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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영(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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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태영(張泰英)
생몰년도 1929년 ~ 1999년 8월 3일
출신지 경상북도 선산읍
학력 경남중등학교-서울대학교
포지션 투수[1], 외야수[2]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
소속팀 육군 야구단(1954년~?)

목차

소개


경남중등학교 청룡기 2연패, 황금사자기 3연패의 주역이자 부산야구가 배출한 원조 슈퍼스타. 고교야구 통산 전적 32승 1패.

165cm의 단신의 몸에서 뭄어져 나오는 140km/h[3]빠른 직구와 칼같은 제구력으로 고교야구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

김양중과는 세기의 라이벌이었으며 고교야구에서 뛸 당시에는 부산의 장태영, 광주의 김양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맞수 대결은 어느 스포츠, 어느 선수에게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대결의식이 스포츠에 활기를 불어 넣는 요인이다. 나와 태영이는 고향과 성장배경이 달랐어도 야구라는 세계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온 맞수며 둘도 없는 친구다.
ㅡ 김양중출처

생애

1929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장인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살이 되던 해에 부산으로 내려가 살았다. 1944년에 경남중학교에 입학해 유도부에 입부해 유도를 배우던 그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남중학교에 야구부가 생기자 야구부에 입부하면서 그의 야구인생이 시작되었다. 축산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경남중 야구부후원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재정적으로도 풍족한 사람이었고 이런 환경속에서 그는 야구 하나만 보고 성장할수 있었다.

처음 포지션은 유격수로 시작했고 그의 첫 고교무대 데뷔전이었던 1946년 제1회 청룡기쟁탈 중등학교 야구선수권에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왼손잡이 유격수로 출전해 허종만, 정상교, 조성일, 박정표, 송주창등과 함께 팀의 준우승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7년, 故 고광적 당시 경남중 감독은 당시 선발이었던 장갑영 대신 그를 투수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경남중등학교를 전국 최고의 팀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태양을 던지다

투수로 전향한후 출전한 1947년 제2회 청룡기쟁탈 중등학교 야구선수권에서 140km/h의 매우 빠른 공을 던져 타자들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황금사자기에서도 팀의 우승을 이끌어 내자 세간에서는 그를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빠른 직구 뿐 아니라 제구력도 매우 좋았는데 당시 동래중등학교의 에이스였던 어우홍은 그를 회고하며 "좌완에 아주 빠른 볼을 던졌다. 또한, 몸쪽, 바깥쪽 로케이션이 좋았고, 볼도 낮게 깔려 들어왔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기사

그의 활약으로 경남고등학교는 1947년 제2회 청룡기 부터 이듬해인 1948년 제2회 황금사자기 때까지 4개의 전국대회에서 파죽의 12연승을 기록했으며 1948년 제 4회 청룡기에서도 전주공업중, 춘천농업중, 대구상업중을 연달아 꺾으며 연승을 15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김양중이 버티고 있던 광주서중과 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때 김양중과의 연장 11회에 걸친 대결은 고교야구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꼽힌다.

연장 11회, 통한의 패배 그리고 무너진 통합 3연패

1949년 6월 13일, 뜨거운 태양 아래 5천명 수용가능한 동대문야구장에는 15,000명의 관객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두명의 투수가 그라운드에서 모든것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경남중은 당대 최강의 야구팀이었고 그 누구도 우승을 하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결승전을 앞두고 1,311명을 대상으로한 현장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9.4%가 경남중학교 우승을 점쳤고 광주서중의 우승을 점친사람은 단 8명, 0.6%의 인원뿐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경남중은 2년간 15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모든 트로피를 쓸어 담은 최강의 팀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장태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4회 청룡기에서도 1차전 전주공업을 상대로 13:1로 6회 콜드게임승, 2차전에서 춘천중학을 상대로 10:0 5회 콜드게임 승, 준결승에서 막강한 상대였던 대구상업중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둬 들였다.

상대는 김양중이 이끄는 광주서중. 광주서중은 전라도 지역의 최고의 팀으로 불리긴했지만[4] 전국대회 수준에서는 미치지 못한 수준의 야구팀이었고 에이스 김양중의 분투에 부산중학과 대전사범중을 상대로 힘든 승부끝에 결승전에 올라왔다. 언론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경남중학교의 우승을 점쳤고 경남중학교 측에서도 이 분위기에 흠뻑 취해 이미 이긴것이나 다름 없다며 전날 미리 축하연을 펼쳤다. 반면 광주서중은 이기든 지든 김양중을 믿고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결의했다.

양팀의 선발은 모두가 예측한대로 장태영과 김양중이었다. 그러나 경기내용은 예측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8회말까지 장태영은 광주서중의 타선을 단 1안타로 꽁꽁 묶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양중도 경남고의 타선을 철저히 틀어막으며 단 1점도 내주지 않는 투구를 선보였다. 스코어링에 0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것은 9회초, 경남중의 1번타자 허종만과 2번타자 정상규가 연속안타를 기록하며 2사후 1점을 기록하면서였다.

그리고 가진 9회말. 광주서중의 문택영이 삼진으로 물러났고 김의석도 유격수 땅볼로 아웃. 그리고 타석에 이완재가 들어섰고 장태영이 던진 공을 쳐냈고 그것이 내야 땅볼이 되며 경남중학교 2루수 정상규의 품안에 안겼다. 모두가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정상규의 송구가 1루수 뒤로 빠지며[5] 이완재는 2루까지 전력질주해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타석에 3번타자이자 에이스 김양중이 들어섰다. 풀카운트 2:2의 상황에서 5번째 직구를 김양중이 그대로 받아치며 중전안타를 뽑아냈고 이완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홈으로 달려와 득점에 성공, 1:1 동점이 되버린다.

그리고 대망의 11회말. 장태영이 대회 첫 볼넷을 내주며 광주서중의 선두타자 김용욱을 출루시킨후 문택영이 초구 번트를 댔는데 이것이 전진수비를 하던 경남중 유격수 키를 넘기는 행운의 안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1루주자였던 김용욱은 3루까지 내달렸고 경남중의 좌익수였던 이상제가 이를 잡기위해 3루 송구를 했는데 이것이 3루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악송구가 되어 버린것이다.망했어요

어이없는 실책들로 결국 장태영이 이끄는 경남고는 통한의 패배를 안게 된다. 이후 장태영은 1974년에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력이 우세하다는 결정적인 사실, 그 누구도 경남의 패배를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평범한 에러로 우리는 3연패를 저지당하고 통분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라며 회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날 패배는 그의 고교야구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다.

실업무대에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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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식(좌)과 장태영(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6]
경남중 재학시절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할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코피가 날정도로 공부도 상당히 열심히 했던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졸업후 그는 육군에 입대해 육군 경리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고교시절 라이벌 이었던 김양중, 박현식등과 함께 한국실업야구 무대를 누볐다.육군 시절에는 외야수로 출전하게 되었고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멤버로 참가, 야구대표팀의 첫 국제대회 안타를 기록해 내기도 했다.기사

1957년에는 제5회 군-실업야구쟁패전[7]에서 11타수 9안타, 타율 .818을 기록하며 타격왕을 수상했는데 이 기록은 1993년 홍익대학교의 문희성이 대학선수권대회에서 7타수 7안타 1.000을 기록하기 전까지 단일대회 최고 타율이었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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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행 감독시절 장태영(좌). 우측은 기업은행 감독 김양중
1960년 소령으로 예편해 군복을 벗은 그는 김성근과 함께 교통부 창단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1964년 상업은행 야구단이 창단되자 초대 감독으로 부임 했고 이후 대한야구협회 이사직을 맡는등 야구계에 몸을 담다가 1998년 자서전을 퍼낸후 이듬해인 1999년 8월, 파란만장한 인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트리비아

파일:external/www.sportsq.co.kr/6979_13370_2752.jpg
  • 일본 야구서적인 "스포츠맨의 몸 관리", "일본 스포츠맨 의학"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이 친필 원고지는 그가 사망한 이후 KBO에 기증되었다.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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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교야구 시절
  • [2] 실업야구 시절
  • [3] 당시에 스피드건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당시 야구 원로들이 회상하기로 140에 달하는 매우 빠른 공이었다고 회상한다.
  • [4] 이때 군산상고 야구부는 창단되기 전이다. 군산상고 야구부가 만들어 진것은 1968년이다.
  • [5] 이때 정상규는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오버핸드로 던지지 않고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서 던진게 화근이었다.
  • [6] 정확히 말하면 당시 서울클럽이라는 야구팀 유니폼이다. 당시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데 나라에 돈이 없다보니(...) 유니폼을 따로 제작할수가 없어서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단 유니폼을 서울클럽에서 빌려서 출전했다.
  • [7] 훗날 대학팀과 실업팀 토너먼트인 백호기의 전신인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