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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생애 ¶
1872년 9월 22일[1]에 경상북도 칠곡군 에서 농민 백낙춘(白樂春)과 고성 이씨(固城李氏)의 딸로 태어났다.[2] 본관은 수원으로[3] 조선시대 사림파로 이이, 성혼의 스승이었던 당대 대유학자 백인걸[4]의 종증조부인 산음 현감을 지낸 백효연의 15대손이며 이천부사[5]와 경상좌수사를 지낸 백수일의 6대손, 그리고 낙안 군수와 내금위장을 지낸 백동신의 현손녀이다. 1살 연상의 고령 박씨 박성빈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8남매를 낳았는데 첫 사내아이는 2살 때 잃었으며, 넷째 사내아이는 13살 때 잃었다. 살아남은 남매는 총 4남 2녀, 그 중에 막내가 바로 박정희다.
남편 박성빈은 조선 말 관직에 올라 효력부위[6]를 지내고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져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은 백남의가 맡았다. 그래서 그렇잖아도 없는 살림에 많은 수의 식구들을 먹여살리느라 상당한 고생을 했다. 그러던 중 46세에 박정희를 임신[7]했다. 힘든 살림에 딸과 같이 임신한 것이 부끄러웠던 백남의는 막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며 낙태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박정희는 태어났다. 이 영향으로 박정희는 미숙아로 태어나 어른이 되고 나서도 체구가 작았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아들 박정희와 함께.
박정희의 수기 <나의 어린시절>에 의하면 구미보통학교 설립 후 처음 3년간은 4년제로 운영하면서 학무관들이 구미면 내의 가정을 방문해 가며 아이들의 취학을 유도했다 하며, 이때 그는 아들 박상희를 이 무렵 학교를 다니게 했다 한다. 참고로 5남 2녀 중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자녀는 박상희, 박정희 단 둘이었다.
1949년 8월 12일, 78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남로당 활동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였는데 사랑하던 애인 이현란이 떠나고, 어머니마저 죽고, 자신은 감옥에 갇힌 뒤 풀려났으나 군대에서 파면당한, 최악의 상황이 연달아 겹친 시기였다. 그래서 이 무렵 박정희는 상당한 우울함을 넘어 폐인이 된 상태였다.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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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력 8월 20일.
- [2] 출처: 수원백씨 족보.
- [3] 수원 백씨 28세 '남(南)O' 항렬로 아이러니하게도 손녀 박근혜의 집권기에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 참석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 농민과 형제 뻘이다.(...)
- [4] 독립운동가 백정기와 백관수, 그리고 국회의원 백남훈, 북한의 경제학자 백남운이 백인걸의 후손이다. 백남의와 먼 친척 뻘. 항렬로는 백관수가 백남의의 할아버지 뻘이고, 백남훈, 백남운이 형제 뻘, 그리고 백정기가 백남의의 조카 뻘이다.
- [5] 伊川, 강원도 이천군이다.
- [6] 오늘날의 육군 중사
- [7] 남편은 나이가 50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