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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룡(야구선수)

변화가 없습니다



이름 정성룡(鄭成龍 /Sung-Ryong Jung)
생년월일 1964년 5월 19일
출신지 경상북도 포항시
학력 포철공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4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84~1992) br 해태 타이거즈(1993~1995)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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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1번(1984)
박영진(1982~1983) 정성룡(1984) 이해창(1985~198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2번(1985~1986)
정성룡(1985~1986) 손상득(1987~198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4번(1987~1988)
박찬(1982~1985) 정성룡(1987~1988) 이규창(1990~199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1989~1992)
장효조(1983~1988) 정성룡(1989~1992) 양준혁(1993~1998)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1993~1995)
박노준(1992~1993) 정성룡(1993~1995) 장성호(1996)

목차

소개

삼성 라이온즈해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골키퍼 정성룡과 이름이 같다.[1]

선수 시절 유니폼에는 '정성'''용으로 이름이 적혔다.

선수 생활

포철공고 재학 시절 김성범[2], 류명선, 염창무, 정윤수, 최해명 등의 동기들과 팀의 첫 전국대회 진출을 이끌었지만 전국대회에서 준우승만 3번 하는 데 그쳤다. 이들 중 정성룡은 제2의 장효조라 불릴 정도로 타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당시 매서운 타격으로 정평난 포철공고 타선의 선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삼성에 1차 지명되어,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고졸신인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3] 하지만 이미 쟁쟁한 선배들이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결국 백업이나 2군[4]을 전전해야 했다. 장효조가 1989년 롯데로 이적한 후 그의 10번을 물려받을 정도로 여전히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그동안 정성룡은 오랜 2군 생활 속에 제2의 장효조가 아닌 제2의 정동진이라 불릴 정도로 살이 쪘다.

1992년 시즌 종료 뒤 왼손 유망주라면 사족을 못쓰는 코감독에 의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해 해태가 삼성에게 완봉을 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그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기 때문인 것이 유력하다. 즉 그 시즌 홈런 3개중 2개를 코감독 앞에서 그것도 연타석으로 쳤으니 인생경기를 한 셈.[5] 1993~1995년까지 해태의 몇 안되는 좌타자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원조 10번이었던 장효조에 대한 올드 삼빠들의 대한 그리움과 그 이후 10번을 단 양준혁의 인기에 의해 지금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태에서 10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당시 신인이였던 장성호였지만 1년만에 1번으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번을 단 선수가 최훈재 그리고 양준혁.

김응용 감독은 정성룡의 스윙을 보고 "저 스윙으로 3할을 못 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큰 기대를 했으며, 1993년 시즌에는 해태 타선의 몇 안 되는 좌타자로서 원포인트 대타나 지명타자로 쏠쏠한 활약을 하여 해태의 우승에 공헌했다. 이 해 타율은 0.246이고 홈런은 10개. 타율은 별로였지만 전반기에는 규정타석만 채우면 양준혁강기웅 등을 위협할정도로 3할1~2푼 수준을 유지했으나 후반기에서 까먹은 것. 홈런을 심심찮게 터뜨렸으며[6]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한방이 많았다. 프로 데뷔 후 최다 출장인 107경기에 출장했다. 그리하여 당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유력했으나 김기태의 지명도에 밀려[7] 타지 못했다.

고교 시절 그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 본다면 졸업 후 바로 프로 입단한 게 독이 됐다. 만약 류명선이나 정윤수 등의 동기들처럼 대학에 진학했었더라면 1980년대 말 삼성 외야진이 세대 교체를 할 즈음에 입단해, 입단하자 마자 많은 기회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당시 정성룡과 같이 포철공고의 타선을 이끌었던 김성범과 염창무는 아예 프로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국가대표 골키퍼를 지낸 동명의 축구선수에 지명도가 가려지고, 간혹 언급될 때에도 고향팀이자 처음 입단한 삼성 선수보다는 유독 해태 선수로 언급되는 일이 많다. 이래저래 비운의 선수였던 셈. 그나마 해태 시절에 우승을 한번 해본 건 다행.

은퇴 후

모교 포철공고에서 감독으로 있었고, 2004년 10월부터 1년간 강릉고 감독을 맡았다.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84삼성 라이온즈 21 33 .273 9 0 0 0 2 3 0
1985 군복무
1986 58 84 .226 19 2 0 0 8 11 1
1987 8 18 .222 4 1 1 0 2 0 0
1988 23 43 .116 5 0 0 0 0 2 0
1989 44 91 .220 20 6 0 1 10 9 2
1990 33 64 .219 14 2 0 3 9 11 1
1991 77 132 .295 39 8 0 5 12 22 2
1992 63 104 .192 20 2 0 3 15 9 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3해태 타이거즈 107 248 .246 61 15 0 10 43 35 2
1994 80 183 .208 38 10 0 5 23 15 1
1995 14 15 .133 2 0 0 0 1 0 0
통산 528 1015 .228 231 46 1 27 125 1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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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한자까지 똑같다., 심지어 출신고교도 같다!
  • [2] 1982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 [3] 다른 두 명은 해태의 문희수와 롯데의 조용호. 84년 이들이 지명되기 전까지 신인드래프트에서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지명되지 않았다.
  • [4] 당시 2군 리그가 있기 전이었지만 삼성에서는 이미 2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 [5] 다음 해에 김성래와 양준혁이 괴물활약을 한 것을 보면.. 프로생활을 3년이나 연장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도 꼈으니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 [6] 1993년이 126경기 체제에서는 가장 적은 18명의 두자릿수 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 [7] 팀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김기태 본인의 성적이 별로였던 점을 감안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