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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언론인)



장지연(張志淵)
(1864년 ~ 1921년 10월 2일)



소개

대한 제국의 계몽 운동가. 언론인. 대한 자강회 회장.
일제 강점기친일파.

1905년 황성신문[1]에 주필로서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해 유명하다. 본명은 장지윤(張志尹). 호는 위암(韋庵).

구한말에 애국 · 계몽 운동에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실의에 빠져 1914년부터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에 향시에 붙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낙방. 1894년 2월 식년시 진사시에 붙었으나 이 무렵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애국 · 계몽 운동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 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년 4월에는 경성신문을 인수, '대한황성신문'으로 변명해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할 때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독립 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바로 다음 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월 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다.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장지연은 구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교육 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애국 부인전'이라는 책을 냈는데 바로 잔 다르크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초기 신채호처럼 역사적 인물로서 애국 영웅 정신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사상 최초로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언급된 사례이다.

친일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2]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가량 머물렀고 이후 귀국해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경남일보는 1910년 한일 합방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활동

그러나 1914년부터의 행실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 아베 미쓰이에라는 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조선 총독부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던 것이다.

이에 학자들에 여러 비난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장지연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3],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장지연의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 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언설이 많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것. 허나 이 부분에는 논란할 여지가 상당한데, 매일신보 주필로서 근무할 무렵, 매일같이 실의에 빠진 상태로 술에 너무 의존해 쪄들어 지냈다는 사실을 들어 애국 · 계몽 운동했으나 망국하여 실의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망국 전엔 상당히 왕성한 애국 운동을 펼쳤던 장지연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많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위암이 친일파라는 시민 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훈을 박탈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그 엄혹한 시절에 통분의 문장을 남겼는가? 누가 위암을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국무 회의에서 서훈 박탈을 막지 못하고 동조하여 위암을 모욕한 자들 중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제대로 읽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내 명예를 걸겠다.
- 전원책

1918년 12월 1일자 매일신보에의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을 유람하기 시작해서 3.1 운동 때는 별말 않았고 1921년 1월, 상기한 생활 습관으로 결국 술병이 들었다. 회복되지 않고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평소 에 쪄들었던 생활을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했지만, 그해 10월 2일 사망하였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행정부 측이 건국 훈장을 추서했으나 1990년대부터 현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강명관과 재야 사학자 이이화 등이 한 연구 덕분에 친일 의혹이 제기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이에 2010년 12월에는 국가 보훈처에서 건국 훈장 서훈 취소를 결정했고 2011년 4월 5일 확정되었는데 후손들의 제소로 서울 행정 법원, 서울 고등 법원에서 서훈을 취소한 기관이 서훈 처분권자인 대통령이 아닌 국가 보훈처라는 이유로 서훈 취소가 무효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2014년 10월 13일 대법원이 국가 보훈처의 서훈 취소 표명은 대통령이 처분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피고를 국가 보훈처가 아닌 대통령으로 지정했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서울 고등 법원 판결을 파기 환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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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한매일신보에도 실렸다.
  • [2]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한 단체로, 후에 일진회와 타협을 하여 국권 피탈 후 해산한다.
  • [3] 장지연이 편찬한 조선 시대 중ㆍ하층민들의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