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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원

{{인물 정보
|이름 = 정종원
|출생일 = 1896년 5월22일
출생지 = {{국기나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시 남일동
|사망일 = 1977년 3월12일
사망지 = {{국기나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사망원인 = 노환
국적 = {{국기나라
대한민국}}
|학력 = 일본 니혼대학교 법학과 전문부
|직업 = 행장,금융인, 관료
|배우자 = 신양정
|자녀 = 정운철 (장남) <br /> 정운익 (차남)
|주요경력 = 조흥 5대 행장 <br /> 평안남도 성천군수 <br /> 평안남도 순천 군수
|부모 = 정재학
|친척 = (손녀) <br /> 정운용(조카)
}}

정종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12일) 조흥 5대 행장이다.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한아이스하키협회 4대 회장도 역임했다. 1960년 불교단체인 법시사를 창립한뒤 1990년까지 발행된 불교 전문 잡지 법시의 초대 발행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상남북도에서 공직생활을 거쳐 평안남도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 정재학 대구행 - 경상합동행 행장으로 일제하 27년간 행장 직을 유지했다. 또한 그의 조카인 정운용 해방 후 첫 조흥행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생애

1918년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 전문부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식민지 시절 중앙 역할을 했던 조선에 잠시 몸담았다. 당시 그는 가업인 행업을 염두에 두고 성실히 근무했다. 후일 조흥행 임원을 거쳐 행장에 오르게 된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 지인들이었던 동아일보 핵심경영진들과의 인연으로 1920년 4월1일 창간한 동아일보 지령 1호에 창간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지면에는 그의 개명전 이름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

정종원 잠시 부친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관직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41년까지 19년간 경상도 일대와 평안남도에서 경찰 요직을 거쳤다. 이어 1941년부터 1943년까지 평안남도에서 성천군수, 순천군수를 역임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1947년 조흥행 취체역(이사)으로 선임된 뒤 1956년부터 516군사혁명 직전인 1961년 4월말까지 조흥행 행장자리를 지켰다. 정종원 한때 그의 조카인 해방후 첫 조흥행장인 정운용과 함께 부친 정재학의 뒤를 이어 조흥행 대주주의 자리를 유지한 바 있다.

정종원 전 조흥행장 재임시절 국내 아이스하키의 발전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제4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동계스포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행장 퇴임 직후 6개월 동안 록펠러재단의 초대를 받아 미국 유럽 시찰에 나섰다.<ref><<법시 제1호>>,(사단법인 법시사,1967) p.3</ref> 귀국 후 사단법인 법시사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 1977년 3월 12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4</ref>

가족관계

정종원 구한말 경기여고와 서울 사범대 출신의 교사였던 부인 신양정(신양숙)과 슬하에 2남 4녀를 뒀다. 두 사람 다 재혼이고 전 배우자들과의 사이에 자식들이 있다. 신양정 정종원 사후 법시사 이사장과 법시 발행인을 역임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3</ref> 장남 정운철 하와이 최연소 부영사와 일본 고베 총영사를 역임했다. 정운철 두산그룹 박용성과 동서 지간이다. 정운철과 박용성의 장인 삼성물산 대표를 역임한 김선필이다.

막내 정운익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2월 25일 26면</ref>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교우관계

정종원 1914~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송진우(동아일보 3대 사장), 최두선 (8대 국무총리), 장덕수 ( 보성전문 교수, 동아일보 이사), 신익희(독립운동가), 김연수(경성방직 삼양사 사장), 이광수 (소설가) 등과 교류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5</ref> 이 같 인맥을 바탕으로 정종원 동아일보 경상북도 지역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는 정충원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동아일보 1970년 4월1일 13면 창간특집기사 '동아일보 발기인 명단'에 대구지역 발기인 정충원으로 기록됐다.<ref>동아일보 1920년 4월1일 2면 하단 발기인 명부</ref><ref>동아일보 1977년 3월 14일 "본보 창간발기인 정종원 씨 별세 "</ref>

남북이산가족 위기

1945년 815해방 당시 정종원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나 좌익세력 그를 처단하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홀몸으로 밤을 틈타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그러나 부인과 2남 4녀가 남겨졌다.

부인 신양정 감시망을 피해 대동강에서 나룻배를 얻어 서해바다를 거쳐 6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정종원 하마터면 가족을 잃고 이산가족이 될 뻔했던 위기를 천신만고 끝에 넘겼다.

대구로 내려온 그에게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북경찰국장 자리를 권유했으나 부인의 완강한 반대로 공무원 복직을 단념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6</ref>

조흥행 5대 행장

정종원 1947년 조흥행에 입행했다. 윤호병 전 재무부장이 그를 조흥행 취체역(이사) 겸 특수업무부장으로 추천해준 결과다. 그의 조카 정운용 이미 41세였던 1945년 11월 조흥행 2대 행장이자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정종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49년 상무 승진 후 1950년에는 전무 자리에 올랐다. 1956년 10월 23일 드디어 조흥행 5대 행장에 선임됐다. 그가 선임된 해인 1956년 3월3일 개장된 증권거래소에서 조흥 종목번호 '00001'을 부여받으며 대한민국 최고령 기업이자 최초의 상장사가 됐다. 명실 공히 당시 국가를 대표하는 초우량기업이었다.<ref>경향신문 1996년 11월 5일 9면 "상장사 평균 30세 조흥행 최고령-증권거래소 분석 "</ref>

이로써 대구행과 경상합동행에서 27년갖 행장을 역임한 정재학 3남 정종원, 장손 정운용을 조흥행장으로 배출하게 됐다. 3대에 걸쳐 행장을 낸 사례는 정재학 가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대구행과 경상합동행에 대한 정씨 가문의 지분 조흥행 출범 당시 조흥행 주식으로 변경됐다. 정종원과 정운용 조흥행 대주주로 남게 됐다.

조흥 동일 한성의 통합으로 1943년 출범했고 앞서 1941년 경상합동 한성에 흡수 합병된 바 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6</ref><ref>국가문화유산 포털 조흥행 역대행장 사진첩 제1권</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1970) p.684 조흥행 계보도</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대구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

조흥행 경영권 경쟁

대구행 설립자 정재학의 후손인 정종원(3남)과 정운용(맏손자) 1957년 무렵 조흥행의 주도권을 두고 동일행계의 대주주였던 조선황실 외척인 민 씨 가문과 맞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흥 일제 말 동일행과 경상합동행을 흡수한 한성행이 합병해 탄생한 행이다. 따라서 양대 대주주인 경상합동(전 대구)계 정씨 집안과 동일행계 민 씨 집안 가운데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느냐가 관심사였다.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행장으로 봉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 씨 가문 민덕기(조선맥주)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 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 씨가문 조흥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민 씨 가문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 주세체납 등으로 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행장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이병철의 등장

1950년대 중반 정재학 가문과 민영휘 가문의 조흥 최대주주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급부상한다. 이병철 장내 외에서 조흥행 주식을 대량 매수하여 무려 50%를 확보한다. 그뿐 아니라 한일행 80%, 상업행 30% 등 주요 시중행 주식까지 대거 차지했다. 금융계를 독점하려는 재벌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ref>경향신문 1982년 7월 27일 5면 삼성총수 이병철</ref> 기타 행 지분까지 사들이며 이병철 전체 시중행의 주식 50%를 확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정종원 행장 행장 자리를 유지했다.

정종원 이병철마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정계 관계에 인맥이 두터웠다. 게다가 지역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이병철과 달리 정종원 일제 강점기 내내 최고층 재벌2세로 성장한 초상류층이었다. 정종원행장 1920년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총 79명)으로 참여, 언론계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ref>동아일보 1970년 4월1일 13면 전민족세력의 집결 동아일보 발기인</ref>

이병철 정재학의 3남이자 조흥행장인 정종원과 다각도로 교류하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 정씨 가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ref>동아일보 1957년 6월20일 1면 이병철씨 조주 양도 거부</ref><ref>동아일보 1957년 7월21일 3면 행주 불하 경위와 금후 문제점</ref> 이병철 1956~1957년 진행된 귀속주 불하과정에서 민 씨가문과 정씨가문 간 지분경쟁에서 정씨측에 힘을 실어줬다.

이병철 당시 대구에서 서울 장충동1가 110번지 <ref>매일경제 1974년 9월 11일 7면 고액재산세 부과대상자</ref> 로 거처를 옮겼다. 정종원 자택 인근이었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22일 9면 경제인록 22 재벌전횡 부른 귀속주 공매</ref><ref>매일경제 1987년 11월 20일 11면 이병철 그의 생애와 경영반세기</ref> 이웃이 된 이후 정종원과 이병철의 부인들 친분이 두터워졌고 그로 인해 자손들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정종원의 막내사위인 장유상 KDI정책대학원 교수 (전 보스턴대 교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을 맡으면서 삼성의 미국 진출에 기여했다.<ref>매일경제 2011년 1월 16일</ref>

정종원 공교롭게도 1961년 5.16군사혁명 발발 보름 전 4년 반 동안 이어온 행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후 검찰이 추진한 3.15부정선거자금에 대한 특검에서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공소조차 진행되지 못한 채 종결됐다.<ref>경향신문 1961년 3월 5일 3면 특검천하 42일 (3)</ref> 그러나 군사혁명 발발 직후 이병철 부정축재자로 몰려 시중 행 주식을 모두 강제 환수당했다. 이병철 조흥 70%, 한일 60%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ref>경향신문 1961년 10월 15일 1면 대주주소유 오개에 환수통고</ref>

정부가 조흥행 등 시중행의 주식을 모두 거둬들이면서 주요 행의 지배주주는 정부가 차지하게 됐다. 관치금융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부는 1960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금융산업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자금공급 행 자율보다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정종원 행장이 5.16쿠데타 직전 행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부는 행을 정부 경제성장전략의 들러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대출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그렇지 못했다. 시장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ref>경향신문 1965년 3월 11일 시경영태세 대전환 필요</ref><ref>매일경제 1970년 11월 3일 3면 금융 정상화될까</ref><ref>매일경제 1979년 5월 1일 1면 관치에 밀리는 자율화</ref>

한편 박정희 정권 새롭게 지방행들을 설립하면서 이수그룹 창업주인 김준성에게 대구을 맡겼다.<ref>동아일보 1969년 12월 19일 3면 김준성 지방행 붐을 선도</ref> 현 대구 조흥행의 모태를 이룬 정재학의 대구행과는 무관하다. 이름만 되풀이 썼을 뿐이다.

사단법인 법시사(法施社)

조국분단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 60년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발간된 불교 잡지는 '법시(法施)'로서 1967년 9월 법시사에 의해 첫 호를 발간했다.

법시사는 1960년 10월 정종원 전 조흥행장에 의해 발족됐다. 법시사는 '법시(法施)'를 사보형식으로 1967년 8월까지 29호까지 계간지 형태로 펴냈다. 1967년 법시는 잡지윤리강령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보처에 등록한 뒤 사보에서 잡지로 전환한다. 이에 따라 정식 등록한 잡지 '법시' 1호는 1967년 9월 발간됐다.

법시1호에는 미당 서정주 시인이 '무제'란 시를 특별 기고했다.<ref>법시 창간호 p.21 1967년 9월 법시사 간</ref> 법시는 정종원 전 조흥행장이 서거한 뒤에도 정 행장의 부인인 신양정 여사가 이사장을 맡데 이어 정종원 전 조흥행장의 후손에 의해 1990년 6월까지 발간됐다.

법시는 다른 불교전문 잡지들이 사찰 등의 후원을 받아 발행된 데 비해 선종불교에 심취한 정종원 전 조흥행장이 이사장으로서 재정지원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김세련 전 한국행총재, 문종건 전 조흥행도 후원자로 참여했다.<ref>경향신문 1967년 7월 8일 5면</ref> 불교계는 1960년 초부터 불교전문 잡지가 창간됐으나 법시를 1960년대 들어 최초의 발간된 불교잡지로 인정하고 있다. '법시'에 앞서 창간된 잡지들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됐기 때문이다.

'법시' 창간 이후 1968년 11월 '법륜'이 선을 보였고, 1974년 '불광'이 창간된데 이어 1979년에는 '여성불교'가 탄생했다. 불교 잡지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불교계의 미디어는 신문 쪽으로 이동한다. 다양한 불교신문들이 등장하면서 불교잡지들이 설 땅이 좁아지며 1990년대 초반 대부분 정간됐다.<ref>불교전문지 월간 '해인', 1992년 12월 130호 '불교잡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ref><ref>월간 선원 지령 200호 1980~90년대와 2000년대 불교잡지 비교</ref>

각주

{{각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