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쟁의 배경-오스만이 무너지지 않아 ¶
전통적인 중세 유럽의 제국 관념에서 '동쪽의 제국'[1]을 차지하던 비잔티움제국은 11세기부터 이어진 튀르크의 지속적 공세앞에 아나톨리아[2] 내륙을 영구상실했고, 그 이후 내륙지방을 지배해온 룸 술탄국의 멸망이후 부상한 오스만의 공세에 아나톨리아 최후의 거점인 니코메디아까지 함락당하며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세까지 비잔티움을 지탱하던 아나톨리아의 풍부한 생산력[3]과 그에 따른 인적 자원을 상실하게 되었고, 반대로 오스만은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은 꾸준히 확장하여 트라키아와 발칸의 패권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오스만은 몇번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으려고 시도해봤지만,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후계자 분쟁으로 오스만이 여러 세력으로 분열하면서 실패하였다. 오스만의 혼란을 앞에 두고 비잔티움은 오스만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하여 오스만 술탄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후 무라트 2세 시기 시행된 공세도 실패했다.
이에 대항해서 비잔티움은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얻으려고 몇번 시도를 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동서대분열의 종결을 선언한 피렌체 공의회다. 그러나 이는 황제와 일부 정치인들, 학자들만 따랐을 뿐 대부분의 비잔틴 사람들에겐 인기가 없었으며, 오히려 이 때문에 정교회를 믿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의 지원만 받기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오스만에 대한 반격도 한편으론 시행되었는데, 헝가리 위주로 시행된 세번의 십자군이 그것이다. 특히 1444년에 마지막 십자군에서 십자군은 카라만의 족장인 이브라힘 베이가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모레아 전제국[4] 친왕 콘스탄티노스[5]와 연합해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체사리니 추기경의 무리한 휴전협정 파기덕에 멋대로 나아갔던 헝가리-폴란드 연합군[6]은 패배. 왕이었던 울라슬로도 전사하면서 참혹하게 끝난다. 홀로남은 콘스탄티노스는 외로이 튀르크의 공세를 헥사밀리온 장벽에서 막았으나 결국 헥사밀리온은 무너지고, 친왕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이후 1448년 섭정 야노슈 후냐디 위주로 헝가리가 왈라키아, 보헤미아, 그외 용병대와 함께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의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와 협업해 오스만과 싸우려하나, 스칸데르베그는 오지못하고, 후냐디의 군대는 궤멸된다.
한편으론, 비잔티움은 황제 요안네스 8세가 죽고,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한다. 그는 모레아의 친왕으로써 모레아를 비잔티움의 봉신인 모레아 전제국으로 일통하고, 바르나 십자군에서 그리스 지방 거의 전체를 일시적으로나마 탈환할 정도로 능력있는 자였으나... 바르나 십자군에 협력한거 때문에 초강대국이었던 오스만의 지도자였던 무라트 2세에게 찍혀서 재혼[7]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관식도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모레아에서 치뤘고 콘스탄티노플에 올때도 카탈루나 배를 빌려타고 온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거기다가 제위과정도 순탄치 않아서, 제위를 노리고 동생 데미트리오스가 반통합파의 지지를 얻고[8]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위를 차지하려하기도 했다. 그에겐 다행히도 이 문제는 태황태후인 엘레나 드라가시가 직접 콘스탄티노스를 황제로 지명해서 끝이 났다.
아무튼, 술탄 무라트 2세도 콘스탄티노스를 새황제로 인정했고 그렇게 동유럽에선 나름대로 평화가 유지된듯 보였다.... 야심가 한 명이 새로 즉위하기전까진 말이다
3. 전쟁의 서막 ¶
1451년 무라트 2세가 죽고 새로이 술탄으로 오른 이는 메흐메트 2세였다. 사실, 그는 1444년에 이미 즉위한바가 있으나 동쪽에서 카라만이 반란을 일으키고, 발칸에선 비잔티움의 사주를 받은 무라트의 동생 오르한이 폭동을 일으키고, 헝가리가 십자군을 선포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자 재상 할랄 파샤의 주도로 무라트 2세가 복위돼 퇴위되버린(..) 굴욕을 간직한 이였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유럽군주들은 그를 애송이취급하면서 무시해버렸고, 이때문에 오스만이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때도 느릿느릿 관망만 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9] 그러나 그는 로저 크롤리의 표현대로 '동방의 알렉산드로스'를 노린 이였고, 이는 말년의 나폴리 침공에서도 잘 드러나는 일면이다. 아무튼, 그의 두번째 즉위당시 아무도 그의 야망을 모르거나 무시했고, 이는 유럽군주들의 가장 큰 실수로 남는다.
메흐메트 2세는 즉위당시엔 무라트 2세처럼 어느정도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처럼 행동했고, 이는 당시 유럽군주들의 긴장을 푸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한편, 메흐메트가 그를 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처럼 애송이로 생각한 카라만의 이브라힘 베이가 게르미얀,아이딘,멘테세의 지도자들과 연합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한 뒤, 그는 예니체리의 봉급 인상문제로 한차례 곤경을 겪는다. 이문제는 봉급을 인상시키는대신 지휘관을 강등하는것으로 끝이 났으나... 이걸로 술탄의 지배력이 어느정도 약화된다. 이틈을 노렸던건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메흐메트에게 사절을 보내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물고 있던 오르한의 생활비를 더욱 지급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추종자를 다시 풀어놓겠다는 사실상의 협박을 하기 이른다.
이건 사실상 술탄의 심기를 대폭 건드는 발언이었고, 여전히 재상이었으며. 무라트 2세부터 지속된 평화주의의 대표적인 자였던 할랄 파샤는 이것때문에 사절 면전앞에서 폭언을 하기에 이른다.
사실 당시 비잔티움의 궁정에는 오스만의 내부사정을 잘알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이러한 요구가 술탄의 화만 돋울거란걸 모르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요구를 한걸까? 아마 재정상의 이유일 가능성이 클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한건 알 수 없다.
4. 전쟁의 시작 ¶
사절의 요구를 들은 메흐메트는 생각해보겠다며 차갑게 대꾸한 이후, 보소포로스 해협의 가장 협소한 지역에 요새를 짓기 시작한다. 이소식을 들은 황제는 경악하면서 사절을 보내 외교적으로 해결을 하려하지만, 술탄은 그들을 쫓아내는것으로 대답을 해줬다. 황제는 그 대응으로 도시내의 튀르크인들을 투옥하는걸로 맞대응했으나, 별 소용없는 행위였고, 결국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당대에 '보코하즈 케센', 그리고 현재는 '루멜리 히사르'라고 불리는 요새가 완공되었고, 이로인해 이곳을 왕래하는 모든 함선들은 요새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는 이곳을 통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 상업국가들에게 큰 위협을 줬는데, 단적인 예로 베네치아인 안토니오 리초가 이끄는 함선이 요새의 검문요구를 무시했다가 포격을 받고 침몰했고, 살아남은 선원과 선장모두 사형을 당했다. [10] 더더욱 급해진 황제는 교회통합을 요청하며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건 겨우 200명정도의 병력뿐이었다.[11] 하기야 소피야 성당에선 교회통합을 선언하는 미사가 열렸지만, 해당 미사는 황제와 그 일부 측근들, 일부 통합파 사제들과 교황청에서 온 주교들 일부만 왔을뿐이었다.
오히려 국가적인 지원보단 개인적인 지원이 더 줄을 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카스티야의 귀족인 톨레도의 돈 프란시스코[12]와 제노바의 군인 주스티니아니 롱고였는데, 특히 주스티니아니는 공성전전문가로 상당히 이름난 군인이었기에 황제가 직접 방어를 성공해낸다면 림노스 섬의 통치권을 나눠준다고 하기도 했다.
4.1. 번외-왜 기독교 국가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돕지 않았을까? ¶
우선 서유럽 국가와 비잔티움 사이에 묵혀뒀던 감정이 4차 십자군때 콘스탄티노플 약탈과 라틴 제국 성립으로 폭발한게 컸다. 이 때문에 정교회를 믿는 제국민들은 서유럽의 가톨릭 교회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내세우는 동서대통합은 종교계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제국에서도 종교적 보수성이 매우 강한 지역[13]이라 반발이 더욱 컸을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동서대통합과 라틴 전례의 도입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정교회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매우 어리석고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로 평가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가 대표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국가 이상으로 높았으며, 통제력이 미약한 세속 국가보다는 종교에 대하여 애착을 강하게 가졌다. 특히 말기의 비잔티움 제국은 이미 모든 면에서 오스만 제국의 간섭을 받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며, 오스만 투르크 영토 한 가운데 고립된 '콘스탄티노플'은 모든 면에서 비잔티움 황제보다 오스만 술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세속국가로서 비잔티움은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약화되었고, 제국은 과거와는 달리 '교회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대통합이 '확실하게' 정교회 전통을 단절시키는 반면 별다른 군사적 보호는 제공하지 않고, 이슬람의 정복은 아직 술탄의 관용에 호소하여 정교회 전통을 유지할 수 있을 가망이 더 크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교황의 삼중관보다 차라리 터키인의 터번을 택하겠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 문제 이외에도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자기들의 이권다툼으로 바빠서 지원을 제대로 해주기 어려웠던 측면도 크다.
예를 들자면 헝가리는 주전파인 섭정 야노슈 후냐디의 영향력이 전술한 코소보에서의 패배로 약해졌고, 왕인 라슬로 5세가 성년이 되어 후냐디의 섭정을 탐탁치 않아 했다는게 문제였다. 거기다가 당시 라슬로 5세는 신성로마제국[14]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위협받고 있었다.
다른 발칸의 정교회 국가인 왈라키아와 세르비아는, 당시 오스만의 봉신이었으며, 봉신으로써 오스만에게 병력을 징집해 보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헝가리의 개입없이는 절대 오스만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또다른 발칸 근처 정교회 국가인 몰도비아는 분열되어있었으며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
앙쥬 백작으로 부터 나폴리 왕국을 정복해[15]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아라곤 왕국은 역시 비잔티움으로부터 도움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들도 초강대국 오스만을 상대로 혼자 나서려 하지는 않았다.
전통적인 중세의 관념에서 '서방제국'을 맡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는 나서기만 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겠으나, 그는 교황으로부터 갈굼을 받고나서야 오스만으로부터 (별의미없는) '최후통첩'을 보낼 정도의 위인이었다. 무엇보다, 전술했듯이 그는 당시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그들 사이에 있던 백년전쟁의 참화를 회복하느라 바빠 도저히 도와줄 상태가 되지 못했고, 이베리아의 강자인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은 레콩키스타 운동을 아직도 완료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강성한 정교회국가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노보고로드 공화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과 싸우느라 바빴고, 타타르의 멍에를 벗은지 얼마안되서 제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과 비잔티움 사이에는 아직 몽골계 칸국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요안네스 8세때 잠시 진행된 동서교회 통합은 상당한 충격이었다[16]는게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제국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국가는 백년전쟁의 틈을 타 저지대를 차지하며 프랑스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부르고뉴 공국이었으나, 그곳의 지배자였던 '선량공'필리프는 아버지인 '대담공'장이 니코폴리스 십자군에 참여해서 어떤 치욕을 봤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제국의 문제에 섣부르게 나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건 본토와 저지대의 영토를 연결하는것과 라인강 인근의 아헨 등의 영토를 확보하는것이었다.
5. 전쟁의 경과 ¶
오스만은 이미 그 전해(1452년) 투라한 베이가 이끄는 부대를 모레아 지방으로 보내 황제의 동생들이 그들의 형을 돕지못하도록 막았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전 진군하면서 비잔티움이 그나마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트라케 연안 도시들을 공격했다. 메셈브리아, 앙키알로스등의 도시는 그나마 즉시 항복해 무사했지만 저항을 시도한 셀림브리아,페림토스등의 도시는 점령당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후 선발대가 4월 2일에 도시 근처에 오게 되고, 이에 황제는 요격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점차 튀르크의 후방부대들이 오기 시작하자, 황제는 병력을 도시안으로 물리고, 해자 위의 다리를 파괴하고 성문을 닫으라 명한다. 그리고 같은 날, 그는 금각만(골든 혼)에 배가 통행하는걸 막기위해 페라 방파제의 탑에서 성채 아래 에우게니오스 탑까지 이어지는 방책을 세우게 됀다.
이후 4월 5일에. 메흐메트 본인을 지휘관으로 하는 투르크 전군이 모두 성벽안으로 도착했다. 그들은 성벽 앞 2.4킬로미터 떨어진곳에 임시막사를 설치했고, 다음날 좀더 바짝 붙인 위치에 최종 위치를 잡는다.
전투가 주로 이루어질거라 예상됬던 곳은 육지 성벽이었는데, 왜냐하면 금각만쪽으로 진입하는건 4차십자군때 베네치아처럼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지 않는 이상은 무리였기때문이다.[17] 그중에서도 리쿠스 계곡을 가로질러 뻗어있는 성벽인 메소테이키온쪽이 가장 취약한 곳이었기에, 황제와 주스티니아니 모두 튀르크 군의 공격이 여기에 집중될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외벽과 내벽중 어느쪽에 방어를 집중할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펼쳐졌는데, 황제와 주스티니아니 모두 1422년에 무라트 2세가 도시를 공격했을때 외벽방어에 집중해 막아낸것처럼 이번에도 외벽에 방어하기로 결정하려 했으나, [18] 스스로를 '전략가'라 자칭했던 교황청의 사절 레오나르도 대주교가 내벽을 방어하라고 우겨 잠깐동안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는 1422년 무라트 2세의 공격으로 인해 수리된 외벽이 제대로 수리되지 않았다면서, 이게 모두 수리비를 두명의 그리스인인 자가루스와 수도사 네이피토스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부당한 주장으로, 자가루스는 마누엘 팔레올로고스가 본명인 황제의 친족으로, 수리된 성벽에 이름까지 적힌, 당시에 굉장히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또다른 횡령범으로 지목된 네오피토스는 통합반대파였다만, 황제와 친한 수도사중 한명으로 공적인 일에 일체관여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던 중이었다. 레오나르도 대주교의 주장은 가톨릭교도들의 전형적인 반통합파와 그리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이후 오스만 전군이 모두 모였던 4월 5일에, 황제는 그의 정예 그리스인 군대와 함께 메소테이키온 성벽에 자리잡았고, 그의 오른쪽에 카리시오스 문과 미리안드리온 성벽엔 주스티니아니가 자리잡았다.[19] 그중 미리안드리온은 제노바에서 그들의 무기와 방어구를 직접 구입해 도달했던 보카아르디 삼형제가 이끌었다. 베네치아 거류민 대표 미노토와 그의 휘하 병사들은 블라케르나에 황궁 구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해자를 비우고 다시 메우는 임무를 맡았고, 역시 베네치아인인 테오도르 카리스토는 칼리가리아 문과 테오도시우스 성벽 사이 성벽 방어를 담당했다. 레오나르도 주교와 제노바에서 온 란가스코 형제는 금각만근처 해자뒤쪽에 자리잡았다. 한편으론 황제의 왼편에는 제노바병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옆에는 황제의 친족인 테오필로스 팔레올로고스가 그리스인 군대와 함께 페가에문을 방어하고 있었다. 황금문은 마누엘이라는 제노바인이 담당했으며, 그의 옆 바다쪽에는 황제가 가장 신뢰하던 군인인 데메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가 자리잡았다.
그외에 후방에는 오르한 왕자가 이끄는 투르크군이 엘레우테리오스 항구에 자리잡았고, 마르마라 해안 동쪽 끝인 히포드롬과 옛 성궁 아래는 카탈루냐 거류민들이 담당했다. 이시도로스 추기경은 200명의 병사와 함께 아크로폴리스[20]곶에 진을 쳤다. 금각만 연안은 베네치아인들과 제노바인 선원들이 베네치아인 가브리엘 트레비사노휘하에서 방비를 맡았으며, 항구의 선박들은 트레비사노의 동포였던 알비소 디에도가 지휘했다. 그외 성벽은 일부 수도사들이 경비를 서다가 위급해지면 지원을 요청했다.
그외에 도시안에도 예비대를 남겨놨는데, 육지성벽 근처 루카스 노티라스 대공이 지휘하는 부대하나와 니케포로스 팔레올로고스가 지휘하는 중앙 산등성이 위에 자리한 부대가 그것이다.
제노바,크레타,앙코나,그리스선박으로 이어진 10척의 선박들은 방재에 이용하기로 합의를 봤는데, 지휘권은 방재구역을 설치한 제노바인 솔리고에게 돌아간것으로 보인다. 이는 방재구역이 제노바인들의 자유도시인 페라와 겹쳤기에 어느정도 이들과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
각부대는 그리스인,제노바인,베네치아인들이 모두 섞여있었는데 이는 황제가 서로 국민감정이 좋지못했던 [21]세 민족을 서로 부대끼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만들생각으로 배치한것으로 보인다.
방어장비는 돌투석기인 망고넬과 창,화살등의 냉병기, 컬버린 포 몇기 정도였다.[22] 그외에 병사들의 무장은 양호한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방어군의 규모는 그리스인 4000명, 그외 외국인 2~3000명정도였는데, 황제가 이걸보고 기겁하여[23] 외부에 공포하진 않았으나, 왠만한 사람들은 수비군이 대강 6,7000명쯤 될거라고 예상했다.
이에 맞서 튀르크군은 자가노스 파샤[24]를 지휘관으로 한 부대를 금각만 근처에 배치했고, 보소포로스 해협건너 언덕에 병력을 산개시켜 페라의 제노바인들이 도시를 돕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성벽 맞은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금각만에서 언덕위에 카리시오스 문까지는 카라쟈 파샤를 지휘관으로 한 유럽 정규군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중포도 상당수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포들은 블라케르나에 성벽에서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이어지는 귀퉁이 공격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리쿠스 계곡 남쪽 경사면에서 마르마라 해안까지는 이샤크 파샤의 지휘하에 아나톨리아 정규군이 저라접었는데, 그는 황제의 신임을 받지못했기에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리스인 배교자 마무드 파샤가 지휘를 맡았다.[25] 술탄은 메소테이키온 성벽 맞은편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았는데, 그의 앞에는 그의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 부대와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의 대포들이 있었다.[26]
7. 영향 ¶
- 사실 이 당시 제국의 본령은 모레아 전제국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콘스탄티노플보다는 모레아의 비중이 더 컷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대도시였지만, 제국의 전체 국력에서 보자면 단지 적진에 포위된 위요지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수도라는 정치적 상징, 총대주교좌가 놓여 있다는 종교적 상징으로서 가치는 모레아 영토와는 비교할 수 없었고, 이 사건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세워졌다.
-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이후 로마제국은 모레아 전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 등으로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갔다. 1461년에 트라페주스가 함락되고 트레비존드 제국이 멸망하면서 완전히 단절된다.
- 그전부터 비잔티움의 그리스학자들이 튀르크의 침입이나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종교적 보수성에 질려 모레아나 이탈리아로 떠난 경우가 많았는데,[27] 이사건으로 인해 이게 본격화되었다.
8. 여담 ¶
오스만 제국에 주변 영토가 포위되어 현실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콘스탄티노플에 집착하는 것은 안 그래도 쇠퇴기에 들어간 제국에 있어서 발목을 크게 잡는 요소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적 가치는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콘스탄틴노플 탈환이라는 공적으로 제국의 복원을 선언했던 팔레올로고스 가문에 있어서는 너무나 큰 것이었고, 이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대외적으로도 곧 제국의 멸망으로 여겨진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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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쪽은 신성로마제국
- [2] 지금의 소아시아반도
- [3] 지금도 터키는 유수한 농업국이다.
- [4] 현재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 [5] 후의 비잔티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 [6] 당시 헝가리와 폴란드는 동군연합이었다.
- [7] 당시 그는 두 번의 결혼을 치뤘으나 두 번 모두 자식이 없었다
- [8] 정작 그는 피렌체 공의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 [9] 사실 실제론 자기들 이권다툼이나 나라 내실다지기가 더중요했던게 크다. 바로옆에서 초거대세력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하던 제국을 무시한 이탈리아 중견국들이야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 [10] 선장은 특별히 말뚝형에 처해졌다.
- [11] 별 수 없는게,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은 제국보다 별볼일 없었다.(....) 차라리 모레아 전제국이 훨씬 더 국력이 탄탄했을거다.
- [12] 자신을 콤네소스 황가의 자손이라 칭하며 황제를 사촌이라 칭하기도 했다. 사실 이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콤네노스가 아닌 팔레올로고스 왕조였고, 오히려 트레비존드 제국이 콤네노스 왕조의 후손이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도 콤네노스 왕조와 인척관계이긴 하지만.
- [13] 모레아 전제국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 [14] 정확히는 오스트리아
- [15] 당시 아라곤 왕 알폰소 6세가 시칠리아 왕을 겸했으므로, 탈환으로 볼 수도 있다.
- [16] 동유럽에서 정교회와 가톨릭의 감정적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예를 들어, 이 무렵 노보고로드는 한자동맹의 독일계 상인들과 교역을 했으나, 이들이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도시 내에 게토를 설치하고 독일계 상인들을 거의 격리수용(…) 하다시피 할 정도로 일반 시민들과 철저하게 분리했다.
- [17] 둘레에 급류가 흘러 상륙용 배를 성벽밑에 대는게 쉽지 않았고 모래톱과 암초또한 있었기 때문.
- [18] 내벽에도 병력을 배치하는게 좋긴 하겠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 [19] 그러나 튀르크의 공격이 메소테이키온에 집중되자, 그의 병력을 이끌고 거기서 황제를 지원했다.
- [20] 아테네에 있는 그곳이 아닌, 다른 아크로폴리스를 말한다. 애초에 콘스탄티노플은 본래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그리스인 거주지였단걸 명심하자
- [21] 라틴인들과 그리스인들의 반목이야 말할것도 없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역시 대대로 앙숙이었던 국가였다.
- [22] 단 초석이 부족해(....)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 [23] 오스만제국군은 도시를 뜷기위해 10만정도의 병력을 끌고 왔다!
- [24] 그리스인 배교자로, 대표적인 주전파였다.
- [25] 그는 특이하게도 앙겔로스가 출신이었다.
- [26] 이 우르반이란 자는 본래 황제에게 고용된 자였는데, 황제가 그의 신작품들을 만들어줄 자금이 충분치 않다는걸 알자, 몰래 도시를 빠져나와 술탄에게 간 자였다.
- [27] 르네상스가 이로인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