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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필성



롯데 자이언츠 No.70
공필성(孔弼聖 / Pill-Sung Kong)
생년월일 1967년 10월 10일
출신지 경상남도 진해구
학력 제황초 - 진해남중 - 마산상고 - 경성대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지명(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0~2000)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02)br롯데 자이언츠 1군 주루코치 (2003)br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04~2011)br롯데 자이언츠 2군 수비코치 (2012)br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13~2014)br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수코치 (2015)br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6~2017)br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17)br두산 베어스 1군 작전주루코치(2018)br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9~)br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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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개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1군 코치이며, 전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1군 수비코치, 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맡은 경력이 있다. 등번호는 롯데 선수 시절엔 0번, 코치 시절에는 70번을 사용했다.

선수시절 주요 포지션은 3루수. 실책을 자주 저지르는 와중에도 엄청 빠른 타구를 가슴이나 얼굴로 막아 내는 근성 수비를 보여 주었다.

선수 시절

마산상고경성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조만간 롯데의 확고부동한 주전 유격수감이라는 큰 기대를 받으며 롯데에 입단했지만 타격도 최악, 수비도 최악.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대형 실책을 저질러 "움직이는 화약고"라는 별명도 붙었다. 과거 파울볼을 잡다가 앞구르기를 두번이나 하면서 공을 놓쳐버린 일화도 있다. 3루수로 전업한 이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아무래도 조급함이 있었던 모양.

결국 3년차부터 주전 유격수는 신인 박계원에게 넘겨주게 되고 3루수로 전업하게 된다. 단 3루수로 전업하고부터는 특유의 근성이 넘치는 파인 플레이를 많이 보여 줘서 움직이는 화약고 이미지는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1992년부터 3루수로 전업해 좋은 활약을 보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롯데는 베스트나인 9명중 5명이 3할타율을 기록하는 공포의 소총부대였는데, 주로 하위타순에 기용되었던 공필성이 .286, 포수 강성우는 무려 .303의 타율[1]을 기록하면서 그야말로 쉬어갈수가 없는 타선을 자랑했다. 수비에서도 수비부담이 줄어든 3루수를 맡으면서 번뜩이는 플레이를 보여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에서 위기 순간에 기록한 동물적인 다이빙캐치는 그야말로 백미.

1994년부터 1995년까지가 커리어 하이. 두 시즌 연속으로 전 경기 출전 기록을 세웠다. 1994년은 시즌 초부터 미친 듯이 맹타를 휘두르고 홈런을 작렬했는데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전반기를 마감할 때까지 당당한 3할 타자였고 올스타에 선발되었다. 커리어 첫 3할 타율을 달성하나 싶었지만 당시 주전선수들의 대거 방위복무로 인해 팀의 뎁스가 크게 얕아져 3루수 외에 유격수까지 병행해서 출전한 탓에 후반기 체력저하로 타율이 많이 떨어졌다. 그 해 성적은 .271 12홈런 57타점.

1995년은 개인 성적은 약간 저하되었으나 역시 전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롯데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한 시즌 최다 사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타격감이 좋지 않을때는 어떻게든 맞아서라도 출루하려 했고 그 근성이야말로 롯데팬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공필성의 선수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키워드였다. 한국시리즈 7차전 첫 타석에서까지 몸쪽 커브를 일부러 사구로 맞고 출루하자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KBS의 유수호 아나운서가 감탄사처럼 내뱉었던 '맞기전문 공필성~!' 은 지금 시대였다면 가히 플짤감이었다.

1996년부터 김용희 감독이 박현승을 주전 3루수로 전업시켜 기용하면서 바로 전 해에 전 경기 출전의 주전에서 한순간에 백업으로 강등되었다. 자존심이 상했을 법도 하지만 묵묵히 백업의 역할을 수행하며 눈에 띄진 않지만 없으면 아쉬운 수준의 활약을 해 줬다. 박현승이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다시 주전을 맡았으며, 특히 1999년은 백업임에도 무려 124경기를 뛰며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박현승이 부상으로 빠졌던 한국시리즈 3,4,5차전 모두 나와 2안타씩 치는 등 팀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소위 "미친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가 결정났던 5차전에서 8회말 3루타를 치고 나가 추가 득점 찬스를 만들었지만, 뒤이은 희생플라이에서 주루사를 범해 롯데에 찬물을 끼얹는 모습을 보여주며 보는 팬들을 벙찌게 만들기도 했다. 바로 다음해인 2000 시즌에 백업으로 112경기를 소화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총평을 하자면 1995년 한 해 동안 스물 두 번이나 공에 맞으며 세웠던 신기록[2] 정도가 자신의 커리어에서 자랑거리가 될까, 통산 0.248에 41홈런, 119실책은 평범한 선에서도 빠지는 기록이다. 그럼에도 그가 선수생활을 10년 정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리몸과는 거리가 멀었고 근성이라 할 정도로 그라운드에선 열정적이었기 때문. 그래서 선수 생활 후반에도 빠진 다른 선수들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꿔주기엔 제격이었다. 물론 박현승이 나오기 전까진 별다른 3루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은퇴하는 2000년까지 열 한 번의 시즌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3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1994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지도 못했고, 반대로 해마다 열 댓 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롯데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인 1992년이나, 1994-1995 시즌엔 공격 면에서 그럭저럭 활약했지만 그 외엔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지도자 시절

롯데 자이언츠 1기

롯데 자이언츠 코치 시절

프랜차이즈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코치로서의 능력은 매우 무능력하다. 롯데의 고질병인 허약한 수비를 개선시키지 못하면서도 물갈이가 되지 않아 철밥통, 꼴무원 등의 별명으로 롯데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그가 수비코치를 맡은 해엔 롯데는 항상 실책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수비 철학이 자신의 선수 시절 스타일과 비슷한 "실책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수비해라"는 것이기 때문. 허나 롯데 경기를 보는 팬들이라면 알지만 그나마 그걸 바람직하게 보여주는 건 박기혁이나 박종윤 정도일 뿐이며 그나마 그들도 그에 맞게 실책은 많은 편이다. 그에 반해 다른 수비코치(주로 박계원, 조원우)가 팀을 맡을 경우, 적어도 실책 1위는 거의 기록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받은 평들이 '불사조 박영태의 뒤를 이은 최고의 철밥통', 'KBO 역대 최악의 수비코치', '그의 업적은 롯데에서 잘린 것이다' 등등 하나같이 조롱과 희화화된 평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본래 내야수였기 때문인지 외야수비를 가르치는덴 아주 젬병이어서[3] 외야수로서 롯데팬에게 충격과 공포의 수비를 선보이고 있던 김주찬, 손아섭이 2011 시즌 조원우 외야전담 수비코치가 부임하자마자 평균 이상의 수비를 보여주면서 더 까이고 있다.[4] 2009시즌 중에는 롯데가 구장이 만원이 된 경기를 많이 패했는데 이를 두고 "선수들이 관중이 많아 부담스럽다." 라고 쉴드를 쳤다가 엄청 까였다. 배은망덕한 X. 8888577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2012시즌에는 2군 수비코치로 물러났으나, 2013시즌 다시 1군 수비코치로 승격하여 롯데 팬들을 충격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해 비록 시범경기이긴 하지만 초반 3경기만에 롯데는 7개의 실책을 저질렀다.

선수 시절과 코치시절의 이미지가 극명하게 바뀐 케이스. 아니, 어쩌면 비슷한지도... 사실 선수 시절도 그렇게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실책이 3루수임에도 유격수보다 많았으며, 3루수 치고 공격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까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수 시절 이미지가 거품인거지

2014년

롯데 프런트정민태박흥식 코치 등 김시진 감독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코치 4명을 2군으로 내리려고 하자 김시진 감독이 반발하며 자진 사퇴하려고 했을 때, 프런트에서 공필성 감독대행 체제로 가려고 했다는 기사가 떴다.관련기사

당연히 팬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며 어이를 상실했고, 최하진 사장과 신동인 구단주 대행이 반려를 먹여 무산시켰다. 그리고 김성근이나 김진욱 데려오자던 팬들은 뒷목을 잡았다고...[5] 하지만 타팀 팬들은 신나서 공감니뮤ㅠㅠ를 외쳤다.

사실, 시즌 초반에는 최소 실책 1위를 기록하며 공필성 재평가 여론이 일기도 하였으나 팀 내부, 외부적인 일과 성적 하락이 겹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실책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여 시즌 마감시 최소실책 5위까지 떨어졌다. 수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 정치질 소문이 돌던 시기와 적절히 맞물리는 건 덤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이 프런트에 대해 반발하는 가운데 대표적인 친프런트 라인 코치로 지적됐다. 그래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선수들이 해도 너무 한다."라는 인터뷰를 하였다.기사1,기사2[6]

결국 시즌 후 감독설에 휘말리며 팬들의 격한 반발을 샀고, 11월 2일 코치직에서 사퇴했다. 팬들은 1군 수비 개선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사퇴 직후 인터뷰

종합

본인은 롯데에 대한 애정도 상당했고 2001년부터 2014년까지 롯데에 오래 있었지만 코치로서 성과가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아니 롯데의 막장수비에 안좋은 의미로 기여를 한 악의 축으로 보는 수준.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오랫동안 코치직에 있었으니 불명예스럽게 퇴진해도 팬들에게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환호가 나왔다.

여담이지만 신임 감독인 이종운이 워낙 거하게 삽질을 하며 백인천급의 암군으로 전락해 버린지라 야구에 만약이란 건 없다지만 그나마 공필성이 감독대행을 했었더라면 이종운보다 나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교 야구

2014년 12월 21일 선린인터넷고의 야수코치로 부임했다.

그러나 공필성 코치를 데리고 온 윤성기 감독이 오자마자 공금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 버렸고, 야구부 전지훈련에서 폭행-성추행 사건이 터지는 등 바람 잘 날 없는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 윤성기 감독이 횡령 혐의로 해임되면서 몇개월 만에 동반 사퇴하고 말았다. 이쯤되면 정말 굿을 해도 모자랄 상황. 이로 인해 선린인터넷고는 안병원 투수코치가 잠깐 감독 대행을 맡았고, 부랴부랴 모교 출신이자 신임 감독으로 데려온 윤석환이 일단 모교의 불을 껐다.

두산 베어스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공감님과 곰감합시다[7][8]
그런데 이번엔 다시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취직하는데 성공했다! 기사 보직은 2군 감독. 송재박은 2군 타격코치로 이동했다.

지난 시즌 강석천에 이어서 공필성까지 무능한 수비코치를 둘씩이나 데려온 것을 보면 대체 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14LG도 양상문강상수라는 두 무능한 인물들의 조합이 의외로 유효했고[9], 이걸 보면 1퍼센트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산은 칰무원 강석천-조경택 조합으로 15시즌 우승했다. 사실 두산은 야구 자체에 있어서는 코치 개인의 역량보다는 팀워크,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팀이기 때문에 코치 한 명의 역량이 약해도 다른 코치들이 메워 주는 경향이 강했다. 조경택은 사실 재활코치라 포수쪽에선 큰 영향이 없었고(강인권김진수가 1-2군을 나눴다.), 강석천은 주루-수비코치로 1군에 계속 있었지만 강동우전형도로 메웠다.

2016 시즌을 37승 8무 51패 승률 0.420으로 북부리그 5위로 마감하였으나, 애초에 2군이 선수를 육성하는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은 성적이다. 특히 등판일지 등을 보면 왜 무능한 코치라고 욕먹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선발 투수의 경우 이닝과 무관하게 70~80개의 공을 던지면 무조건 교체하는 식으로 2군의 역할에 딱맞는 선발진 운용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시절 이대호급의 3루 수비를 보여줬는데도, 롯데에서 13년동안 수비코치를 했던 것 때문에 그가 지도자로서 저평가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2군 감독이기 때문에 나오는 일이 많진 않지만, 베어스포티비에 나오는 걸 보면 선수들도 공필성을 잘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6 올스타 프라이데이 1:26 고봉재, 최용제, 서예일, 김인태를 격려하는 공필성
2017 시범경기 시작 전날 1:42 반갑게 인사하는 황경태, 서예일, 조수행

또한 롯데 시절에는 용마고 인맥으로 코치를 했었던 지라 배로 까였지만, 두산으로 와서는 인맥빨로 코치를 한 것은 아닌지라 그런 것도 한몫했다. 두산은 KBO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워낙 순혈주의가 강성한 팀이고, 육성 시스템 또한 윗선에서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코치가 큰 영향력을 가지는건 힘들다. 하지만 타팀에서 욕을 먹던 강석천, 조경택, 공필성 등이 두산에 와서 나쁜 소리가 없는거 보면 이전 소속팀에서의 악명에 의문이 드는건 사실이다. 비슷한 경우인 강석천은 타격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으나 수비코치로는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 말도 두산에서 수비코치를 맡아 2015 시즌에 우승하면서 쏙 들어갔다. 애초에 코치의 문제가 아닌 선수의 문제일지도.

2017년

하지만 2017년, 그가 수비코치로 1군에 올라오자마자 안그래도 망해있던 두산의 수비가 고쳐질 기세를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그냥 수비코치로서는 적성이 안 맞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고 있다. 어쨌든 매뉴얼대로 일하고 인간관계를 원만히 잘 하면 되는 감독직 특히 2군 감독직에 비해 1군 코치는 기술적인 역량이 좀 더 필요하고 위기가 왔을때 이를 타개할 역량을 기대하기에는 롯데에서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 검증이 심하게 되어있다. 물론 롯데에서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프런트의 정치질에 휘말려 선수단에게 배척받아 발휘할 수 없었고, 외야수비코치가 따로 없었던 팀의 문제점을 추가로 뒤집어쓰는 등 본인도 억울할 만한 구석이 좀 더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이 정말로 유능했다면 지금 정도로 욕먹진 않았을 것이니.

그러나 초반에는 실책 수가 많았지만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두산의 수비는 안정되고 9월 현재 두산의 팀 실책 순위는 8위이다. 시즌을 다 치룬 뒤에는 9위, 즉 최소 2위로 끝냈다. 시즌 초 수비진이 단체로 삽질했던 건 대체적으로 당해 시즌 직전 WBC 때 두산 선수들이 너무 많이 끌려나가는 바람에 주전 선수들이 스프링캠프 기간에 수비 합을 맞춰보지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이유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8년

드디어 몸에 맞는 옷을 찾다.

2018년에는 1군 작전코치를 맡게 되었다.

전임 작전코치였던 전형도가 풍차돌리기로 유명했는데, 3루에서 적절하게 멈춰세울 줄 아는 모습을 보이며 두산팬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더해서 2루타와 3루타의 타구를 잘 구별해서 현재 두산은 팀 리그 3루타가 2위와 약 더블스코어 차이로 1위다. 잠실이 3루타가 많이 나오는 구장이긴 하지만, 같은 구장을 쓰는 LG의 3루타 개수는 5월 30일 현재 두산의 1/3밖에 안 된다.[10] 2루타도 LG와 함께 공동 2위.

이쯤되면 왜 롯데가 이 분을 수비코치로 써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2018년 5월 20일에는 정진호더블주루라는 진기명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6월 19일 김인태의 시즌 첫 홈런때 환호한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롯데 자이언츠 2기

양상문 호의 수석코치로 2018년 11월 14일 낙점되어 5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였다.기사 어차피 2014년에 갈등이 있던 선수들은 모두 나갔고 부족한 모습만 보여준 수비코치가 아니라 감독 밑에서 분위기 잡고 가교역할하는 수석코치이며 두산에서 2군 감독과 주루코치로 평이 좋았던지라 여론이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코어팬들은 별 말이 없거나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고 라이트팬들 사이에서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좀 나오는 편, 일단 수비 관련 보직은 얼씬도 하면 안된다는 점은 코어-라이트 가릴 것 없이 공감을 사고 있다.

트리비아

  • 공필성을 상징하는 등번호는 0번. 선수단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0번이나 3자릿수 등번호도 볼 수 있게 된 2010년대 프로야구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번호이지만 90년대 당시엔 드문 등번호였다. 은퇴 이후 일구회 자선시합에도 이 0번을 달고 나오는 등 0번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수 중 하나. 마침 성이 '공' 씨였기에 그런 점도 있다. 그래서 이름풀이가 "공(0)을 달면 필히 성공할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0번을 달게된 동기는 원래 등번호였던 43번을 뺏기고 나서 달 번호가 없어서. 이유야 어찌 되었건 공필성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리는 등번호였다.
  • 그 유명한 1999 시즌 플레이오프 7차전의 기적도 공필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9회 공필성이 안타로 출루했고, 이후 임수혁이 동점 홈런을 때렸다.
[11]
  •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외모가 매우 잘생긴 선수 중 하나. 나이들며 역변하는 경우도 많은데 공필성의 경우에는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중후한 멋이 생긴 케이스.
  • 2006년 8월 SK 전에서 호세신승현 사이에 벌어진 벤치클리어링에서 호세가 휘두른 주먹에 대신 맞고 떨어져나가 그의 살신성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07년 당시 윤형배 2군 투수코치와 시구-시타로 나섰을 때도 사구를 맞는 황당한 장면을 연출했다.영상(제일 첫 부분) 당시 기사
  • 세 번 나간 한국시리즈에서 총 두 개의 홈런을 때렸는데, 이는 2018년 현재까지도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통산 홈런 1위이다. 여담으로 두 개 친 선수가 공필성 한 명뿐이라 한 개친 델동님도 2위다.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롯데 자이언츠 78 177 .232 41 8 1 1 15 20 6 22 .305 .315
1991 81 158 .215 34 6 1 3 16 20 3 15 .323 .280
1992 100 280 .286 80 17 3 6 40 30 2 28 .432 .347
1993 124 379 .240 91 23br(5위) 3 1 38 36 6 33 .325 .299
1994 126 420 .271 114 23br(8위) 5br(3위) 12 57 55 25br(6위) 58br(7위) .436 .355
1995 126 390 .264 103 14 6br(3위) 4 50 60 22 74br(3위) .362 .378br(8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롯데 자이언츠 114 299 .251 75 18 1 4 34 37 8 31 .358 .315
1997 79 207 .246 51 13 1 1 20 19 9 19 .333 .307
1998 120 364 .245 89 12 2 6 42 42 12 47 .338 .327
1999 124 238 .214 51 13 2 2 21 28 9 27 .311 .292
2000 112 149 .208 31 4 1 1 13 16 4 17 .268 .287
KBO 통산br(11시즌) 1184 3061 .248 760 151 26 41 346 363 106 371 .355 .326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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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규정타석에는 미달이었다. 이 해의 강성우는 사실상 김선일의 백업이었다.
  • [2] 1982년 김인식의 18개 기록을 갈아 치웠다가, 1999년 31개를 맞은 박종호에 의해 깨졌다.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을 하는 버릇 때문에 당시 사구를 가장 많이 맞는 선수였다. 1995년엔 22개의 사구를 맞아 시즌 역대 최다 사구 기록을 경신했을 정도.
  • [3] 그래도 좋은 수비코치들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잘 가르치는 게 보통.
  • [4] 당시 조원우 외야수비코치는 부임하고 보니 외야수들이 글러브도 제대로 길이 안 들어 있었다면서 엄청 황당했다고 한다.
  • [5] 다만, 이 부분은 오히려 동문인 구단주 대행 덕에 목숨을 부지한 김시진이 언플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판단은 알아서. 김시진은 결국 짤리다시피하며 사임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6] 다만 전 운영부장 이문한의 인터뷰에 따르면 공필성도, 권두조도 전부 최하진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 [7] 참고로 저 합성짤의 출처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로 추정 된다.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 낚시용으로 쓰이는 중.
  • [8] width=500원래 짤은 이랬다. 짤 출처는 SK 와이번스 갤러리.
  • [9] 이후 욕 배부르게 먹었지만 2016년 LG의 세대교체와 5강 진입에 성공했다!
  • [10] 7월 22일 기준 26개, 2위는 17개를 기록한 삼성.
  • [11] 이 사진은 1994년 8월 20일 삼성과 롯데의 경기가 벌어진 대구구장 사진기자실에서 훈련을 마친 후 사진기자실 계단에 걸터앉아 햄버거와 콜라로 저녁식사를 때우는 것을 찍은 것이다. 참고로 이 사진에 대해서는 90년대 프로야구의 그늘이 드러나 있는데, 당시 선수들은 아무래도 경기 전이다 보니 위에 부담이 덜 되는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게 좋았지만 그때는 원정팀에 대한 배려가 깊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끼니를 때워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팀의 코칭스텝들이나 몇몇 고참급 선수들은 아예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반대로 홈팀 선수들은 번듯한 샤워실에서 훈련으로 찌든 땀을 깨끗이 씻어낸 후 맛난 호텔식 뷔페로 식사를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다행히 지금은 야구단 환경이 많이 좋아져 제대로 된 식사에 과일과 건강음료까지 챙겨 먹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원정팀에 대한 시설보완에 대해선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 많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