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박재일 (朴宰逸) |
생년월일 | 1975년 12월 19일 (age(1975-12-19)세)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상주시 |
출신학교 | 상산전자고등학교 - 명지대학교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파워 포워드[1], |
신체조건 | 190cm |
프로입단 | 1998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3] |
소속팀 | 대구 동양 오리온스(2000~2005) |
등번호 | 8 |
수상내역 | 2003-04 시즌 3점슛 성공률 1위 (50.0%)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
{{{#FFFF00 2002}}} |
목차
개요 ¶
고교-대학-상무 시절 ¶
초등학교때 높이뛰기 선수였던 박재일은 상주중학교 1학년때 잠깐 농구를 하다 그만두고, 중3때 다시 정식 농구를 시작하게 된다. 아직까지 190cm 초반 선수들이 센터를 보던 시절, 아직 미완의 대기였으나 탄력만은 특출났던 박재일은 이은호와 함께 약팀 상산전자공업고를 1993년 협회장기 4강까지 이끌었고, 진성호 감독이 이끌던 명지대에 진학한다.[4]
명지대 진학후 박재일은 정재헌(193cm), 윤제한(192cm) 등 투지넘치는 단신빅맨들과 함께 로테이션 멤버로 뛰었고, 2학년이던 1995년 윤제한이 부상으로 빠졌던 1995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주전 파워 포워드로 뛰며 승자 준결승에서 우지원-김훈이 이끌던 연세대를 격파하는데 1등 공신이 된다.[5]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명지대는 에이스 가드 조성훈(184cm)과 박재일의 맹활약 속에 실업팀들을 연이어 잡으며 농구대잔치 참가이래 최고 성적인 8강에 오르는 쾌거를 거둔다.
조성훈-정재헌의 졸업 후 다소 부진했던 3학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된 박재일은, 새로부임한 진효준 감독의 지도아래 강력한 수비농구를 펼치던 명지대에서 명실상부한 팀의 에이스 자리에 오른다. 190cm의 다소 작은 신장이지만 수비시엔 고려대 현주엽, 경희대 윤영필 등 상대 엘리트 빅맨들을 마크하였고, 공격에선 3점슛까지 장착, 내외각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포워드로 거듭난 박재일은 일약 졸업반 중 No.1 포워드[6]의 반열까지 오르게 된다. 농구대잔치 직전인 12월에 열린 1997 대학농구연맹전에서 명지대는 강호 중앙대와 고려대를 연파하며 서장훈의 연세대에 이어 준우승[7]을 차지하는데, 특히 박재일은 결선리그 고려대 전에서 경기중 현주엽을 앞에두고 드라이브인 덩크를 터뜨리는가하면, 종료 0.5초를 남기고 1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극적인 버저비터를 넣는등 대활약하였고, KBL 스카우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졸업반 시절의 맹활약 덕분에, 토종 빅맨에 대한 선호도가 유난히 높았던 1998년 제 1회 KBL 신인 드래프트[8]에서 94학번 대학빅맨 4인방[9]에 이어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선발된다. 이 순번은 KBL 레전드인 "총알탄 사나이" 신기성(7순위)이나 명지대 동기인 "모래반지빵야빵야" 표명일(8순위)보다도 높은 순위였다.
대학 최고의 스몰 포워드를 뽑은 대구 동양 박광호 감독은 박재일을 기존의 전희철-김병철과 함께 팀의 코어라 판단하고, 1998-99시즌을 앞두고 이들을 모두 군입대 시키는[10] 모험을 둔다. 그 바람에 박재일의 KBL 데뷔는 2년후로 미뤄지게 되고, 팀의 주축을 전부 군대에 보낸 대구 동양은 모두가 기억하는 1998-99 시즌 32연패를 포함한 3승 42패라는 처참하기 이를데가 없는 프로스포츠 사상 최악의 성적을 달성하게 된다.
아무튼 박재일은 대학 졸업 직후 프로 데뷔도 하지않고 상무에 전격 입대하게 되는데, 1998년 당시 상무의 주축멤버는 다음과 같았다.
- 가드: 김병철(185cm, 대구 동양), 김희선(187cm, 수원 삼성), 김태진(174cm, 창원 LG), 박성배(180cm, 수원 삼성), 김광운(181cm, 대구 동양)
- 포워드: 박재일(190cm, 대구 동양), 김정인(190cm, 부산 기아), 지형근(191cm, 원주 나래)
- 센터: 無
1999년도에 후임으로 드디어 빅맨자원인 장영재(197cm)와 윤제한(192cm) 등[11]을 받게된 박재일은 센터 포지션의 부담에서 벗어나 대학시절과 같이 3-4번을 오가며 맹활약 하였으나 1999-2000 농구대잔치 들어 전력이 한층 더 탄탄해진 대학 강호들[12]에게 연이어 패하며 예선 5위로 탈락하는 부진을 겪는다.
작은 신장으로 대학무대의 2m대 장신들을 막기위해 고군분투했던 박재일은, 잦은 점프 탓인지 대학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이 상무시절 더 나빠지며 재활과 훈련을 반복해야만했고, 이는 제대 후 KBL에 입성한 박재일의 발목을 잡게 된다.
프로 시절 ¶
상무 제대 후 김병철, 김광운과 함께 대구 동양 오리온스로 복귀한 박재일은 전희철의 존재로 인해 드디어 자기 신장에 맞는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뛸수 있었고, KBL 중고신인[13]으로서 팀의 로테이션 멤버 중 가장 많은 시간인 경기당 20분 남짓을 뛰며 8.9득점-2.9리바를 기록, 나름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박재일의 데뷔시즌인 00-01 시즌 오리온스는 고질적인 포인트 가드 부재 문제[14]와 김병철-전희철의 주도권 다툼 등으로 팀 자체가 난파, 화려한 멤버를 가지고도 시즌 꼴찌(9승 36패)라는 결과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최명룡 감독이 시즌 중도에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고 김진 감독대행이 부임하는 결과를 낳는다. 덕분에 박재일의 활약은 "꼴찌팀에서 맹활약하는 루키" 정도로 평가절하되었다.[15]
01-02 시즌 슈퍼루키 김승현이 입단하면서 오리온스는 전 시즌 꼴찌팀이 다음 시즌 우승을 차지하는 극적 반전을 이루게 되지만, 감독이 주전 뺑뺑이로 유명한 김진이었던 탓에[16] 박재일의 출장시간은 경기당 11분정도로 확 줄어들고 만다.
02-03 시즌 전희철이 전주 KCC 이지스로 FA 이적하면서 박재일은 박훈근과 주전 스몰포워드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시즌초에는 주로 박훈근이 선발로 나오고 박재일은 2쿼터부터 나섰는데,[17] 박훈근이 부상을 당하면서 이후 박재일이 주전을 꿰차고 플레이오프까지 맹활약하게 된다. 특히 원주 TG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선 상대팀 에이스 슈터 데이비드 잭슨의 위력에 이지승[18], 위성우 등 전문수비수들이 모두 나가떨어지면서 홈에서 열린 1,2차전을 모두 내주는 위기에 몰렸는데, 김진 감독은 3차전 원정경기부터 박재일을 데이비드 잭슨의 전담 마크맨으로 낙점, 박재일은 기대에 부응하며 잭슨을 철저히 마크하면서 공격에서도 맹활약하며 원정 2연전을 모두 승리, 2승 2패로 균형을 맞춘다. 원주에서 열린 5차전에서의 계시기 중단사건만 아니었다면 박재일은 시리즈 최고의 영웅이 될수도 있었으나, 결국 2승 4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03-04 시즌 박훈근이 FA로 떠나면서 마침내 주전이 된 박재일은 정규리그 53경기에 출전하며 9.2득점 3.6리바 1.1어시 1.1스틸이라는 좋은 기록을 남기고, 특히 시즌 3점 성공률 50.0%(경기당 1.8개 메이드)로 이부문 1위에 오른다. 03-04 시즌은 김승현의 기량이 절정에 오른 시절이라 김승현의 패스를 축으로 김병철-박재일-아티머스 맥클래리-바비 레이저는 그저 달리고 쏘면 되는 속공농구의 정점이었고, 골밑의 상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규리그 3위의 성적을 거둔다.[19] 탄력과 스피드, 정교한 외곽슛에 팀에서 가장 좋은 수비력까지 가진 박재일은 해당 시즌 오리온스에서 기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맹활약을 바탕으로, 03-04 시즌 종료후 FA 자격을 얻은 박재일은 1억 5천만원에 대구 오리온스와 4년 재계약을 맺는다.
재계약 후 첫시즌은 04-05 시즌에도 박재일은 김승현-김병철과 함께 3각편대를 이루며 팀의 주전으로 맹활약하지만, 외국인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탓에 팀은 리그 6위에 그치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단테 존스 열풍의 희생양이 되며 6강에서 힘없이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2005년, 더 이상 코트위 박재일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단신임에도 높은 점프력을 무기로 활약했던 박재일에게 무릎 부상은 선수생명 사망선고나 다름없었고, 2005년 받은 첫 수술이 잘못되면서 2007년까지 총 4차례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다 2007년 대구 오리온스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고 만다. 박재일은 은퇴를 거부하고 2008년 열린 KBL 2군 드래프트에 신청, 원 소속팀이었던 오리온스에 뽑히기도 했으나 결국 재기에는 실패하였고 조용히 은퇴했다.
국내에는 보기 드물었던 단신 덩커로 전병석(연세대-안양 SBS), 석명준(중앙대-인천 전자랜드)과 비교되기도 하나 이들보다 월등한 기량을 가졌던 전천후 스몰 포워드였다. 다만 2000년대 KBL 특성상 스윙맨 자리에는 박재일 스타일의 다재다능한 포워드 보다는 받아먹기 전문 3점슈터의 역할이 더 컸던 터라, 역량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거기에 특유의 점프력이 가져온 무릎부상탓에 정작 KBL에서는 겨우 다섯 시즌밖에 뛰지 못한 채 은퇴하게 되었는데, 운동 능력이 절정이던 20대 초반 상무에 입대한게 결과적으로는 안좋은 선택이 되고 말았다.[20]
커리어 스탯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평균출장시간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 | FG% | 3P% | 팀성적 |
2000-01 | 대구 동양 오리온스 | 41 | 20'42" | 8.9 | 2.3 | 1.0 | 0.6 | 0.2 | 48.9 | 36.4 | 10위 |
2001-02 | 대구 동양 오리온스 | 38 | 11'49" | 4.5 | 1.1 | 0.6 | 0.5 | 0.1 | 47.7 | 31.1 | 우승 |
2002-03 | 대구 동양 오리온스 | 53 | 20'2" | 6.8 | 2.2 | 0.9 | 0.8 | 0.3 | 47.4 | 39.8 | 준우승 |
2003-04 | 대구 오리온스 | 53 | 27'57" | 9.2 | 3.6 | 1.1 | 1.1 | 0.2 | 54.6 | 50.0 | 플레이오프 6강 |
2004-05 | 대구 오리온스 | 53 | 27'12" | 8.0 | 3.2 | 1.1 | 0.6 | 0.5 | 42.2 | 38.1 | 플레이오프 6강 |
은퇴 후 ¶
은퇴후 농구계를 떠나 평범한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동호회 농구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2015년 점프볼(www.jumpball.co.kr) 기사에 최근 근황이 소개되기도 했다.기사 링크
여담 ¶
----
- [1] 명지대 시절
- [2] 상무소속이던 1998 농구대잔치 당시 팀에 장신자원이 없어 190cm의 박재일이 센터를 봐야만 했다.
- [3] 1998-99 시즌에 데뷔한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드래프트 직후 상무에 입대하였다. 김병철, 전희철 등 주축멤버를 모두 입대시킨 뒤 이들이 제대하는 2000-01 시즌 대권을 노리는 것이 당시 박광호 감독의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대구 동양은 1998-99 시즌 32연패라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만다.
- [4] 명지대 동기로 양정고 출신 표명일이 있다.
- [5] 하지만 패자 결승에서 다시 만난 연세대에 패하며 결승 진출엔 실패, 최종 순위 3위를 차지한다.
- [6] 대학 4학년 당시 현주엽은 대부분 빅맨으로 분류되곤 했다.
- [7] 1997년까지 명지대가 모든 대회에서 거두었던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후 명지대는 이원수-김봉수(농구선수)-송창무 시절이던 2005년 종별선수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다.
- [8] 이른바 "현주엽 드래프트"로 불렸다.
- [9] 고려대 현주엽, 경희대 윤영필, 연세대 김택훈, 건국대 변청운
- [10] 김병철, 박재일, 김광운은 상무 입대, 전희철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게 했다.
- [11] 둘다 박재일과 명지대 시절 동문들이다. 장영재는 1년 후배, 윤제한은 1년 선배다.
- [12] 김동우-박광재의 연세대와 낙생고 3인방의 성균관대는 꺾었으나, 김주성-송영진 트윈타워의 중앙대, 이규섭-전형수의 고려대, 양동근-김태완의 한양대에 접전끝에 패했다.
- [13] 데뷔 시즌때 나이가 25세였다. 군필자;;
- [14] 갓 제대한 김광운, 기존의 식스맨 이인규(187cm)-김상우(182cm), 신인 드랲 4순위 출신 이흥배(180cm)까지 써봤으나 실패, 김병철이 1번을 보는 상황까지 갔고 결과는 폭망이었다.
- [15] 개막 11연패를 달리던 대구 동양이 홈에서 이상민-조니 맥도웰 콤비의 대전 현대 걸리버스를 꺾으며 연패를 탈출하던 경기에서, 박재일은 경기 막판 맥도웰 위로 그림같은 드라이브인 덩크를 꽂아넣었다. 그리곤 착지하다 부상;;;;
- [16] 김승현-김병철-전희철-힉스-페리맨의 베스트 5가 너무 탄탄해서, 한 명만 비어도 구멍이 컸다. 이 중 김승현, 힉스, 페리맨의 경기당 출전시간은 각각 38분, 37분, 38분이었다.(NBA가 아니다!!!)
- [17] 02-03 시즌부터 2쿼터에는 외국인선수 1명만 뛸 수 있게 되었다. 이 바람에 각팀 토종 4번들인 송영진(창원 LG), 변청운(여수 코리아텐더), 윤영필(안양 SBS) 등이 조금이나마 기회를 잡으면서 "2쿼터의 사나이"라 불렸다.
- [18] 1997 시즌 수비 5걸
- [19]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 창원 LG 세이커스전에서 바비 레이저의 팁인슛이 실린더룰 위반 판정을 받는 등 또한번 오심의 희생양이 되면서 1승 2패로 어이없이 탈락하고 만다.
- [20] 당시 상무 추일승 감독이 박재일의 무릎을 관리하는데 특별히 신경을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프로팀의 재활시스템 보다는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센터자원이 없는 팀 특성상 박재일에게 마냥 휴식을 줄수도 없는 상황이라 혹사를 피할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