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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현(음악인)




陳昌鉉. 재일 한국인 현악기 제작자.



생애

일제강점기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나무를 깎아 고무동력기를 만드는 등 손재주를 발휘했고, 이후 고향에서 약장수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현악기의 매력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소학교 4학년 때 중일전쟁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교사로 부임한 아이카와 키쿠에(相川喜久衛)가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기초적인 바이올린 연주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봤고, 순사가 될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교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학교 과정을 끝마치기 위해 후쿠오카로 건너가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는 고학을 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남아서 계속 육체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이후 요코하마로 옮겨가 인력거를 몰면서 학비를 모아 메이지 대학의 영문과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영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당시 조선인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 때문에 일본에서는 교사로 일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 재학 중에 제로센 설계자였던 이토카와 히데오가 대학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소리에 대해 음향학적으로 고찰하는 강연회에 참석한 뒤, 현악기 제작자로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간 일본 현악기 장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나가노의 기소후쿠시마 쵸에 있던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에서도 입사를 거절당해 근처 공사장에서 채석과 벌목 같은 거친 노동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 와중에 현악기 제작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감별하는 법을 익혔고, 목재를 바이올린 공장에 팔고 공장의 제작 과정을 어깨너머로 봐가면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사장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막일과 바이올린 제작을 병행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도쿄에 가서 악기 매입을 시도했다. 이 때 도호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츠구(篠崎弘嗣)[2]가 어린이 교육용 악기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도호학원을 위해 정기적으로 바이올린 제작과 납품, 수리를 시작했다.

1961년 가을에는 학원과 비교적 가까운 도쿄의 마치다 시로 이사했고, 약 1년 뒤 초후 시의 센가와로 다시 이사해 바이올린 공방을 만들어 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교육용에서 성인용으로 악기 제작 영역을 넓혔고, 바이올린 외에 비올라첼로의 제작도 시작했다. 악기 제작으로 어느 정도 생계 유지가 가능해지자 1970년에는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동생의 명성을 시샘했는지 이복형이 북한공작원이라고 허위 신고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일본 경찰의 신원 보증이 있은 다음에야 풀려나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작 현악기들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악기상들의 관심을 모았고, 1974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진창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76년 12월에는 미국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3]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4]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초후의 센가와 공방에서 현악기 제작을 계속 했고, 2000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의 제작 참고 악기로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바이올린 '광주호'를 시작으로 이듬해 바이올린 '대구호', 비올라 '한라호', 첼로 '백두호'까지 네 점의 악기를 무상 기증하면서 대인배 인증을 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후지 테레비에서 구술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색한 드라마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峡を渡るバイオリン)'이 방영되었고, 여기서 진창현 역을 쿠사나기 츠요시가 맡아 화제가 되었다.[5] 이외에도 2003~06년에는 야마모토 오사무가 일대기를 '천상의 현(天上の弦)'이라는 제목의 만화로 만들어 쇼가쿠칸에서 연재하기도 했다.

80대에 접어들며 아들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뒤에도 계속 공방에서 악기 제작을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2012년 2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투병 중이던 5월 13일에 초후의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수상 경력

  •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 다섯 개 부문 금메달 (1976)
  •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 무감사 제작자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 칭호 (1984)
  • 일본 문화진흥회 국제예술문화상 (1998)
  • 초후 시 시민문화상 (2001)
  • 나가노 현 기소후쿠시마 쵸 명예시민 (2005)
  •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8)

에피소드

  • 스트라디바리우스아마티, 과르네리 등 전설의 명기가 가진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이 악기들을 소유한 수많은 명연주가들이 내일 공연을 했을 때 대기실을 들락거리면서 악기의 본을 뜨거나 직접 켜보거나 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훗날 일본 언론에 연재되었고, 한국에 출간된 구술 자서전 후반에도 나온다.

  • 인력거꾼으로 일할 때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로 주일미군을 고객으로 맞이했고, 덕분에 수입이 꽤 좋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톰(Tom)이라는 이름의 루이지애나 출신 흑인 병사와 친해졌는데, 톰의 소속 부대가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일본을 떠나기 전에 같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미국에서 차별받던 흑인과 일본에서 차별받던 조선인의 심정을 나누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 혼자서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막노동과 바이올린 제작으로 소일하다가 1961년에 일본인 여성 나미코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 진창호와 차남 진창룡은 각각 현악기 제작자와 현악기용 현 제작자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자서전에 의하면 바이올린 제작을 위한 연장들을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전전하다가 가게를 보고 있던 나미코를 처음 만났다고 하며,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처음에는 결혼 승낙을 받기 어려웠지만 예전에 근무했던 건설 회사 사장이 장인에게 사위의 인품을 칭찬해 주면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나미코 부인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때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 식으로 이남이(李南伊)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 일본인임에도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이카와는 교편을 잡으면서 병역을 피할 수 있었지만, 불과 2년 뒤 현역병으로 소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해야 했다고 한다. 이후 편지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창현은 이후 일본에서 현악기 제작자로 성공한 뒤 아이카와의 친족들을 수소문해 만나기도 했고, 죽기 직전까지 사이타마의 혼조 시에 있는 아이카와의 묘지를 정기적으로 찾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후지테레비의 드라마에서도 꽤 비중있는 인물로 나온다.

  • 바이올린 도색에 필요한 염료를 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오징어 먹물이나 지렁이까지 쓰는 등 온갖 실험을 했다. 심지어 집에서 알코올로 염료를 추출하고 니스에 혼합하는 작업을 하다가 니스가 폭발하면서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전공투적군파를 비롯한 극좌 세력의 무장 투쟁이 강성하던 시기여서 의사가 그 쪽 사람이 사제 폭발물을 제조하다가 사고를 친 것으로 여기고는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으로 일본에 건너온 뒤 계속 눌러 살면서 조선적을 고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방문했을 때도 생각치 못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후에도 한국 국적으로든 일본 국적으로든 전환하지 않고 계속 무국적이나 다름없는 조선적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 때 종북주의자 수준으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조선적 소지자이면서도 총련 등 북한계 단체와는 접점이 없이 악기 제작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국적 문제로 말썽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조센징'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여느 교포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차별은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현악기 장인이었음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상훈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인 듯 보인다.

  • 1970년의 한국 방문에서 당한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자서전에도 그 경위를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여동생의 가난했던 삶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충 조사를 마무리지은 뒤 회식비를 자신에게 모두 떠넘겼다거나 1976년에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했을 때 자신이 만든 악기가 위조품으로 간주되어 반입 불가를 당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념적 재단 같은 편파적인 잣대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국민훈장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도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한국 언론들과 자주 인터뷰나 대담 등을 가지기도 했고, 생전에 마지막으로 언론과 접촉한 것도 타계 열흘 전인 5월 3일에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 병상을 찾았을 때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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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확한 날짜 불명
  • [2] 스즈키 신이치와 함께 일본 현악 교육의 거물로 손꼽히는 인물로, 자신의 성을 딴 바이올린 교본도 만든 바 있다. 한국에서도 현악기 초심자들이 흔히 접하는 것이 스즈키 아니면 시노자키 교본.
  • [3]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 [4] 다른 악기 제작자나 감정가의 감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악기를 제작/판매할 수 있는 장인이라는 뜻.
  • [5] 나머지 배역들의 캐스팅도 꽤 주목할 만한데, 진창현의 아내인 나미코 역을 칸노 미호가, 진창현의 어릴 적 멘토였던 아이카와 선생 역을 오다기리 죠가 맡았다.그리고 아버지는 정동환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