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역대 등번호 /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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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성구회}}} | |||
회원번호 | 기록 | 가입년도 | 비고 |
3 | 2,018 안타 | 2008년 | 최초 창립멤버 3인 |
NC 다이노스 No.72 | |
전준호(田埈昊 / Jeon Jun-Ho) | |
생년월일 | 1969년 2월 15일 (age(1969-02-15)세) |
출신지 | 경상남도 마산합포구 |
학력 | 마산상남초 - 마산동중 - 마산고 - 영남대 |
포지션 | 중견수[1] 좌익수[2]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91년 신인드래프트 2차 2라운드 전체 11번 롯데)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 (1991~1996)br현대 유니콘스 (1997~2007)br히어로즈 (2008~2009) |
지도자 |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 (2010)br투손 파드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11)brNC 다이노스 주루코치 (2011~2012) br NC 다이노스 1군 주루코치 (2013~2018.7.13)br고양 다이노스 주루코치 (2018.7.13~9.19)brNC 다이노스 1군 주루코치 (2019~) |
종교 | 개신교 |
위대한 도루왕이 있었다.
도루는 발로 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소개 ¶
선수 경력 ¶
롯데 자이언츠 시절 ¶
첫 해 1991년 데뷔를 했다. 0.263 2 홈런 18도루를 기록했다. 당시 팀에서 신인 선수 중 유일하게 타자로 지명 받았는데 당시 시절로 가면 괜찮은 성적이였다. 당시 롯데의 지명은 박정태, 김종석과 함께 3명이 입단 하고 나머지는 패스 즉 포기를 했다..
이듬해 폭발을 했다. 1992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우승 당시[3]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과 함께 남두오성 중 톱타자로 활약하였으며, 당해년도 골든글러브에 후보에 오르지만 안타깝게 선배 김응국이 받아가고 나머지 자리에 이순철, 이정훈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받아갔다. 1번타자와 2번타자 사이에 오가는 테이블 세터로 0.300의 타율과 최다안타 140개[4], 득점,도루(3위)에 오르면서 일약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전설들이 데뷔하는 시기엔 시즌 최다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이 시즌 기록한 75개의 도루는 역대 한 시즌 최다 외야수 기록이다. 두번째는 69개[5]. 3번째는 이에 근접하는게 하위버전 이대형의 60개. 물론 1위는 이종범의 84개다.[6]
그렇게 2번의 도루왕(93,95시즌)을 차지하지만 94년 방위 복무를 하면서 주로 홈경기에 전념하게 되었다.[7]
1995년도에 다시 한번 롯데에서 마지막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8] 3할 이상의 타율과 69개의 도루로 두번째 골든글러브를 받고 팀이 준우승을 했다. 1995년도는 또 부산의 관중 열기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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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9] 1997년 개막전을 불과 4일 앞둔 시점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5억에 현금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롯데에서의 선수생활을 허무하게 마감했다.[10] 그리고 전준호가 떠난 후 롯데는 8년간 6번 8위 현대는 8년간 4번 우승에 6회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록한다. 야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행여나 전준호가 롯데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못한 리드오프의 부재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면 롯데의 성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많은 롯데 골수팬들이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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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9] 1997년 개막전을 불과 4일 앞둔 시점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5억에 현금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롯데에서의 선수생활을 허무하게 마감했다.[10] 그리고 전준호가 떠난 후 롯데는 8년간 6번 8위 현대는 8년간 4번 우승에 6회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록한다. 야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행여나 전준호가 롯데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못한 리드오프의 부재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면 롯데의 성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많은 롯데 골수팬들이 아쉬워한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 ¶
현대 유니콘스 시절 |
현대는 창단 첫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태평양처럼 말만 투수왕국이였지 타자는 박재홍, 김경기, 이숭용, 박진만을 빼면 전체적으로 전력이 상위권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왼손타자도 당시 이숭용, 장정석[11] 빼고 칠 사람도[12]없었고 발도 박재홍 빼면 박진만/김인호가 있었으나 박진만은 유격수라서 도루를 계속하기엔 무리가 따랐고 김인호는 도루는 할 수 있었어도 정작 출루를 못하다보니 나름 테이블 세터가 아닌 테이블 쉼터가 되었다. 게다가 전준호 또한 트레이드 파동 때문에 0.247의 타율을 기록하며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렇게나 허약한 타선 덕에 현대 유니콘스는 그 해 좋은 투수력에도 불구하고 6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13]
절치부심하여 겨울 혹독한 훈련을 한 전준호는 정규시즌과 현대의 첫 우승에 일조를 했다. 같은해 같은 좌타자 김광림이 방출을 당하는 바람에 다음년도 현대는 왼손잡이 갈등이 시작이 된다. 3할 타율에 복귀하고 자신의 최다 홈런 기록이던 5개와 또 다시 타이를 만들었다. 도루 35개와 출루율 4위 최다안타 5위,3루타 6위를 하는 성적으로 본인에게 있어서 선수생활 마지막 3번째 골든글러브를 획득한다.
이후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톱타자로 맹활약하며 현대 유니콘스 왕조시대를 이끌었다. 99년도, 2000년도, 그리고 2003년도, 2005년도 까지는 성적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팀에서 평균성적이였다.[14] 2001년, 2002년 또 다시 3할 타율에 복귀. 2003 시즌에는 박재홍의 KIA 타이거즈 트레이드로 한참을 뛰던 좌익수에서 다시 센터자리인 중견수로 바꿨다.[15] 2004년 한국시리즈에는 사상 최초로 홈스틸을 하고 최고령 도루왕타이틀을 차지한다.
히어로즈 시절 ¶
마지막 유니폼을 입던 히어로즈 당시 |
통산 550 도루를 달성했을 때 |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돈이 없어 망하기 직전에 이장석이 현대의 선수들을 인수해 갔는데 구단의 재정적 이유로 고액 연봉 선수들의 연봉을 대폭 삭감한다는 정책아래 당시 2억 5천만원이던 연봉이 2008년 7천만원으로 72% 삭감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새 시즌이지만 시즌 초기 팀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타 팀들과 비교해서 제대로된 훈련을 못하고 전지훈련 또한 제주도에서 하는 바람에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올림픽 직후 타율 .310을 기록하며 이택근과 함께 팀내 유일하게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가 되며 부활했다. 그 해 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통산 2000안타, 10번째 통산 2500루타,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통산 2000경기 출장, 통산 100호 3루타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9 시즌 초에는 손가락이 부러저 이탈하다가 시즌 막판이 되어서야 올라왔는데 하필 그게...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1경기 출장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든 550개 도루를 만들었고 현재 KBO에서 통산 1위 기록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준호는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팀에서 방출을 당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새로운 팀이 애초에 돈이 없었던게 원인이고 2차원인은 팀내 억대 연봉 중에서 김동수/송지만/김수경 같은 노장들이 몸값이 높았다고 한다. 근데 정작 전년도 FA 정성훈만 FA 있다고 1억원 올려준거 빼고는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이 방출은 전준호 본인에게 다른 팀에게 갈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일단 팀에서 풀어준 것이며, 팀을 못 찾았을 경우에는 미국에 코치 연수를 보내주고, 나중에라도 은퇴식을 치뤄 줄 예정이었다고 한다.]
쓸쓸한 은퇴 ¶
결국 다른 팀으로 가지 않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은 28년 한국프로야구 역사는 물론 19세기 말 야구가 들어온 이래 팬들이 직접 은퇴식을 열어 준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히어로즈에서 방출된 후 2009년 11월 29일, 서울 양천구 목동 KT 체임버 홀에서 열렸으며, 참석인원은 참석자의 짐작으로 300명 가량 된 듯하다. 장소가 참 의미심장하다...[16]
선수시절 총평 ¶
1991 시즌부터 2009 시즌까지 모두 19시즌(!)이나 뛰었으며, 통산 타율 0.291, 2,018안타, 42홈런, 577타점, 550도루[18], OPS 0.745를 기록. 3루타 통산 100개로 이 부문 1위 기록도 가지고 있다. 2위가 61개인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깨지기는 쉽지 않은 기록. 또한 롯데 시절 활약이 워낙 인상에 깊어서 그렇지 결과적으로는 현대에서 가장 오래 뛰었고, 현대를 거쳐간 선수들 중 이숭용에 이어 현대 재적기간 2위에 랭크되어있다. 참고로 3위는 김수경.
그리고 KBO 역사상 양준혁에 이어 2,000안타를 2번째로 달성한 선수이자, 2,000경기 출전 & 2,000안타를 최초로 달성하였으며, 단일 시즌 최다 도루 2위[19], 그리고 3차례의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20]. 통산 득점도 1,171점으로 양준혁, 이승엽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있다. 이쯤되면 양준혁, 송진우 등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릴만하다.
특히 대도라고 불릴 정도로 도루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선수. 이종범과 비교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종범은 전성기 시절 도루를 확실히 점수로 연결하여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선수였다. 그래서 이종범은 매해 wSB가 높았는데 역대 1~5위를 거의 혼자 독식하는 수준. 반면 전준호는 이종범처럼 도루로 경기를 뒤집는 타입은 아니였지만 꾸준한 적립으로 통산 도루 기록을 쌓은 케이스다. 실제로 도루왕을 3차례밖에 하지못했고, 역대 매년 wSB 세이버수치를 찾아보면 그렇게 특출난 편은 아니다. 도루성공률 역시 통산 71.7%로 나쁘진 않지만 도루계를 양분하던 이종범의 81.9%에는 상당히 뒤쳐지는 편이다.
지도자 경력 ¶
2012 시즌 ~ 2017 시즌 ¶
NC의 1군 첫 시즌인 2013 시즌에는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그저 그런 2군 외야수였던 김종호를 이적 첫 해 주전 1번 타자 및 50도루 & 도루왕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팬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에도 그의 지도 덕분에 박민우, 나성범, 에릭 테임즈 등 많은 선수들이 도루에서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2015 시즌에는 팀 200도루 기록, 테임즈의 40-40클럽 가입 등 많은 기록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루코치 전준호의 평가는 더욱 상승하고 있다. 왕년의 남두오성 중 지도자로서도 긍정적인 평을 듣고있는 유일한 인물.
2016 시즌까지는 1루 주루코치를 맡았으나 2017 시즌 김평호 코치가 오게 되면서 3루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5월 20일 코치진이 개편됨에 따라 다시 1루로 복귀했다.
2018 시즌 ¶
2018년에도 변함없이 1군에서 1루 주루코치를 맡고 있었으나 전반기 일정을 마친 7월 13일에 갑자기 2군 주루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단 관계자는 "퓨처스리그에 기본기를 배워야 할 유망주가 많다. 전 코치가 유망주들의 주루 능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보직 이동을 결정했다"라고 말했지만 기사가 나오기 전부터 전준호 코치가 프런트의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항명을 하다가 2군으로 좌천되었다는 설이 팬덤에서 돌았기 때문에 프런트의 이 조치에 대해 NC 팬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황순현 사장 - 배석현 경영본부장의 경영 방식이 논란이 되고 있는 중인데 팬들이나 선수단에게 신망이 두터운 전코치를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면 큰 파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7월 16일자 경남신문 기사에서 유영준 감독 대행의 "2군 선수들의 주루 플레이나 작전 수행 능력 등을 담당할 적임자가 없어 전 코치가 맡게 됐다."는 발언과 함께 최근 잦은 주루사와 감독·코치 간 사인 미스 등과 관련해 전 코치에 대한 내부 평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사실 고양 다이노스에서는 마땅한 주루코치가 없어 다른 코치들이 돌아가면서 주루코치를 봐야할 수준이기 때문에 유대행의 말처럼 2군에서 전문 주루코치의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1군 주루 문제를 전코치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경기를 지켜보는 NC 팬들은 3루 주루코치인 진종길 코치 쪽에 더욱 불만을 가지고 있다. 설사 기사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먼저 새어나왔다는 점에서 깨끗한 일처리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NC 팬덤에서는 최근 프런트가 지속적으로 이어온 만행을 모두 고발하는 시위까지 준비하고 있다.
7월 18일자 경남도민일보를 통해 전준호 코치는 구단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감독 사인을 이행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주루 등을 판단했다는 소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구단에서는 최근 주루사나 사인 미스 등으로 전 코치에게 주의를 줬다고 설명했지만 팬들은 이 같은 설명에 전혀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다.
7월 21일에는 이전부터 있어온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이번 전준호 코치에 대한 프런트의 조치 등에 항의하고자 NC 다이노스 팬 단체가 프런트 수뇌부의 퇴진을 주장하는 집회와 피켓 시위를 열었다. 당일 구단 측의 제안으로 간담회가 열렸고, 간담회에서 나온 제안을 받아들여 다음날인 22일 전광판을 통해 사과문을 띠웠다. 사과문을 발표한 후 23일에는 다시 전준호 코치의 2군 강등에 대한 이유가 나왔는데, 차기 감독을 노리고 여러 ‘정치’적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구단 관계자는 "본인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정황이 있었고 묵과할 수 없었다."라는 강경한 발언까지 했다. 이후에는 오히려 구단에서 포장을 좀 해준 것임에도 공연히 팬들이 전 코치의 이름을 내세우는 바람에 그의 과오가 드러나게 됐다는 기사까지 등장. 그러나 24일 엠스플 뉴스에서는 전 코치의 2군행에 대한 사유가 3번이나 바뀌었다는 점이나 전 코치의 정치질에 대한 근거가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전 코치의 입장을 변론했다. 물론 전준호 코치도 일련의 사태에 대해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
2019 시즌 ¶
이후 황순현 대표와의 만남을 통해 어느 정도 오해를 푼 것으로 보이며, 시즌 종료 이후에도 팀에 남아 코치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것임을 시사했다. 그리고 2018년 11월 23일 코치진 보직이 확정되면서 다시 1군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
트리비아 ¶
- 2000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되기 시작할 무렵 전준호가 선수협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당시 선수협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던 현대가 친구단파인 김경기를 통해 이를 저지하면서 둘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전지훈련지에서 둘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 아무래도 김경기 쪽이 체구가 좋다 보니, 상처를 많이 입은 쪽은 전준호. 갈비뼈와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준호의 성적을 보면 2000년도 출장경기수가 유독 적다. 김경기는 그후 이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진 상태에서 신생구단인 SK로 자리를 옮겼고, 그 곳에서 은퇴 후 코치가 됐다. 공교롭게도 전준호도 은퇴 후 SK로 가서 코치가 된 걸 보면 서로 화해한 듯.
- 현대 시절에는 연봉협상에 별 잡음없이 계약을 했는데 향간에 떠도는 말은 롯데는 연봉 때문에 선수 버린다 라고 했던 말을 일깨워준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역대최초 7관왕 했음에도 불구하고 돈 몇푼 못주겠다고 내친 어느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이분.[24] 여튼 FA계약도 현대가 별 싸움없이 고려하면서 잡았는데 전준호 역시 현대에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고.
-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의 홈 구장인 사직구장에서 상당히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개인통산 2000안타를 쳤을 때 역시 원정 팀이자 고향팀인 롯데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25]
- 2009년 초에 송진우, 양준혁과 함께 한국판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인 성구회를 창립하였다.
- 참고로 마구마구에서는 롯데나 현대가 아닌 넥센 히어로즈의 레전드 카드로 나왔는데, 이는 마구마구 레전드 카드 생성 초기에 레전드 카드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을 당시 애니파크 측의 실수로 애니파크 측도 이를 인정했다. 듀얼 레전드 시스템이 도입된 지금은 롯데, 현대, 히어로즈 이 3가지의 레전드가 모두 업데이트된 상황.[26][27] 04년도 레어 카드와 같이 외야 송구 시 딜레이를 줄여주는 퀵스로잉이라는 사기급 잠재력이 띄우기 쉬운 1슬롯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좌익수/중견수 듀얼포지션이 가능해 모두의 준호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여러 세트덱의 타자용병으로 애용되고 있다.
연도별 성적 ¶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1 | 롯데 | 122 | 372 | .263 | 98 | 13 | 6 | 2 | 48 | 66 | 18 | 60 | .347 | .360 |
1992 | 120 | 466 | .300 | 140br(3위) | 17 | 9br(3위) | 5 | 49 | 90br(5위) | 33br(3위) | 58 | .408 | .376 | |
1993 | 120 | 393 | .282 | 111 | 3 | 7br(3위) | 1 | 31 | 63br(5위) | 75br(1위) | 52 | .333 | .363 | |
1994 | 79 | 281 | .288 | 81 | 5 | 2 | 2 | 25 | 47 | 25 | 33 | .349 | .361 | |
1995 | 124 | 458 | .308br(5위) | 141br(3위) | 13 | 12br(1위) | 1 | 42 | 93br(1위) | 69br(1위) | 68 | .395 | .393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6 | 롯데 | 103 | 324 | .272 | 88 | 12 | 9br(1위) | 2 | 22 | 49 | 23 | 38 | .383 | .346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7 | 현대 | 110 | 369 | .247 | 91 | 14 | 7br(3위) | 2 | 18 | 48 | 48 | 46 | .339 | .330 |
1998 | 126 | 446 | .321br(2위) | 143br(5위) | 16 | 7br(3위) | 5 | 43 | 78 | 35br(4위) | 59 | .422 | .398br(4위) | |
1999 | 129 | 470 | .291 | 137 | 7 | 2 | 4 | 43 | 80 | 38br(3위) | 71 | .340 | .380 | |
2000 | 87 | 263 | .316 | 83 | 12 | 2 | 1 | 18 | 53 | 18 | 57 | .388 | .436 | |
2001 | 125 | 400 | .325 | 130 | 18 | 6br(2위) | 4 | 35 | 85 | 27br(5위) | 75 | .430 | .426br(5위) | |
2002 | 126 | 420 | .300 | 126 | 15 | 8br(1위) | 3 | 28 | 83 | 26br(4위) | 66 | .395 | .394 | |
2003 | 129 | 442 | .269 | 119 | 16 | 6br(1위) | 3 | 38 | 79 | 20 | 68 | .353 | .365 | |
2004 | 132 | 487 | .292 | 142 | 10 | 7br(1위) | 4 | 48 | 88 | 53br(1위) | 68 | .366 | .377 | |
2005 | 94 | 278 | .266 | 74 | 8 | 2 | 0 | 22 | 34 | 18 | 29 | .309 | .332 | |
2006 | 109 | 303 | .287 | 87 | 10 | 1 | 1 | 26 | 37 | 20 | 27 | .337 | .345 | |
2007 | 121 | 371 | .296 | 110 | 8 | 1 | 1 | 13 | 52 | 11 | 49 | .332 | .377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8 | 우리 | 114 | 352 | .310 | 109 | 16 | 5br(3위) | 1 | 24 | 44 | 16 | 36 | .392 | .372 |
2009 | 서울 | 24 | 33 | .242 | 8 | 1 | 0 | 0 | 4 | 2 | 2 | 4 | .273 | .324 |
KBO 통산BR(19시즌) | 2091 | 6928 | .291 | 2018br(9위) | 214 | 100br(1위) | 42 | 577 | 1171br(3위) | 550br(1위) | 962 | .369 | .375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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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롯데 자이언츠시절 주 포지션. 현대와서도 박재홍의 이적이나 이택근의 등장 이전, 경기 후반 백업으로도 자주 중견수를 보곤 했다.
- [2] 현대 유니콘스시절 주 포지션
- [3] 2016년 현재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그리고 덤으로 정규리그 1위를 한 적이 없다.
- [4] 당해년도 3위
- [5] 이 기록도 95년도 전준호의 기록이다.
- [6] 이 시절에는 유격수를 봤다. 외야로 나중에 전업해서 50개를 기록.
- [7] 94년까지는 방위 복무 선수들이 휴가를 받아 일부 원정경기에도 뛰었다. 방위병의 원정경기 출전이 아예 금지된 것은 95년부터. 단 이 금지 규정은 정규리그에만 적용되며 포스트시즌은 예외였다.
- [8] 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엘리트 카드가 없지만, 모바일 게임에서는 당해년도 엘리트 카드를 받았다. 아마 추후 엘리트 카드에 나올지도 모른다.
- [9] 전준호의 기록을 보면 타격과 도루가 급격하게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것을 볼 수있다.
- [10] 문동환과의 맞트레이드로 잘못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전준호와 5억을 맞바꾼 현금 트레이드가 맞다. 원래 프로에서의 문동환의 지명권은 롯데가 가지고 있었고 트레이드라는 건 프로팀끼리 하는 거다. 아무리 현대 피닉스가 같은 현대 계열이고 프로의 흉내를 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실업)이고, 문동환의 입단은 롯데가 지명에 의해 보유하게 된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영구교섭권에 의한 신인으로서의 입단이지 트레이드가 아니다. 단지, 문동환이 현대 피닉스와의 계약을 해지해야만 롯데로 입단이 가능했는데, 그 조건이 현대 피닉스와 계약 당시 받은 계약금 및 연봉에 위약금까지 토해내는 것. 롯데는 전준호를 현대로 넘긴 댓가로 5억을 받아와 이를 문동환의 계약금으로 지급했고, 문동환은 이 계약금으로 현대피닉스에 위약금을 물어 롯데 입단이 성사된 것이다. 이후 쌍방울 사태부터 촉발되었던 선수 팔아먹기의 시초격. 이정도면 현대가 대가리 굴리는 것은 삼성 이상 넘쳤다... (여기에 당시 전준호는 기복이 심해서 롯데 구단측에서는 '계륵'같은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게다가 롯데는 당시 대졸 신인이던 김대익을 전준호를 대체할 차세대 톱타자로 키울려 했었고...) 문동환은 2년 정도 밥값하다 드러누운 반면 전준호는 현대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꾸준히 활약해주며 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롯데에서 전준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던 김대익은 무언가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다가 삼성으로 가버렸고, 김주찬의 포텐이 터지기 전까지 리드오프의 부재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롯데의 입장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엄청나게 손해를 본 트레이드. 2003년 말, 롯데가 리드오프의 공백을 메워보겠다며 전준호를 내준 대가로 왔던 문동환까지 보상선수로 팔아버리며 해담선생을 거액에 데리고 왔는데 그 결과는...그리고 2013년 김주찬마저 KIA로 가버리고 전준우까지 군 입대를 하게 되자 롯데는 고정 테이블 세터가 없어서 고생을 하고 있다. 어쨌든 전준우가 돌아온 17시즌과 18시즌에 민병헌을 데려옴으로써 길고 길었던 리드오프 문제는 비로소 해결이 되었다.
- [11] 훗날 넥센의 감독이 되는 분이 맞다.
- [12] 시즌 중반에 현대는 또 한번의 머리를 굴리며 쌍방울에서 김광림을 낚아채 영입했다.
- [13] 7위는 조용했던 한화, 8위는 친정팀 롯데였다. 심지어 롯데는 이듬해 또 꼴찌를 했다. 그것도 2번 연속을 또...
- [14] 그나마 2005년은 덜 뛰었음에도 0.266을 쳤다.
- [15] 클리프 브룸바가 오기 전까지는 이때 좌익수 자리가 꽤나 공백이 컸는데 이숭용이 잠시 전업을 하면서 조재호, 강병식, 전근표,정수성같이 하나씩 모자라는 타자들이 맡았다. 현대가 1위 하다가 2위로 밀리는 계기가 이 시기였음이였고 다행히 브룸바가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면서 팀 우승을 일조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 외야의 수난은 송지만이 오고 이택근이 중견수로 완전히 자리잡으면서 해결된다.
- [16] KT 역시 2007년 현대를 인수하려고 했으나 어떤 블로거 때문에 백지화가 되어 인수 실패가 되었다. 그러나 2014년 결국 창단을 했다!
- [17] 이택근만 불참. 당시 이택근은 LG에
볼모로팔려간 상태. 김시진 당시 감독도 불참했는데 본인 입장에서 창피해서였다. 김시진은 시즌 후 방출 대기령 선수에서 동명이인이던 베테랑 투수 전준호, 이상열 등이 대거 방출되는 것과 팀이 돈이 없어서 FA로 LG에 떠나보낸 정성훈과 간판 투수들 및 타자 주전 멤버 4명을 대거 트레이드로 보내는 등 어수선해지기 마련이었다. 김시진이 여기서 막고 싶어하였으나 방출 된 선수들에게 미안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등 말을 제대로 전달을 못했다고 했다. - [18] 통산 1위로, 2위는 505개인 이종범
- [19] 1993년 75개, 1위는 1994년도 84개를 기록한 이종범
- [20] 1993년, 1995년, 2004년
- [21] 김성근이 불렀다고한다.
- [22] 사실, 우완투수는 마운드에 올라서면 오른팔 쪽이 3루쪽에 더 가깝고, 좌완투수는 왼팔 쪽이 1루에 가까워, 좌완투수가 우완투수보다 견제가 좀더 수월하다. 뉴욕 양키스의 베테랑 좌완투수 앤디 페티트라든가, 멀리 안 가더라도 LG의 봉중근을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다만 본인은 이 말을 한 이유로 투수도 견제하기 수월하나 자신도 투수의 동작을 체크하기 쉬워서라고. 간단하게 투수들의 세트포지션을 생각해보면 쉽다. 좌완투수의 경우 몸이 1루쪽을 향해 있으므로 눈만 움직여도 1루주자가 보이지만, 우완투수의 경우 머리를 완전히 돌려야 1루주자를 확인할 수 있다. 견제시에도 좌완투수는 선 자세 그대로 던지면 되지만, 우완투수는 몸을 완전히 틀어 던져야 한다. 반대로 3루 도루의 경우 우완투수가 막기 용이하다. 2루보다 조금 더 나와있는 2루 주자는 우완투수가 체크하기 쉽기 때문. 1980년대의 도루왕 김일권도 하일성 해설위원에게 '좌완이 도루하기 훨씬 편하다'는 언급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투수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타이밍을 잡기 편하다나... 리키 헨더슨 항목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말을 한 선수 대부분이 우완 상대로 도루성공률이 더 높다. 아무래도 역시 느낌과 실제는 조금 다르기도 한 모양. 혹은 좌완 상대로는 도루하기 힘들다는 통설에 기죽지 않기 위한 방편일수도 있다.
- [23] 나중에 자신을 인터뷰한 어느 한국 기자에게 본인이 먼저 전준호 코치를 아는가? 라며 물어보고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두 번 세 번 부탁할 정도. 그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중 전준호에게 도루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모양. 여기에서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전준호가 카브레라를 만들었다고 하는 건 물론 오버지만, 내셔널리그 도루왕이 짧은 기간이나마 받은 그의 코칭을 몇 년이고 잊지 않은 채 감사함을 표하는 걸 보면 도루에 한해서는 세계에서도 통할 지식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듯. 아쉬운 게 있다면 저 인터뷰 전부터 약물 관련 리포트 목록에 올라있던 카브레라는 결국 사실로 드러나 50경기 출장 정지를 먹었다.[28]
- [24] 진짜로 2011 FA때 뒤도 안보고 바로 일본직행해서 4년동안 일본에서 중심선수로 활약하고 2016년에 본인의 꿈 까지 밟아봤다.
- [25] 이 날이 2008년 추석이었다.
- [26] 그러나 마구마구2014에서는 2014년 4월 10일 업데이트 후 롯데 레전드카드와 현대 레전드카드가 모두 업데이트되었다!
- [27] 2014년 4월 10일, 마구마구2014 1주년 기념방송 예고대로 95 전준호(가명:박현석)의 엘리트 카드가 업데이트되었다. (다른 신규 엘리트는 06 권오준, 02 송진우(가명:박흥진), 89 박정현(가명:김석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