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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진영. 일본 무로마치 시대 작품. 교토 고잔지(高山寺) 소장. | |
시호 |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
법명 | 원효(元曉) |
자칭 | 소성거사(小性居士) |
골품 | 6두품 |
성 | 설 |
이름 | 사례(思禮)/ 서당(誓幢)/ 신당(新幢) |
배우자 | 요석공주(瑤石公主) |
아들 | 설총 |
아버지 | 담날(談捺) |
출생지 | 신라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
생몰년 | 617 ~ 686. 3. 30.[1] |
목차
include(틀:-)
소개 ¶
출신 ¶
이름은 사례(思禮)였으며, 아명은 서당(誓幢)[7] 또는 신당(新幢). 의상은 진골 출신임이 확실하지만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다. 6두품 출신이라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8]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것과,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소수설에 불과하다.
부처님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한 톨이 사발만 하다나 뭐라나.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끼에 밤 두 톨밖에 안 준다." 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한 알이 발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끼에 밤 한 톨만 주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망했어요. 발우 사발 하나에 가득찰 정도면 작은 알밤 200g 정도일텐데 200g이면 400 칼로리 쯤된다. 원래 이걸 한끼에 두알 먹었으니 이 머슴은 한끼에 800칼로리를 섭취한 셈.(...)[9]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해골물을 마신 이야기 ¶
아마도 가장 유명한 원효의 일화.
젊을 적 원효는 촉망받는 유능한 스님으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 했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주변을 뒤척였는데, 웬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서 주변을 보니 그가 마셨던 건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그걸 알게 된 원효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 이를 통해 돈오돈수가 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옆에서 가던 의상 스님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으레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역사 기록이 아니라 고승들의 이야기를 담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나온 것이라서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 애초에 진짜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셨더라도 그것이 시체 썩은 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음가짐이고 달관이고 이전에 시체 썩은 물에는 상상도 못할만큼의 박테리아가 우글거리고, 보통 마신 지 수 시간이 안 되어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인다. 원효 대사가 진짜로 그런 걸 마셨다면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고 말고는커녕 그 자리에서 앓아 누웠어야 정상이다. 즉 사실이라 하더라도 해골에 고인 빗물같은 걸 마셨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이래저래 그냥 야사 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 한편 일본 측 기록에서는 원효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게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사실 불교(혹은 종교 전체)에서 이 해골물 이야기는 표현이 다를 뿐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다. 신라 시대에을 일으켰던 무염(수정바람)도 당나라에 공부하러 가던 중에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려 했는데, 하필이면 옆에서 소가 물을 먹는데다 농부가 발을 씻고 있었다. 이에 무염이 저만치 떨어져서 마시자 농부가 "도를 깨우치려면 한참 멀었구만. 왜, 소랑 내가 옆에 있으니까 더럽수? 어차피 흘러가는 물인데."라는 식으로 살짝 면박을 주자 귀담아들었다가, 당나라에 가서 교종을 버리고 선종을 받아들였다 한다. 이 역시 야사이다.
공교롭게도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하던 도중, 한 노인이 너무 목이 말라서, 다른 노인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근처에 있는 가정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은 기근과 질병으로 식구 전원이 죽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급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빵을 먹이고 우물을 찾아 물을 떠와서 식구들을 구한다. 다시 성지 순례를 떠나려 하지만 이들을 돕지 않으면 고생하며 주님을 찾아간다 해도 내 마음에서는 주님을 잃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여행비를 털어 그들이 자립할 때까지 도운 뒤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친구가 물을 마시러 돌아간 걸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떠난 다른 노인은 혼자 성지순례를 하다 돌아간 친구의 환영을 성지에서 보게 된다.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로 그 집에 우연히 들러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순례는 받아들이셨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의 순례는 분명 받아들이셨을 것이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종교적 여행에서 마음을 중시한 사람은 남고, 체험을 중시한 사람은 떠났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야기.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불교 관련 기록들을 검토해 본 결과, 원효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하였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참조)
원효대사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해골물을 검색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별 상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한다.
인터넷상에선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니었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한다. 미미쿠키가 대표적인 예.
승려로서 ¶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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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어쨌든 머리도 안 깎고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고 술도 마시고 마치 파계승이나 땡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설법을 남겼다. 대중들에게 '구제'라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도끼 드립[10]으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유학자 설총을 남긴 것도 유명하다. 그러니까 파계승 맞다. 그래서 원효는 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이다. 반면 파계를 통해 소성거사를 칭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재가자로 지내면서 활동하였으니 공식적으로 소성거사라고 불러야 맞다는 주장이 있다.[11] 이외에도 금역(禁域)을 출입하는 데에도 거침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을 창시한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12]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만들었지만, 관세음보살을 덧붙인 사람은 의상이다. 따로 사용할 경우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즉 저 두 개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는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 라는 의미로 내생을 보장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의상이 덧붙인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한 데다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둘을 묶어 염불한다고 해도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이렇게 묶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어 화엄종의 기본이 되었다. 근데 화엄종은 제안한 사람은 원효고 완성시킨 사람은 또 의상. 둘은 친구로 당나라 유학길에 같이 올랐었다.
어쨌든 당대 스님으로서는 확 깨는 인상이었던 것은 사실. 절이나 암자에 앉아서 사람들이 올 때마다 불법을 전파하는 일반적인 스님들과 달리 그냥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선조? 다만 이 분은 부처극락 불신지옥 을 외치고 다니진 않았다.다만 그 깨는 행동 때문에 관련된 일화/야사도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661년 김유신이 평양을 포위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러 고구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전달해준 군량을 받고 김유신에게 송아지와 난새(鸞鳥)의 그림을 그려서 보냈는데, 원효가 이 그림이 "속히 돌아가라."죽기 싫으면 너도 빨리 튀어라 하는 암호문임을[13]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유신은 돌아오면서 고구려군의 포위공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14]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고깝게 보고 심지어는 그를 몰래 죽이려 드는 사람도 있었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한번은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15]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 삼아서 참석을 반대했다.
나중에 왕비가 병이 나자 약을 찾아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바다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얻어 돌아왔다. 그런데 용왕이 준 이 불경은 처음부터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인 데다 파본 내용도 어려워서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왕명을 받고 순서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안 또한 "이 불경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승려는 원효 한 사람뿐."이라며 풀이하기를 사양했다.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이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달라는 왕명을 받고 소를 타고 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사흘만에 소(疏, 해설집) 다섯 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이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사흘만 더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세 권을 써서 강의할 수 있었다. 훌륭히 강의를 마친 뒤 "지난 날 서까래 백 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후세에 끼친 영향 ¶
삼국유사를 통해 여러 일화를 남겨 그 쪽이 더 유명하지만,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다. 십문화쟁론으로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정리하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다.[16]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
다른 저술인 십문화쟁론도 만만치 않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17]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18]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라는 관료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설씨 성 가진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한국불교는 원효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말이 더 필요한지?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그 이후에 중국 뺨치는 불교학자는 나오지 않았다.
중기 신라 불교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이 사람 덕분인지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되었는데...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에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다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텐데... 물론 남아 있었다고 해도 임진왜란, 아무리 늦어도 일제강점기 때 소실됐을 가능성도 높다.
의상ㆍ자장ㆍ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으며,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절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스님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하셔도 모자를 판이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 및 원효로, 경산시의 원효로가 바로 이 원효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울 원효로는 원래 일제가 붙인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19] 경산 원효로는 진짜로 원효대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한다.[20]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 지 2백 년이 지난 데다 한 명이 추던 것이 열두 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세 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같고 목은 여름 자라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
일제 시대인 1942년에 소설가 매일신보에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다룬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이 소설은 "원효사상에 대한 의도적 오독으로 원효를 일제의 전시동원과 식민교육을 설파하는 특별한 인물로 조립해낸, 전쟁주의와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을 정당화하는 장치에 원효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1]
1962년에 장일호 감독작 영화 원효대사가 있다.
1977년~1989년 방영된 KBS 전설의 고향(사실상 시즌 1)에서 원효대사역에 임혁, 요석공주역에 한혜숙이 출연하였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과 요석공주와 맺어지는 줄거리를 담았다.
1979년 KBS1 주말드라마 《성사의 길 맥 - 원효대사》편이 방송되었다.
1986년 KBS에서 방영한 '원효대사' 라는 사극에서는 전무송이 원효대사, 유지인이 요석공주 역을 맡았다. 마지막에 성인이 된 설총이 원효의 절로 찾아가니 원효가 마당을 쓸라고 시켰는데, 깨끗하게 쓸고 나니 원효가 그걸 보면서 "가을 마당에 낙엽 한두 잎은 있어야지." 하면서 몇 개 흩뿌리는 걸로 마무리한다.
2017년 10월 16일 채널A 《천일야史》 43회에서 단편으로 원효대사의 몰래한 사랑이 방송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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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일흔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새겼다. 고선사 터는 덕동댐이 만들어져 수몰되었고, 절 터에 있던 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 보관 중이다.
- [2] 고려 의 원효에게 내린 시호. 자기 동생이자, 해동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의천이 원효를 높인 이유는 본인이 추진하는 불교계 통합에 원효의 사상이 유용하다는 정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의천 항목 참조. 이때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
- [3] 당시 신라시대 때는 압량주(押梁州)였다.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의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있다.
- [4]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자에 '새벽 효'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
- [5]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며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 [6]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
- [7] 공교롭게도 신라에서는 군부대의 이름으로도 '서당(誓幢)'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효가 오늘날의 군종승려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는 견해도 있다.
- [8] 참고로 원효와 그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순창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의 6부의 촌장 가운데 '호진'의 자식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되었다 하여 가문의 시조로 본다..
- [9] 이 당시는 하루에 두 끼만 먹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성인 남성의 일일 권장 섭취 칼로리와 머슴이라는 특성상 육체노동자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끼 800칼로리도 오히려 적은 편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근거 없는 고소는 아닌 셈이다.
- [10]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도끼자국 참조).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신라시대 섹드립 클라스 보소 - [11] 이렇게 본다면 파계승이 아니다. 거사는 말 그대로 재가자이지 스님이 아니니까. 그리고 재가자는 최소한의 5계만 지키면 된다.
- [1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처음 설법에서 옴마니반메훔을 소개할 때 "일찌기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극락에 간다고 하였다." 하고 언급한다.
- [13] '송아지 그림과 난새 그림'이라는 말은 한자로 적으면 화독화란(畵犢畵鸞)인데, 각 글자의 음을 반절(半切)씩 떼서 읽으면 '혹한(ㅎ/ㅗㄱ+ㅎ/ㅏㄴ)'으로 속환(速還)이라는 말과 음이 같다고.
- [14]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2005, p190
- [15] 태조 왕건에도 인왕백고좌회가 나온다. 나라의 이름 높은 스님들을 두루 모아 여는 법회이다. 여기서는 도 대사가 법력으로 날씨를 바꾸고 황룡사 목탑을 기울이는 허구가 가미되었다.
- [16]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했다고 나온다. 흠좀무. 불교에서 세 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 [17] 범어로는 Dignāga, 한자로 뜻을 풀이하여 (대)역룡(大)域龍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18]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은 내용이 좀 다르다.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읽고는 "이 원효란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 아냐?"라고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참고로 불교에서 '00의 후계' 등으로 말하면 단순히 후계자란 뜻 이외에도,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즉 자기네 학파의 대스승의 환생자 대우를 받을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여긴 한술 더 뜨네. - [19] 이 때문에 서울시청 도시설계 분야에서 오래 관료로 근무한 손정목 교수는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안 된 케이스'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서울과 딱히 관련이 있는 역사 인물도 아니고... 그래도 서울에 고승일 뿐만 아니라 한국철학과 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인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이름의 거리가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보기도 한다.
- [20]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 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
- [21] [박균섭,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통해 본 전시동원체제와 식민교육의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