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식(1932년 4월 5일 ~ 2006년 9월 2일<ref>{{뉴스 인용
|제목=비전향장기수 오형식의 서거에 대한 부고
|출판사=조선중앙통신
|날짜=2006-09-03
}}</ref>)은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제목=비전향장기수 오형식의 서거에 대한 부고
|출판사=조선중앙통신
|날짜=2006-09-03
}}</ref>)은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생애 ¶
월북 후 서울 지방경비성 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1963년에 화학부를 졸업하고 원산농업대학에서 화학을 강의하는 상급 교원으로 채용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북송 비전향장기수 오형식 사망
|출판사=통일뉴스 (연합뉴스 인용)
|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7598
|날짜=2006-09-03
|확인날짜=2008-08-24
}}</ref> 상급교원은 대한민국 대학의 조교수에 해당한다.
|제목=북송 비전향장기수 오형식 사망
|출판사=통일뉴스 (연합뉴스 인용)
|url=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7598
|날짜=2006-09-03
|확인날짜=2008-08-24
}}</ref> 상급교원은 대한민국 대학의 조교수에 해당한다.
1969년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남파되었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하고 남파된 지 열흘 만인 1969년 6월에 체포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장기수가 되었다. 수감 중에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고 약 30년 동안 복역한 끝에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1999년에 석방되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4년 후인 2006년에 송환된 장기수 가운데 일곱 번째로 죽었고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김만수 외 12인
|제목=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4
|날짜=2003
|출판사=평양출판사
|출판위치=평양
|장=조국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오형식)
|저자=김만수 외 12인
|제목=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4
|날짜=2003
|출판사=평양출판사
|출판위치=평양
|장=조국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오형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