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륵(金玏, 1540년 ~ 1616년)은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예안,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시호는 민절(敏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안집사와 체찰부사로 민심 수습에 기여하였으며, 진주에서 이순신을 만난 뒤 그가 백의 종군할 때 구명 운동을 벌였다. 광해군 때는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추숭을 반대하기도 했다.
당색으로는 동인이고 학맥으로는 이황학파로,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소고 박승임, 금계 황준량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황을 직접 찾아가 직제자가 되기도 했다. 경상북도 영천시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
출생과 가계 ¶
수학 ¶
사마시와 과거 급제 ¶
그러나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과 스승인 퇴계 이황이 연이어 사망, 그는 고향 영주시에 머무르며 퇴계 이황의 위패를 영주시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배향하는 일을 추진하였으며 이후 영천(영주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그는 흑석사(黑石寺)와 소수서원 등에서 수학하다 1576년(선조 9)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오리 이원익, 학봉등이 그의 동방이었다.
1580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다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을 지냈다.
1584년(선조 17) 사헌부지평을 거쳐 그해 8월 2일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하였다. 영월군수로 재직 중 치적을 쌓아 선정비가 세워졌다.<ref>영월군읍지 (1899년)</ref>
1589년(선조 22) 김륵은 내직으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사헌부 집의(~1591년 음력 6월 23일<ref>1616|선조실록 1616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 병진 3번째기사</ref>)를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경상좌도 초유사, 경상우도 관찰사, 이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시절 ¶
1594년(선조 27)에는 사헌부 대사헌·이조 참판·홍문관 부제학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5년(선조 28) 부체찰사(副體察使)에 올라 수원·전주·남원·거창·진주·대구·창녕 등지를 순시하며 군졸들을 위무하고 전황을 살폈다. 이때 한산도와 거제도에 파견되어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약상을 조사, 조정에 보고하고 이들의 전공을 위무하였다. 이후 진주에 가서 이순신을 만나 찾아가 대책과 전략을 상의하고 숨져간 병사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그 뒤 이순신이 투옥됐을때는 유성룡 등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다.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다시 관직에 올라 대사헌으로 시무16조를 올려 민심수습책을 제시한 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전란 종결 이후 ¶
1600년(선조 33)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영천(영주시)으로 물러난 뒤 김륵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밖에 월천 조목을 찾았고, 그 뒤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 모여 강학에 몰두하였다.
그 뒤 다시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고, 호조 참판 및 주역 교정청(周易校正廳)을 거쳐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연경으로 건너가 전란 후유증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고 귀국했다. 안동도호부사로 재직 중,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선조 35) 경상도 변방으로부터 왜의 재침 기미가 있다는 보고가 들려오자, 조정에서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로 보내 청병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재역불가의 5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는 반오조를 들어 설득하니 만력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벼루와 비단 등을 하사하며, 지금 출병은 어렵지만 왜에 대한 경계의 칙지를 내릴 것을 약속받고 되돌아왔다.
광해군 시절 ¶
1608년(선조 41)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이후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에 연루된 동인(東人)들이 정여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들어, 기축옥사때 희생된 동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성균관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는 북인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이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그의 이황, 이언적 문묘 종사를 반대했는데, 북인과 남인간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그는 생모를 왕비로 추증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1611년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 영주시로 물러났다. 1612년(광해군 4)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복관되었다.
사후 ¶
가족 관계 ¶
* 고조부 : 김담(金淡)
* 증조부 : 김만칭(金萬秤)
* 할아버지 : 김우(金佑)
** 양 아버지 : 김사문(金士文, 1502년 6월 27일 ~ 1549년 12월 20일, 그의 백부이기도 했다.)
** 양 어머니 : 인동장씨(1514년 ~ 1597년), 생원 장응신(張應臣)의 딸
** 친 아버지 : 김사명(金士明)
*** 형 : 김욱(金昱)
* 부인 : 인동장씨(1541년 ~ 1586년 6월 27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장순희(張順禧)의 딸
** 장남 : 김기선(金幾善), 찰방
** 차남 : 김지선(金止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사위 : 권래(權來, 안동인, 군자감정)
** 사위 : 이백명(李伯明, 여흥인)
** 사위 : 이유도(李有道, 진성인)
** 사위 : 김시정(金是楨)
* 증조부 : 김만칭(金萬秤)
* 할아버지 : 김우(金佑)
** 양 아버지 : 김사문(金士文, 1502년 6월 27일 ~ 1549년 12월 20일, 그의 백부이기도 했다.)
** 양 어머니 : 인동장씨(1514년 ~ 1597년), 생원 장응신(張應臣)의 딸
** 친 아버지 : 김사명(金士明)
*** 형 : 김욱(金昱)
* 부인 : 인동장씨(1541년 ~ 1586년 6월 27일),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장순희(張順禧)의 딸
** 장남 : 김기선(金幾善), 찰방
** 차남 : 김지선(金止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사위 : 권래(權來, 안동인, 군자감정)
** 사위 : 이백명(李伯明, 여흥인)
** 사위 : 이유도(李有道, 진성인)
** 사위 : 김시정(金是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