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정보
양주남(梁柱南, 1912년 3월 8일 ~ )은 일제 강점기의 영화감독 겸 시인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상사이다.
| 이름 = 양주남
| 원어명 = 梁柱南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성부
| 활동기간 = 1932년 ~ 1978년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김능안(金陵岸)
| 부모 = 양재연(부)
| 자녀 = 슬하 3남 2녀
| 학력 = 경성 신명고등보통학교 졸업
}}| 원어명 = 梁柱南
1912|3|8}} |
감독]] <br/> 영화 편집감독 <br/> 영화 음향연출가 <br/> 영화 동시녹음연출가 <br/> 영화 음향감독 <br /> 영화 녹음기사 <br/> 영화 녹음감독 <br/> 영화 현상감독 <br/> 영화 촬영감독 <br /> 기업가 <br/> 사진작가 <br /> 수필가 <br/> 시인 <br /> 연극연출가 |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김능안(金陵岸)
| 부모 = 양재연(부)
| 자녀 = 슬하 3남 2녀
양주동]](6촌 재종형) |
공보부]] 장관 공로표창장 <br/> 1972년 국방부 장관 공로표창장 |
양주남(梁柱南, 1912년 3월 8일 ~ )은 일제 강점기의 영화감독 겸 시인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상사이다.
소속 ¶
* 前 대한민국 국군홍보관리소 명예고문위원
생애 ¶
생애 초기와 어린 시절 ¶
친척 관계 ¶
영화 및 문학 분야 활약 절정기와 은퇴 ¶
그는 시인 겸 아동극작가 및 국어국문학자 겸 수필가 모기윤(毛麒允, 1912년 ~ 1983년 6월 30일) 前 한글학회 이사장과도 문학 교류를 하였으며 그는 한때 그의 문하에 정일성· 윤삼륙· 전세권· 김벌래 등이 교습하였고 트로트 가수 및 영화 기획가 겸 영화제작자 고복수(高福壽, 1911년 12월 29일 ~ 1972년 2월 10일)·영화감독 겸 영화 시나리오 각본 작가 및 기획가 조긍하(趙肯夏, 1919년 8월 16일 ~ 1982년 1월 28일) 등과도 각각 영화 기획 투자 교류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이처럼 서울에서 영화예술가 겸 연극연출가와 문학작가로 활발히 활약을 하다가 1977년 이후에는 경기도 안양에 전격 낙향하여 그곳에 거주하였고 이듬해 1978년 영화와 문학 및 연극연출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 사실상 은퇴하였다.
주요 경력 ¶
* 1932년 경성촬영소 연구원 1기 첫 입소하여 영화감독 이필우(李弼雨, 1897년 11월 27일 ~ 1978년 10월 20일)· 이명우(李明雨, 1903년 ~ 1959년) 형제의 문하생으로 입문.
* 1934년 경성영화촬영소 영화조감독분과 연구원 1기 입소(이 때 입소 동기로는 경기도 시흥 출신의 어약선(魚躍善, 1914년 9월 6일 ~ 1959년) 등이 있음.).
* 1936년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로 영화감독 및 편집감독 정식 데뷔.
* 1940년 영화 《수업료》로 영화 음향연출가 데뷔.
* 1941년 영화 《집 없는 천사》로 영화 음향감독 겸 영화 동시녹음연출가 데뷔.
* 1946년 김홍(金鴻)의 촉탁을 받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 입직.
* 1947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 직위에서 퇴진.
* 1948년 다큐멘터리 영화 《장추화 무용》으로 영화 현상감독 데뷔.
* 1949년 영화 《나라를 위하여》로 영화 녹음기사 데뷔.
* 1949년 영화 《성벽을 뚫고》로 영화 녹음감독 데뷔.
* 1949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문관에 전격 발탁.
* 1950년 대한민국 육군 중사 임관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정훈부사관 복무(1950년 7월 30일 대한민국 육군 중사 임관).
*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 진급(1952년 8월 21일).
* 1952년 다큐멘터리 영화 《정의의 진격》으로 영화 촬영감독 데뷔.
* 1953년 초대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장(부회장: 임병호).
* 1955년 사진집 《삼한 이남의 산하》를 발표하여 사진 작가로 입문.
* 1956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 예편(1956년 10월 23일).
* 1958년 수필집 《강릉에서 춘천까지 소박한 여행로》를 발표하여 수필가로 등단.
* 1960년 영화 《대지의 어머니》를 감독.
* 1963년 시집 《길섶의 들풀꽃》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
* 1964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극연출가 데뷔.
*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특임교수(1966년 2월).
*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특임교수 직위 퇴임(1966년 8월).
* 1966년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1966년 12월).
* 1968년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 퇴임(1968년 12월).
* 1972년 신민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공보위원(1972년 6월).
* 1973년 신민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공보위원 직위 퇴임(1973년 3월).
* 1973년 대한민국 국군홍보관리소 명예고문위원(1973년 6월).
* 1978년 대한민국 국군홍보관리소 명예고문위원 직위 퇴임(1978년 12월).
* 1934년 경성영화촬영소 영화조감독분과 연구원 1기 입소(이 때 입소 동기로는 경기도 시흥 출신의 어약선(魚躍善, 1914년 9월 6일 ~ 1959년) 등이 있음.).
* 1936년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로 영화감독 및 편집감독 정식 데뷔.
* 1940년 영화 《수업료》로 영화 음향연출가 데뷔.
* 1941년 영화 《집 없는 천사》로 영화 음향감독 겸 영화 동시녹음연출가 데뷔.
* 1946년 김홍(金鴻)의 촉탁을 받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 입직.
* 1947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 직위에서 퇴진.
* 1948년 다큐멘터리 영화 《장추화 무용》으로 영화 현상감독 데뷔.
* 1949년 영화 《나라를 위하여》로 영화 녹음기사 데뷔.
* 1949년 영화 《성벽을 뚫고》로 영화 녹음감독 데뷔.
* 1949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문관에 전격 발탁.
* 1950년 대한민국 육군 중사 임관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정훈부사관 복무(1950년 7월 30일 대한민국 육군 중사 임관).
*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 진급(1952년 8월 21일).
* 1952년 다큐멘터리 영화 《정의의 진격》으로 영화 촬영감독 데뷔.
* 1953년 초대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장(부회장: 임병호).
* 1955년 사진집 《삼한 이남의 산하》를 발표하여 사진 작가로 입문.
* 1956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 예편(1956년 10월 23일).
* 1958년 수필집 《강릉에서 춘천까지 소박한 여행로》를 발표하여 수필가로 등단.
* 1960년 영화 《대지의 어머니》를 감독.
* 1963년 시집 《길섶의 들풀꽃》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
* 1964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극연출가 데뷔.
*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특임교수(1966년 2월).
*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특임교수 직위 퇴임(1966년 8월).
* 1966년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1966년 12월).
* 1968년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 퇴임(1968년 12월).
* 1972년 신민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공보위원(1972년 6월).
* 1973년 신민당 문화예술행정특임공보위원 직위 퇴임(1973년 3월).
* 1973년 대한민국 국군홍보관리소 명예고문위원(1973년 6월).
* 1978년 대한민국 국군홍보관리소 명예고문위원 직위 퇴임(197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