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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였으나, 오달제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여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사형 집행되었다. 이후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하여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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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5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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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정보
|이름= 오달제
|원어이름= 吳達濟
|출생일= 1609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637년 (29세)
|국적= {{국기나라|조선}}
|학력=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 장원 급제
|직업= 문관(사헌부 지평, 교리) 겸 정치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 초취 의령 남씨 부인 <br /> 재취 평산 신씨 부인
|자녀= 아들 오도현(吳道玄)
|부모= 아버지 오윤해(吳允諧) <br /> 어머니 해주 최씨 부인(海州 崔氏 夫人)
|친척= 양조부 오희문(吳希文) <br /> 친조부 오희인(吳希仁) <br /> 장인 남식(南烒) <br /> 장인 신득연(申得淵) <br /> 외조부 최형록(崔亨綠)
|상훈=
|서명=
|웹사이트=
}}
오달제(吳達濟, 1609년 ∼ 163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름= 오달제
|원어이름= 吳達濟
|출생일= 1609년
|출생지= 조선 한성부
심양]](瀋陽) |
서화]], 시문학 |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
|직업= 문관(사헌부 지평, 교리) 겸 정치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 초취 의령 남씨 부인 <br /> 재취 평산 신씨 부인
|자녀= 아들 오도현(吳道玄)
|부모= 아버지 오윤해(吳允諧) <br /> 어머니 해주 최씨 부인(海州 崔氏 夫人)
|친척= 양조부 오희문(吳希文) <br /> 친조부 오희인(吳希仁) <br /> 장인 남식(南烒) <br /> 장인 신득연(申得淵) <br /> 외조부 최형록(崔亨綠)
|상훈=
|서명=
|웹사이트=
}}
오달제(吳達濟, 1609년 ∼ 163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력 ¶
1634년(인조 1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병조좌랑,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청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화의를 반대한 죄로 윤집(尹集)·홍익한과 함께 청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였으나, 오달제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여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사형 집행되었다. 이후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하여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경기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충청도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경상도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