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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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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width=21.6px   1913년생 기업인 겸 정치인을 제외한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성곤(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width=30 [[쌍용그룹|{{{#796E65 쌍용그룹 회장}}}]]
쌍용그룹 창업 초대 김성곤 2대 김석원
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이름 김성곤(金成坤)
출생 1913년 8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사망 1975년 2월 25일
본관 김해 김씨 삼현파 22세손
가족 부친 김광도br 모친 김봉옥br 배우자 김미희br 슬하 3남 3녀
목차
별일 없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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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발간 '성곡 일화집' 제목[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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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선생 서거특집 모음 (1975. 02)

쌍용그룹의 창업주이자 4, 6, 7, 8대 국회의원이다. 호는 성곡(省谷)이다. 김해 김씨(金海 金氏) 삼현파(三賢派)로 잘 알려져 있다.

일생

출생 ~ 청년기

1913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22년에 현풍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2]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엔 유도 선수로 활동했고 정계에 있을 때 대한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체육인이기도 하다. 그의 호를 딴 '성곡컵 국제유도대회'가 있다.

사업가로서

1940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하였다.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3]하고,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하였다.

정치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황태성과 같이 주요 역할로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다 1958년 달성군에서 자유당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4.19 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종필과는 껄끄러운 사이로 4대 중앙정보부김형욱과 함께 김종필을 견제하였다.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4][5] 이 과정에서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성곤은 학창시절 박정희의 큰형인 박상희와 절친이었기 떄문에, 어린 시절부터 박정희를 보아왔으며 사석에서는 박정희와 자녀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정희는 김성곤한테 정치자금을 모으라고 시켰다.

한편 야당 정치인 중 유진산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정계 은퇴 이후 말년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75년 고려대학교 교우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타계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묘는 원래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군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유족

유족으로는 장남 김석원(전 쌍용그룹 회장), 차남 김석준(쌍용건설 사장), 삼남 김석동(전 쌍용증권 사장)이 있다.

미디어에서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배우 박규채가 김 회장을 연기했다.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 - 당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민주공화당 - 당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민주공화당 - 당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민주공화당 -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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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김성곤이 생전 자주 쓰던 말이다.
  • [2]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 김성곤은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 [3] 보성전문학교 상과 시절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풀을 뽑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국민대에서는 김성곤을 학교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양대 건학 공로자로 기념, 추모하고 있다.
  • [4]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 [5]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