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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승렬
         |전임자 = [[이인]]
  • 김용관
         서울 출신으로를 1918년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했다. 귀국 이후 [[중앙공업시험소]]에서 근무했다. 1924년 10월 1일, 경성고공 동문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써 조선의 기술적 자립을 목적으로 한 발명진흥운동을 제창하여 [[발명학회]]를 설립, 그 지도자로 활동했다. 발명학회가 기금 부족으로 활동을 중단한 뒤 1932년 민족변호사 [[이인]]을 변리사로 영입하여 발명학회를 부활시켜 무학의 자수성가형 발명가들의 특허·실용신안 출원을 돕는 일을 했고, 1933년부터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발행했다.
  • 박순천
         |전임자 = (종로구 갑)[[이윤영 (1890년)|이윤영]]<br/>(종로구 을)[[이인]]
  • 오세창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 윤치영
         [[1916년]] 조카인 [[윤보선]]이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그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집안의 주선으로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누이인 [[이병영]] 결혼하게 된다. [[이병도]]는 그의 둘째 누나의 남편 [[이병림]]의 일족이었다.
         [[9월 6일]] 오전 그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집 안국동 104번지에서 담 하나 사이인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는 6백여 명이 모여 소위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각본대로 좌익 인사들이 중심이 된 55인의 헌법기초위원을 정하고 소위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경기여고 강당에서 담장 하나 건너편에 있던 윤치영은 자기 집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줄곧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여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으로 흡수하였다. 한편 [[국회 프락치 사건]]과 [[1949년]] [[11월]] 3.8선 근방에서 [[북한]]의 도발이 있자 그는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소수 정당이었지만 [[대한국민당 (1948년)|국민당]]의 지위와 입지는 올라갔다. [[1949년]] [[11월 12일]] [[이인]], [[임영신]] 등과 함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했다.<ref name="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元世勳)에게 낙선하였다.
         * 1946년 9월 31일 민주의원이인정전에서 아놀드 군정장관 송별연에 참석하였다.
  • 이갑성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玄楯),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 [[함태영]](咸臺永),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崔隣)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1927년]]부터는 [[허헌]], [[김병로]], [[이인]], [[허정숙]], [[조병옥]]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귀국,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윤치호]]의 신원 보증으로 풀려났다.
         * [[이인]]
  • 이경희 (1880년)
         [[1927년]] [[2월]] [[경성]]으로 상경하여 [[허헌]], [[조병옥]], [[김병로]], [[이인]],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를 맡았으며, 곧 [[신간회]] 경상북도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중앙본부 총무간사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하였다. 그 뒤 [[신간회]] 경상북도 대구부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대구부 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한때 30여 세포와 만여 회원을 포섭, 가입시켜서 단체를 키웠다. 1927년 12월 [[신간회]] 대구지회장 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이후 평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신간회]] [[밀양]]지회 조직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불심검문을 받고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그뒤 [[신간회]] 밀양지회 산하 조직인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항상 [[밀양경찰서]]와 파견된 총독부 경찰의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 [[이인]]
  • 이시영 (1882년)
         '''이시영'''(李始榮, [[1882년]] [[1월 10일]] ~ [[1919년]] [[7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 본관은 [[경주시|경주]](慶州). 본명은 이중현(李仲賢), 호는 우재(又齋). 친족 관계에 있는 동명이인인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성재 이시영)과의 구별을 위해 '우재 이시영'으로도 부른다. [[성리학]]자 이관준의 차남으로 [[대한민국]]의 제1대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의 숙부이다.
         * 조카 :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1979년]] [[4월 5일]],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법조인)
  • 이인 (동음이의)
         '''이인'''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인 (고려)|이인]]'''(李韌, ? ~ [[1381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 '''[[영춘군 (왕족)|이인]]'''(李仁, [[1465년]] ~ [[1507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아들 '''영춘군'''(永春君)이다.
         * '''[[양평군 (왕족)|이인]]'''(李仁, [[1498년]] ~ [[1506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아들 '''양평군'''(陽平君)이다.
         * '''[[하릉군|이인]]'''(李鏻, [[1546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덕흥대원군]]의 차남이자 [[조선]] [[조선 선조|선조]]의 둘째 형 '''하릉군'''(河陵君)이다.
         * '''[[은언군|이인]]'''(李裀, [[1755년]] ~ [[1801년]])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이다.
         * '''[[이인]]'''(李仁, [[1896년]] ~ [[1979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인이다. 호는 애산(愛山)이다.
         * '''[[이인 (기업인)|이인]]'''([[1979년]]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이인 (1984년)|이인]]'''([[1984년]]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이인'''(異人)은 [[한글]] 단어로 [[이방인]] 또는 기인(기이한 사람)의 다른 뜻으로도 활용된다.
         * '''[[이인 (불교)|이인]]'''(二忍)은 불교 용어로, [[불교 용어 목록/이#이인|생인]](生忍)과 [[불교 용어 목록/이#이인|법인]](法忍) 또는 [[중생인]](衆生忍)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말한다.
  • 장면
         한편 장면 본인의 의사와는 관련없이 [[곽상훈]] 등 야당 의원들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곽상훈에 의하면 “그 무렵에 오위영 씨 댁에 모여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고집 불통이요, 심술쟁이인 이 박사를 몰아내고 운석을 대통령으로 앉힐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당시의 헌법에 정‧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얼마든지 이 박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압도적인 사전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당시의 국무 총리인 장 모씨에게 우리의 취지를 밝히고 도장을 찍도록 권했다.<ref name=autogenerated8 /> 그는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ref name="장면 319">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증보판) 319페이지</ref> 는 것이다.
         * [[이인]]
         |후임자 = (재보선)[[이인]]
  • 최흥종
         제중병원을 찾아 온 나환자들로 광주시는 마치 나환자촌같은 인상을 풍길 정도로 길거리에 나환자들이 많았다. 최흥종은 Elizabeth J. Shepping 선교사(간호사)와 협의하여 전국적인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이 필요함을 총독부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최흥종은 곧 서울로 올라와 [[윤치호]](尹致昊), [[김병로]](金炳魯), [[송진우]](宋鎭禹), [[안재홍]], [[김성수]](金性洙), [[조병옥]](趙炳玉), [[이인]](李仁), 서정희(徐廷禧/노동공제회 초대회장), [[최원순]](崔元淳/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등을 찾아 취지를 설명하였다. 모두들 최흥종의 제안에 찬동을 표하여, 회장 윤치호, 총무 최흥종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1932년초 "전국 구라(救癩)협회"를 조직하였다.
  • 한규복 (1881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ref name="neftkin"/>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 [[변호사]]였다.
         |장=「혈의 누」의 이인직은 한일합방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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