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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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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춘화(河春花) |
출생 | 1955년 6월 28일 (age(1955-06-28)세) 전라남도 영암군 br 게자리/양띠 |
데뷔 | 1961년 '효녀 심청 되오리다' |
신체 | 162cm, 50kg, A형 |
직업 | 트로트 가수 |
학력 |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br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 전문대학 가정과 (졸업)br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 (학사)br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사)br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
자녀 | 없음 |
본관 | 진양 하씨 |
개요 ¶
슈퍼스타가 된 트로트 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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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7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가수
대한민국의 원로급 가수이다. 1955년 6월 28일생. 하춘화가 대단한 이유는 데뷔년도가 6살 때인 1961년 인지라, 2015년 기준으로 나이는 환갑인데 가수 경력은 55년차라는 점이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그 해이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엘자 렁히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엘자 렁히니와의 차이점은 어른이 되어서 인기가 죽어버린 엘자 렁히니와는 달리 하춘화는 늙어도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던 것이다.
생애 ¶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는데 이 음반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할 때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1].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2]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현재는 '나이야 가라'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
학업 ¶
기록 ¶
- 하춘화는 2011년에는 57살의 나이로 데뷔 50주년을 맞아 '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여 들인 200억 원을 불우 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 2015년 현재 기준으로 하춘화의 총 공연횟수는 8,500회이다.
대표곡 ¶
- 효녀 심청 되오리다 (1961)
- 아빠는 마도로스 (1966)
- 물새 한마리 (1971)
- 잘했군 잘했어 (Duet. 고봉산) (1972)
- 영암 아리랑 (1972)
- 강원도 아리랑 (1972)
- 하동포구 아가씨 (1972)
- 연포 아가씨 (1973)
- 쌓인 정 (1973)
- 알고 계세요 (1973)
- 난생 처음 (1974)
- 약속시간 (1975)
- 우리 사이 (1975)
- 대관령 아리랑 (1976)
- 두줄기 가로수 (1977)
- 당신이 올때까지 (1978)
- 사랑했는데 (1981)
- 그 누가 당신을 (1982)
- 우리사랑 가슴으로 (1983)
- 연인의 부르스 (1984)
- 평양길 육백리 (1985)
- 지금은 타인 (1987)
- 타버린 마음 (1988)
- 가을 바닷가 (1988)
- 날 버린 남자 (1989)
- 당신이 미워라 (1990)
- 사랑은 길어요 (1991)
- 밤이 무서워요 (1991)
- 무죄 (1993)
- 갈테면 가세요 (1995)
- 항구의 여자 (1998)
- 인생 (1998)
- 연하의 남자 (2002)
- 남의 속도 모르면서 (2003)
- 당신쯤이야 (2004)
- 왜 이제 왔어 (2005)
- 사랑은 늘 그래 (2007)
- 하여간 (2008)
- 휘뚜루 마뚜루 (Duet. 이호섭) (2011)
- 나이야 가라 (2014)
기타 ¶
-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하춘화를 구했던 이주일은 오히려 무명일 수 밖에 없던 자신을 거둬들여 고정적으로 일하게 해줬다면서 살아생전 하춘화를 마음 속 깊이 존경했다. 하춘화 역시 이주일을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으며 2002년 이주일이 사망했을 때도 당연히 빈소를 찾았다.
- 학위만 5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가수 중에선 가장 갯수가 많다. 방송통신대학교 시상식에서 시상소감으로 말하길 자매가 넷인데, 다른 자매와 달리 혼자 박사학위 없이 가수로 생활하다보니 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 2016년 1월 8일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했다. 영상
- 개그맨 김영철이 하춘화를 대상으로 한 성대모사로 유명해진 바 있다. 물론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하도 오랫동안 하다 보니 하춘화 본인도 이것에 재미를 들렸는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김영철과 함께 개그를 펼칠 때가 많다.
대인배 인증
- 나이가 든 동시대 연예인들과 달리 젊은 층들의 음악도 듣고 춤도 추는 듯 하다. 한때 예능에서 소녀시대의 춤을 추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