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1917년생)의 친형(11살 차), 김종필(1926년생)의 장인, 그리고 박준홍, 박영옥, 박계옥의 아버지이자 김종필과 박영옥의 아들, 딸인 김진과 김예리 남매에게는 외할아버지,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큰아버지이다.[1] 박성빈에게는 셋째아들이다.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3년 뒤, 막내 동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이후 박상희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이듬해인 1935년에는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일제말기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아,[2] 대구가 좌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던 지역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구미지역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식인,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였다.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반탁운동을 지도하였으나, 박헌영이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고 좌파들이 신탁통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민족주의적 좌파에게는 꽤 흔한 일이었다.[3]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경상북도 일대에 시위가 확산되자, 그는 선산-구미 지역 시위에서 중요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대구를 진압한 뒤 선산으로 진입한 경북도경 - 경기도경 연합부대에게 총을 맞고 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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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나 이들의 경우 박재옥은 박상희가 죽기 전인 9년전인 1937년에 태어났고, 박상희가 10.1 대구폭동 사건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죽었을 당시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였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은 박상희가 사망한 이후인 195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박정희의 자녀 4남매들에게는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 [2] 심지어 대구경찰서장이 "박상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한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 [3] 여담으로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일으킨 기레기는 동아일보 소속인데, 한때 박상희가 몸담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