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홍진기

{{인물 정보
| 이름 = 홍진기
| 그림 =
| 출생일 = 1917년 3월 13일
| 출생지 =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 (現 성동구 하왕십리동)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
1986|7|13|1917|3|13}}
| 사망지 =
| 국적 = {{KOR}}
| 별칭 =
| 학력 =
| 경력 = 내무부 장관
| 직업 =
| 병역 =
| 소속 =
| 종교 =
| 배우자 = 김윤남
| 상훈 =
| 웹사이트 =
}}
홍진기(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는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아호는 유민(維民)<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E0064442}}</ref> 배우자는 김윤남(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김신석의 딸)이다.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여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ref>{{서적 인용|url=|제목=한일회담-제1차 회담을 회고하면서|성=유진오|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생애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01146 | 제목=조·중·동이 친일인명사전 때리는 까닭 | 저자=주진우 | 뉴스=시사인 | 날짜=2009-11-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JKi44 | 보존날짜=2014-04-30 }}</ref>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법무부 차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법무부 차관이던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2/12/200802120500004/200802120500004_1.html | 제목=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저자=최운상 | 뉴스=신동아 | 출판사=동아일보 | 날짜=2008-02-01 | 보존url=http://archive.is/DTdrZ | 보존날짜=2016-08-18 }}</ref>

4.19 혁명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사건으로 모는 등 이승만 독재정권 부역 행위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고, 처음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얼마 안 가 석방되었다.

이후 삼성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032237 | 제목=이건희 장인이 '홍찐구'로 조봉받은 사연 | 저자=정은균 | 뉴스=오마이뉴스 | 날짜=2013-08-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k9DGp | 보존날짜=2014-04-30 }}</ref>를 맺게 될 이병철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전주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했던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1973438 | 제목=“독립투쟁이 전설로 묻혀서 되겠나, 그래서 나섰다” | 저자=유인경 | 뉴스=경향신문 | 날짜=2008-08-28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WyYhK | 보존날짜=2014-04-30 }}</ref>에 등재되기도 했다.

가계

{| border="2" cellpadding="4" cellspacing="0" style="margin: 1em 1em 1em 0; background: #f9f9f9; border: 1px #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font-size: 95%;"
!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활동사항
|-
배우자
| 김윤남 1924년 6월 25일 2013년 6월 5일 원불교 원정사
|-
장녀
| 홍라희 1945년 7월 15일 리움 관장
|-
사위
| 이건희 1942년 1월 9일 삼성전자 회장
|-
외손자
| 이재용 1968년 6월 23일 삼성전자 부회장
|-
외손녀
| 이부진 1970년 10월 6일 호텔신라 사장, 삼성애버랜드 사장, 삼성물산 고문
|-
외손녀
| 이서현 1973년 9월 20일 제일모직, 제일기획 부사장,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위원
|-
장남
| 홍석현 1949년 10월 20일 중앙일보 회장
|-
손자
| 홍정도 1977년 11월 11일 JTBC 사장
|-
차남
| 홍석조 1953년 1월 8일 보광훼미리마트 장, 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
손자
| 홍정국 1982년
|-
3남
| 홍석준 1954년 9월 17일 삼성SDI 부사장
|-
4남
| 홍석규 1956년 1월 15일 보광 대표이사
|-
차녀
| 홍라영 1960년 1월 10일 삼성문화재단 상무
|-
사위
| 노철수 1956년 7월 27일 애미커스 회장, 아버지 前 국무총리 노신영
|}

각주

{{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최인규 (1919년)
최인규]]
|후임자 = 허정
|대수 = 5
직책 = [[대한민국의 수석국무위원
수석국무위원]]
|임기 = 1960년 3월 24일 ~ 1960년 4월 24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이병철
|후임자 = 홍석현
|대수 =
|직책 = 제2대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
|임기 = 1980년 7월 ~ 1986년 7월
}}

{{전임후임|
전임자 = [[정재환 (1906년)
정재환]]
|후임자 = 임석무
|대수 = 7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차관
법무부 차관]]
|임기 = 1954년 2월 17일 ~ 1955년 10월 5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민복기
|후임자 = 권성기
|대수 = 2
직책 = [[대한민국 해무청
해무청장]]
|임기 = 1955년 10월 5일 ~ 1958년 2월 2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이호 (1914년)
이호]]
|후임자 = 권승렬
|대수 = 9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임기 = 1958년 2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최인규 (1919년)
최인규]]
|후임자 = 이호
|대수 = 19
직책 = [[대한민국 내무부
내무부 장관]]
|임기 = 1960년 3월 23일 ~ 1960년 4월 24일
}}

{{삼성그룹}}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혁명재판 주요 기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