자신을 몰라보는 육군본부의 초병에게 "나 참모총장이야!!" 하니 그 초병이 대답하기를 "뭔 총장?? 대학교 총장 말인가요?"라고 한 일화는 정승화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7]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 참석할 때 정승화 대장은 군복이 아닌 사복, 즉 정장 차림이었고, 자신의 관용차가 아닌 김재규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 육본의 초병도 "한밤중에 갑자기 민간차량을 타고 나타난 사복 차림의 장년 남성"이 설마 육군참모총장이라곤 생각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곧 다른 장교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알아보고 무사통과시켰다고.
- 세간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사건(12.12 사태)과 관련지어 정승화 장군을 기억하지만, 원래 군부에서 기억하는 정승화는,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라던가, 격발 등 사격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참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후문.
- 가족으로은 아내인 신유경 씨와 3남 1녀가 있다. 자녀 중 셋째인 정이열 씨는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 및 전역했다.
- 소설 리턴 1979에선 최규하 대통령의 둘도 없는 군부 파트너로, 군부 내 2인자 장태완과 함께 '유신 체제를 이용한 국정 개혁'의 한 축이 된다.
-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인 리턴1212에선 장정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시작 배경이 12.12사태이기도 하고, 이름도 저작권 및 명예훼손 관련 문제 때문에 변경한 것으로 볼수 있으나, 누가 봐도 정승화 및 그 아들(여기선 아들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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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두환에 의해 이등병으로 17계급 강등 및 예편되었다가 대장으로 복권되었다. 따라서 현역 최종계급은 공식적으로 대장.
- [2] 다만 뭔가 수상쩍다는 건 느꼈는지 차 안에서 김재규가 "목이 마를 텐데 이거라도 좀 드시라." 하면서 준 사탕을 바로 바닥에 버렸다고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도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 [3]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 [4] 보면 알 수 있듯, 3김이 단일화만 했어도 노태우는 절대 당선될 수 없었다.
- [5] 이후 제5공화국에서는 12.12 직후 신군부의 지지로 국방장관이 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주영복 역할로 출연했다.
- [6] 아이러니하게도 정종준은 1995년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승화 체포령을 내린 전두환 역으로 출연했다.
- [7] 이에 대해 정승화는 대통령 저격이라는 비상사태가 일어났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