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이용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1]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李容九
1868년 2월 14일 ~ 1912년 5월 22일
1868년 2월 14일 ~ 1912년 5월 22일
조선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파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다만 이후 일제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경상북도 상주시 출신. 본명은 이상옥.
생애 ¶
친일파로의 변신 ¶
동학 포교활동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결성하였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하여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2]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왔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참고로 3백만엔이 필요했던 이유는 친일 활동으로 일진회 회원들은 집이 전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로 만주로 이주해서 만주를 개척하면서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만주독립군이랑 만나면 어쩌려고 즉,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였는데 여지없이 버림받은 셈이다.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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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나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통감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낭인의 거두였다. 즉,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
게다가 지금도 호평은 못받고 있다.아시아주의 항목도 참조. - [2] 이 당시 손병희는 이용구를 비롯한 62명의 동학 지도자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 [3] 1909년 두번째 부인 이화사(李華師)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 이다. 성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 공영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 [4] 이 아들을 보기 전,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로 두었으나 이 아들을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
- [5] 이용구의 생애(李容九の生涯), 時事通新社,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