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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가수)


뜻1, other1=가수를 제외한 동명이인, rd1=이박사(동명이인))
예명 이박사(李博士 / Epaksa)
본명 이용석
출생일 1954년 10월 5일
출생지 경기도 남양주시
신체 160cm, 55kg

목차

李博士 / Epaksa

개요

"예술을 알면 돈이 멀어지고, 돈을 알면 예술이 멀어져야 돼. 그래야 음악가야."
이박사,몽키 매직 - 스페이스 몽키 (Feat. 윈디 시티) 도입부에서

대한민국 뽕짝의 대표주자

1954년 10월 5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 출생. 본명은 이용석.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과는 상반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가수이다. 젊은 나이와 세련된 편곡으로 어필하고 있는 요즘의 신세대 트로트 가수와는 달리, 다른 장르와의 접합 등으로 '테크뽕'을 만들어낸 선구자이기도 하다.

생애

초등학교 때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5살 때부터 록 음악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경기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1] 유년시절 경기민요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 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 MBC 인간시대에 '신바람 이박사'라는 제목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머리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 또, 이박사의 노래를 틀어놓고 즉석에서 도너츠를 반죽해서 만드는 분의 사연도 소개된 적이 있다. 방송은 이쪽이 먼저.

이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품바 산적 공연단'의 단장과 함께 다닌 모양이다. 이박사가 최근 품바 산적 공연단과 함께 다니는데 단장이 그 소개를 매일 한다.

참고로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기 전에는 양복집을 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고 노래 부르면서 일 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활동

전성기

살충제 광고. 원조 저질 댄스

소니뮤직에서 제작한 포스터

1989년가수데뷔한 그는 신바람 이박사 Vol.1 을 출시한다.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의 여파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며, 그 이후 19개의 앨범을 내고,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으며 고속도로에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

메들리 스타로 인기를 모으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반시장을 가진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굴지의 레이블인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들었던 것. 그는 이박사의 노래에서 ‘대박’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어 음반을 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한국에서 하던 스타일 그대로를 고집했다. 계약이 파기될 뻔했지만 히트 가능성을 강하게 예감한 일본 관계자가 이박사의 손을 들어줬다.

한류(韓流)란 단어도 없던 시절, 현란한 복장을 한 한국인이 나와서 일본의 엔카 비슷한 무언가를 사이키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금세 이박사에게 열광했다. 소니뮤직과 자회사 큔소니 레이블은 발 빠르게 한국어 앨범을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타워, HMV 등 대형 레코드 매장에는 이박사 음반의 판매대가 따로 설치돼 있고 판매량도 일본의 톱가수에 뒤지지 않는다.

오사카 등 간사이 지방에서부터 촉발된 이박사 선풍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그는 인기 TV프로에 잇따라 출연했고 일본 최대의 제약업체인 긴쵸사는 그를 CF모델로 기용했다. 배경음악으로는 ‘강원도 아리랑’ 메들리가 쓰였다. 일본 3대 음악프로그램 중 하나인 후지 TV의 ‘헤이헤이헤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최고의 한류스타 보아보다 5년 먼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다.

일부 열성 팬은 이박사와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국에서 중년층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던 그가 일본에서는 20, 30대 젊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아사히 신문은 4월25일자 석간에서 6단기사로 그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짧은 시간에 젊은이들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박사가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 그리고 1990년 일본 최고의 테크노 그룹인 덴키그루브(DENKI GROOVE)와 함께 만든 「이박사&덴키그루브:열려라 뽕짝」 등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일본의 톱가수들도 서기 어렵다는 도쿄 부도칸 (무도관)에서 데뷔 공연을 벌였다. 부도칸은 일본 가수들에게도 꿈의 무대다. 1996년 이박사는 ‘일본 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박사는 1996년 일본 최고의 명문 도쿄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강의를 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전통 가요는 일본의 엔카에서 비롯됐다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국위 선양이다.

이후 1997년, 일본의 전위예술 그룹인 메이와 덴키(명화전기)와의 공동작업으로 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나는 우주의 판타지)라는 제목부터 우주적인 센스를 가진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국내에서 1집 발매 때 테크노 뮤지션인 가재발의 재편곡으로 스페이스 판타지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외에도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 인디음악이 창궐하던 90년대 후반(98년) 볼빨간이라는 뮤지션이[2] 1집 '지루박 리믹스 쑈' 앨범에서 이 곡의 오마주인 '나는 육체의 환타지'를 발표한 적이 있다.[3]

특히 1996년 전기 그루브와 함께 '이박사 덴키그루브 : 열려라 뽕짝'이라는 앨범을 작업, 크게 히트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테크노씬에 손을 댄 탓에 당시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던 일본식 테크노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일렉씬에서도 많이 알아주는, 어쩐지 평가가 묘하게 엇갈리는 가수.

한국에도 진출해서 소니뮤직을 끼고 앨범 ‘스페이스 환타지’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일본 데뷔앨범 Encyclopedia of Pon-Chak과 구성이 동일한데, 명화전기와 함께 만든 트랙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가재발이 리믹스한 ‘스페이스 환타지’을 추가해서 발표했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고, 김경호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의 인기를 얻었다. 이후 정규 2집 ‘Pak-Sa Revolution and Emotion’을 발표했다. 해당 앨범은 메들리 곡도 있지만 그의 대표곡 ‘학교매점 출출해’ 같은 오리지널 곡도 존재한다.

인생의 굴곡

한국에서 한창 인기있을 때, 집앞의 나무를 다듬다가 다리를 다쳐 몇 년간 활동을 못했다. 2012년MBC 놀러와에도 출연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게다가 그 공백기 동안 사기도 두 번이나 당해 가산까지 모두 사라지고 이혼도 있었다.[4] 결국 이런 인생의 시련들로 인해 마지막 남은 큰아들과 함께 힘든 생활을 지내 왔었다고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 천마산 인근에 거주하고 있으며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링크 날씨가 좋은 날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간지쩌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현재

과거 한국에서는 엽기나 인터넷 열풍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 재평가를 받고 있는 트로트계 아티스트이다. 자세한 사항은 평가 참조.

2010년 8월 4일에는 MBN 뉴스M에 출연하여, 앵커들에게 굴욕을 주기도 했다. 야~ 야야야야! 신나게! 관련 내용

2012년 8월,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했다고 한다.

2012년 8월 23일, 미니앨범 "레알 뽕짝커"를 통해 컴백했다. 아수라발발타, 다른 오빠(feat. 미미시스터즈), 몽키매직 - 스페이스 몽키 (feat. 윈디시티) 세 곡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컴백과 함께 엠넷의 '비틀즈 코드'에 출연했다.


한국 품바 예술협회에 고문으로 가입되어 있다. 링크 (임원소개를 누르고 두번째 페이지를 보면 이박사님의 증명사진을 볼 수 있다!)

2012년, 싸이강남스타일의 열풍에 대해 내 전성기에 유튜브 있었으면 싸이처럼 월드 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5] 다른 가수가 이런 말을 했으면 아무리 인기가 많은 가수라도 '싸이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이냐?'라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박사가 한 이 말에 반문을 던지는 사람은 많이 없다.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싸이보다 더 컸을수도?

2013년 11월 3일 자 도전 1000곡에 출연하였다. 관련 영상

2013년 11월 26일에는 MBC 컬투의 베란다쇼 '싼티의 매력 속으로'편에 출연하였다.

2014년 11월 21일에 홍대 롤링홀 공연 "이박사x이랑"에서 팬클럽 재창단을 선언했다.

2014년 11월 23일 발매된 임창정임박사와 함께 춤을[6] 에 피처링에 참여했다. 여전한 뽕짝끼는 일품. 노래도 좋다.


2017년 11월에 비스츠앤네이티브스소속 DJ 및 프로듀서인 250이 이박사 메들리 오프닝을 샘플링한 Spring이라는 곡을 내놓기도 하였고, 위 영상과 같이 이박사의 인터뷰 영상의 목소리 샘플을 가지고 기가막힌 비트를 창작해냈다.

현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각설이 품바 공연단이랑 매번 같이 다닌다는 점...그래서 고문을

인디레이블 비싼트로피의 오너인 박정근의 조광사진관에서 공연이 열린 적도 있었으며[7] 유튜브 등지에서는 이박사와 유사한 컨셉으로 애니송 등을 커버하는 영상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평가

일본에서의 평과 한국에서의 평이 극명하게 갈린다.

일본에서의 평가

한국에서 온 스타

개그맨 컬투가 언제 이박사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일본에서 그렇게 인기던데, 그 비결이 뭡니까?" 라고 물었더니, 진지하게 "그 비결은…… '아이좋고!'에 있어. 여기에 열광하더라구." 라고 답했다고 한다(…).

장점

일본에서의 평가는 높아서, 후지테레비의 HEY!HEY!HEY!에 2번째로 출연한 외국인 가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그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 일본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는 가수가 이 정도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건 역시 그의 범우주적 센스를 보여주는 듯. 반대로 팝송이나 일본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시키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곡이 빌리지 피플YMCA고다이고Monkey Magic.[8]

가히 한류스타 1세대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국내에서는 보기도 힘든 80년대 테이프나 음원들도 죄다 일본의 코어 팬[9]들이 발굴해서 유튜브 등지에 올릴 정도이니.. 흠좀무. 국내에서 뽕짝 가수라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풍조와 참 대조된다. 유튜브에 음악과 라이브 영상이 업로드되면서 서구권 사람들에게도 컬처쇼크와 재미를 동시에 주고 있다. 하여튼 간에 일본에서 워낙에 인기가 많다보니 처음 일본에 진출했던 90년대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하면 Pon-chak아닌가요."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저 Pon-chak이란 곧 뽕짝을 이른다. 이미 그 당시부터 뽕짝하면 낡은 음악 취급하던 한국의 상황과는 판이하다.

단점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에서의 높은 평가가 꼭 긍정적으로 볼 사항만은 아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2010년대 이후로 이박사가 일본에서 K-POP 날조설 따위의 혐한 아젠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금의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요인에는 사실 현대의 K-POP과 달리 일본인 사상의 기저에 깔린 '일본에 비해 뒤처지는 한국 문화'란 생각에 대치되지 않았다는 부분이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일본에서 K-POP이 인기를 얻은 2010년 전후로 인터넷상, 그 중에서도 옛 엔조이코리아[10]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마토메 사이트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1세대 혐한 네티즌을 중심으로 이박사가 급격히 재조명되어 상당한 푸시를 받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일본 혐한 세력의 빠지지 않는 주제인 '장인 정신의 나라 일본과 달리 베끼기를 숭상하며 장인을 탄압하는 한국, 싸구려 한국 문화' 이미지에는 K-POP과 달리 (그들의 입장에서)오리지날리티가 있고, 그럼에도 한국에서 멸시받으며, 일본 문화에 비해 싸구려 느낌이 강했던 이박사만큼 딱 맞는 재료가 없었기 때문.

실제로 혐한 세력 위주의 사이트인 2ch는 80~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떠받들며, 그 이후 음악들을 '특유의 감각을 가진 한국 팝을 수출용으로 쓰려고 마구 개조하다가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강남스타일에 대해 그딴 헛소리나 하다가 자폭한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당시 일본이 뽕짝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일본은 그 때까지 관심이 없던 한국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의 관점은 독특한 문화를 가진, 한국은 복잡하고 키치적인 나라[11]였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한국의 음악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사실 당시 대중음악의 수준은 한국보다 일본이 몇 수 위였고(당장 핫피 엔도YMO가 후대 일본음악계에 끼친 영향만 봐도 된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출판계와 대중의 입맛에 맞는 것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발굴한 인물이 이박사인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창법에 미니멀한 연주에 동양적인 멜로디를 지닌 이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뭔가 싸구려같지만 새로운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개러지 록이 펑크 록으로 발전하여 미국으로 역수입된 격이랄까? 좀 더 쉽게 얘기하면, 80년대 후반에 테크노 등의 전자음악들이 치고 나오자 이탈로 디스코가 유럽에서 끝물을 뽑고 일본에서 유로비트로 발전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에서의 평가

대부분 한국에서 이박사를 평가하는 시각은 "일본에서는 스타였겠지만 한국에서는 아니다"라며 천박하다고 평가한다.

천편일률적인 뽕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추임새와 곡들로 일본무대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주가를 올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박사'라고 하면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용 음반이나 내는 가치없는 저급 노래꾼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트로트 가수 중 한 사람인 태진아가 과거에 이박사를 가리킬 때 "그는 정통 트롯트 가수가 아닌 광대일 뿐이다" 라고 강도높게 폄하하면서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정작 태진아가 일본에서 듣보잡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뺨치는 일이다.

게다가 몽키매직이나 N.O.와도 같은 원곡이 있는 노래들도 이박사가 부르면 까인다. 그의 음악에서 90년대 중반까지 길에서 흔히 보던 리어카 사운드가 연상되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즉, 레코딩과 음악적 분위기에서 이박사가 어떤 노래를 하건 세간의 시각으로는 저질로 평가받았다. 더욱이 이러한 이유로 2000년대 초반 엽기 열풍이 불 때 까거나 비웃기 위한 용도 또는 개그상황에서의 BGM으로 활용되다 보니 더더욱 '싸구려' 이미지가 굳어진 점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박사의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트로트 엑스의 출연 장면이다. 오래 전에 이박사에게 돌직구를 날렸던 태진아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며, 저 잉간이 왜 여기서 나와? 이박사에 대해 비난조차 하지 않았던 설운도는 싸한 분위기를 아는지 연신 태진아 눈치를 슬슬 본다.

게다가 아무리 방송이라 한들, 다른 까마득한 후배 출연진들 또한 이박사를 가리키며 반말이나 삿대질 등 기본적으로 예의없어 보이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모든 심사위원이 네티즌들의 강도높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박사님께서 가운데서 앉아있는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수준 높게 평론을 잘하는지를 평가하는 자리라 카더라 물론 심사위원들의 태도만 탓할 것이 아니라, 이박사의 음악이나 뽕짝 자체를 저급으로 평가하던 한국의 풍조에도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뚝심있게 자신만의 장르 음악을 한다는 건 무시받기는 커녕 존경받아야 할 진정한 음악인의 자세다.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여 새로운 음악을 일구어낸 뮤지션에 대한 예우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을 볼 수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 발전을 멈추고 그저 그런 양산형 음악만을 쏟아내어왔던 '정통' 트로트 업계에서 이박사를 폄하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현 트로트계에서 가장 젊은 세대인 20~30대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도 기존 트로트에서 박자만 빠르게 바꾸거나 기존 히트곡의 변주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더욱 더 반성해야 할 세태이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이박사의 과거 음반이나 행적들이 발굴되면서 조금씩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에서의 위상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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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 시대의 관광버스에는 리듬박스라는 일종의 드럼머신이 장치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걸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나중에 전자음악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다.
  • [2] 볼빨간사춘기와는 다르다.
  • [3] 사실 이 앨범 거의 전체가 이박사 오마주에 가깝다. 1번 트랙 제목이 '지루박 돌려요! (이박사에게 바침)'
  • [4] 사이가 나빠서 이혼한 거 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생활고로 인한 합의 이혼에 가까웠다고. 지금도 간간히 만나는듯 하다.
  • [5] 사실 펌프 잇 업 때문에 의외로 중남미권에서는 좀 알려진 편이다.
  • [6] 사실 이 노래는 동년 3월에 발매된 임창정의 정규 12집 앨범인 '흔한 노래, 흔한 멜로디...' 에 이미 먼저 수록되어 있던 곡이고 이박사도 이 때 피쳐링에 참여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몇 개월 후 임창정이 낸 싱글앨범 '친한 사람' 에 다시 수록되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 [7] 당시 밤섬해적단권용만이 드럼을 치기도 했다(…).
  • [8] 일본 드라마 버전의 서유기의 주제곡으로 1979년에 발표된 노래.
  • [9] 심지어 혐한으로 유명한 2ch 사람들이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 [10] 한국에서는 네이버 인조이재팬.
  • [11] 일본에서 혐한조차 80년대 전후의 한국 옛 TV CM을 발굴해서 즐겨보는 이유도 이러한 인식에 기반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