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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 입문 -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시대 ===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려대 은사인 [[유진오]]의 추천으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로 당선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후 신민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래구]]에서 제8대(1971년), 제9대(1973년), 제10대(197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파일:KTYSandIDK.jpg|width=300]]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비장한 표정이 인상적인~~김영삼 전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오른쪽은 [[김상현(1935)|김상현]] 당시 신민당 의원.
=== [[10월 유신|유신]] 시대 ===
1974년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직후 [[신도환]] 계보에 속하면서 김영삼의 당 운영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11월 이철승에 의해 역대 최연소 제1야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려대 은사인 [[유진오]]의 추천으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로 당선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후 신민당 소속으로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래구]]에서 제8대(1971년), 제9대(1973년), 제10대(197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10월 유신|유신]] 시대 ===
1974년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직후 [[신도환]] 계보에 속하면서 김영삼의 당 운영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11월 이철승에 의해 역대 최연소 제1야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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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될 당시 김영삼을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장고]](長考)를 거듭하다가 결국 [[노무현]], [[김상현(1935)|김상현]]과 함께 잔류하여 [[민주당(1990년)|꼬마 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당시 잔류파들중에 지명도나 정치경력 등 모든 면에서 넘버원이었다.] 이후 1991년 [[평화민주당|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정가에서는 "이기택이 김대중에게 시집 갔다"고 놀리기도 했으나, 사실상 이때의 결단으로 이기택은 김대중에 이어 야권 제2인자로 발돋움한 셈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은 '한겨레그림판'에서 '로보트 야권V'라는 제목 하에 김대중과 이기택을 각각 로보트 태권V로 형상화하여 손을 잡은 모습을 그리고, 이에 놀란 김영삼을 괴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김대중과 이기택의 연합은 많은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준 소식이었기 때문에, '로보트 야권V'라는 만평은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는 평가도 있는데, 10년 전에 이미 신민당 부총재였던 사람이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해운대구로 출마할까 말까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전국구 상위순번을 배정받아 당선되었다. 반면에 [[노무현]]과 [[김정길(1945)|김정길]]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부산에 출마해서 [[지역감정]]의 역풍 속에서도 처절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패배하면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때부터 부산에서 노무현은 4번, 김정길은 총 7번을 떨어졌으나, 김정길은 장관이 되었고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초재선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면서 죽을둥 살둥 싸우는데, 정작 격전지에 출마해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당대표는 유유자적 전국구 상위 순번으로 편하게 금뱃지를 달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즉 지역구 당선가능성을 보고 간을 보다가 지역감정으로 안 될 거 같으니 전국구로 도망간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다. 실제 당대표이자 영남권에서 가장 정치경력도 길고 지명도가 높은 이기택이 지역구 출마를 주저하면서 민주당의 영남권 선거전략이 제대로 꼬인 건 사실이다. 결국 노무현, 김정길과 몇몇 정치지망생들이 각개전투에 나서는 모양새가 되면서 모조리 낙선하였다. ~~뭘하던 당시 부산에서 김영삼을 넘기는 힘들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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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김대중과 동교동계 의원들이 떠나면서 민주당의 거대한 당사와 당재정을 그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어쨌든 그 후에도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1928)|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1937)|김원기]], [[제정구]], [[김정길(1945)|김정길]], [[홍성우(1938)|홍성우]], [[서경석(목사)|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이기택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민주화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 고문으로서 [[해운대구]]-[[기장군]]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신한국당]] [[김운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가 이끌던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중도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82|#]], 기존의 30석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고, 같은 야권의 경쟁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양천구의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부산광역시에서는 전원 낙선이었다. 그나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몇 개의 의석을 건지긴 했으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김대중의 국민회의도 이때 상당히 부진했으나, 무엇보다 [[김종필]]의 [[자민련]]이 50석으로 크게 약진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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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 | ||||
창당 | → | 초대 br 김대중·이기택 | → | 제4대 br 홍영기·박일 |
제2~3대 br 이기택 | ||||
[[통합민주당(1995년) 통합민주당 총재 | ||||
초대 br 박일·장을병 | → | 제2대 br 이기택 | → | 제3대 br 조순 |
한나라당 총재 | ||||
초대~제2대 br 조순 | → | 권한대행 br 이기택 | → | 제3대 br 이회창 |
이름 | 이기택(李基澤) |
본관 | 영천 이씨 |
출생일 | 1937년 7월 25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1] |
사망일 | 2016년 2월 20일 (향년 78세) |
학력 | 부산중학교br 부산상업고등학교br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
의원 선수 | 7 |
의원 대수 | 7, 8, 9, 10, 12, 13, 14 |
경력 | 고려대 학생위원장br 신민당 사무총장br 신민당 부총재br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치학 객원 연구원br 신한민주당 부총재br 통일민주당 정무위원br 통일민주당 부총재br 국회5공 비리조사 위원장br 통일민주당 부총재 겸 원내총무br 민주당공동대표겸 상임고문br 통합민주당 총재br 한나라당 상임고문 겸 총재 권한대행br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약칭 | KT[2] |
목차
개요 ¶
생애 ¶
초년시절 ¶
유신 시대 ¶
1974년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직후 신도환 계보에 속하면서 김영삼의 당 운영이 독선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이철승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 해 11월 이철승에 의해 역대 최연소 제1야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러나 1978년 신도환 계보에서 이탈하였고, 1979년 5월 전당대회 때에는 따르는 의원 1명도 없이 원외인사들로만 독자 계보를 형성하여 1차 대회에서 신도환을 뛰어넘는 92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전당대회 2차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사퇴하여 자신의 표들을 김영삼에게 몰아 주어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3]이 때 박정희 정권은 이기택이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을 지지하려 하자 자형 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장부를 압수하기까지 하였다.
제5공화국 시대 ¶
1980년 5.17 내란으로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84년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동래구 지역구에는 이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한 자신의 비서 출신 박관용이 있었다. 이에 지역구를 해운대구-남구로 옮기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과 거리를 두고 1987년 5월의 통일민주당 창당에 바로 따라가지 않다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계보 중 평화민주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꽤 있어서 계보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제6공화국 시대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 서석재의 뒤를 이어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당시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을 때 위원장을 맡아 원만한 청문회 진행으로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4]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될 당시 김영삼을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장고(長考)를 거듭하다가 결국 노무현, 김상현과 함께 잔류하여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5] 이후 1991년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정가에서는 "이기택이 김대중에게 시집 갔다"고 놀리기도 했으나, 사실상 이때의 결단으로 이기택은 김대중에 이어 야권 제2인자로 발돋움한 셈이었다[6]는 평가도 있는데, 10년 전에 이미 신민당 부총재였던 사람이다.
야당 No 2.jpg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해운대구로 출마할까 말까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전국구 상위순번을 배정받아 당선되었다. 반면에 노무현과 김정길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부산에 출마해서 지역감정의 역풍 속에서도 처절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패배하면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7] "초재선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지역감정과 맞서면서 죽을둥 살둥 싸우는데, 정작 격전지에 출마해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할 당대표는 유유자적 전국구 상위 순번으로 편하게 금뱃지를 달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8]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김대중을 도와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전국 유세를 하고 다녔다. 김대중이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자리에서는 김대중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렸으며, 그 후 김대중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드디어 야권의 제1인자로 부상한 셈
문민정부 시대 ¶
민주당 대표가 된 후 국가보안법 폐지, 6공 비리 청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 등을 주장하며,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력의 부족으로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만 보였으며, 당내에서는 권노갑 등 동교동계와 대립을 거듭하는 등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 못했다. 특히 1994년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몰아닥치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을 주장했으나 북한 쪽에서 무시하면서,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9] 그 후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당내 리더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10]
결국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김대중과 동교동계 의원들이 떠나면서 민주당의 거대한 당사와 당재정을 그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어쨌든 그 후에도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 제정구, 김정길, 홍성우, 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이기택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11]
one of them.jpg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 고문으로서 해운대구-기장군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신한국당 김운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가 이끌던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중도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 기존의 30석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고, 같은 야권의 경쟁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12] 물론 김대중의 국민회의도 이때 상당히 부진했으나, 무엇보다 김종필의 자민련이 50석으로 크게 약진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1997년에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재보궐선거에서 죽어가는 당의 명운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태준에 밀려 낙선. 사실 태어나기는 포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정치적 기반을 부산에서 잡은 이상 당선되기는 어려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13]
말년 ¶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정계은퇴를 권유하였으나, 놀랍게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김영삼의 밑에 있다가, 김대중과 손을 잡았는데, 그 뒤에는 이회창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14]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한 정치에 염증이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여당해보나 했더니 또 야당됐네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독선에 반발하여 김윤환, 이수성, 신상우, 조순 등과 함께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권태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기택뿐만 아니라 김윤환, 신상우, 조순, 김상현, 김동주 등이 모두 낙선하였으며, 지역구에서 홀로 당선된 한승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민국당 인사들이 결국 낙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계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안습인 인물이 재야에 있다가 뜬금없이 김윤환 등과 손을 잡은 장기표. 어쨌든 이때 이기택은 망했어요. 아무 실익도 없이 통합민주당만 갖다바친 꼴 통합민주당을 그냥 지키고만 있었어도 이런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을
그러나 다시 노무현과 거리를 두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15]를 지지하였다. 이후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기택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폐지론자였다는 점에서 이 행적은 비판받았다.
평통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난 뒤 조용히 지내다가 2016년 2월 20일 별세했다. 사망하기 전날 여의도 사무실에서 6년 간 준비해온 자서전 원고 작업을 끝냈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아, 큰일을 마쳤네’라 말할 정도로 흡족해 했다고 한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사망했다고.
평가 ¶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하에서 ‘야당 외길’을 걸으며 이른바 4.19 세대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1970~1980년대에는 민주진영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바로 아랫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으며, 김영삼이 여권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김대중에 이어 제2인자의 위상을 유지했다.
외모는 정치인이 아닌 대학교수를 연상케 하지만, 조기축구와 새벽달리기로 체력을 연마한 강골이었으며, 키도 크고 듬직한 성품이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다. 무엇보다 '4.19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상징성은 그가 가진 최고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직위가 너무 빨리 올라간 탓인지 바닥 민심을 훑는 감각이나 정치적 타이밍을 포착하는 동물적 감각 등이 너무 일찍 사그러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야당 대표 시절에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공천을 하면서 명분이나 당선가능성보다는 계보나 인맥 위주의 공천을 하여 생각보다 작은 그릇을 보여주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태도결정에 너무 신중해 답답하다는 얘기가 돌았다. 만약 1990년 3당합당 때 차라리 김영삼을 따라갔다면, 김영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노무현처럼 야권잔류 결단을 빨리 내리고 김영삼과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면, 최소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지역감정에 맞서서 부산 해운대 지역구에 출마했다면,[16] 노무현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돌아올 수도 있었다. 또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때 대북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빨리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다면, 김대중의 컴백을 막고 1997년에 대권을 잡으며 그의 염원대로 3김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대중과 결별하면서 이미 그의 정치적 대운은 다한 것이었는데, 정계를 은퇴해야 할 시점에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7년 이회창 진영에 합류하여 한나라당을 만든 것은 그가 일생동안 쌓아올린 이미지를 스스로 망친 것으로서 그의 역사적 평가를 완전히 추락시킨 결정.아니 왜 지는 쪽만 계속 골라 다니는지
가족관계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4번) | 신민당 | - | 당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18] | 신민당 | 34,471 (65.89%) | 당선 (1위) | 1972.10.17 자격박탈br(10월 유신)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4선거구)[19] | 신민당 | 57,757 (39.23%) | 당선 (2위)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4선거구) | 신민당 | 117,216 (40.14%) | 당선 (1위)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남/해운대) | 신한민주당 | 159,127 (43.00%) | 당선 (1위)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해운대) | 통일민주당 | 54,223 (48.30%) | 당선 (1위) | 1990년 탈당br(3당합당 반대)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 민주당 | - | 당선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해운대/기장 갑) | 통합민주당 | 55,163 (47.65%) | 낙선 (2위) |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20] | 통합민주당 | 35,137 (28.33%) | 낙선 (2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연제) | 민주국민당 | 26,060 (26.53%) | 낙선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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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 포항시 남구 장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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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때 신민당 내에서는 중도통합론을 내걸고 사실상 독재정권과 야합하던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래서 2차 투표를 앞두고 선명야당을 내걸고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공언하고 있던 김영삼으로 반이철승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이기택의 후보사퇴는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도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철승을 떨어뜨리고,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들의 표를 모두 모아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 속에서도 총재경선에서 승리하였다.
- [4] 노무현이 5공비리 청문회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 조연으로 활약(?)하였다.
- [5] 당시 잔류파들중에 지명도나 정치경력 등 모든 면에서 넘버원이었다.
- [6] 당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은 '한겨레그림판'에서 '로보트 야권V'라는 제목 하에 김대중과 이기택을 각각 로보트 태권V로 형상화하여 손을 잡은 모습을 그리고, 이에 놀란 김영삼을 괴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김대중과 이기택의 연합은 많은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준 소식이었기 때문에, '로보트 야권V'라는 만평은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 [7] 이때부터 부산에서 노무현은 4번, 김정길은 총 7번을 떨어졌으나, 김정길은 장관이 되었고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 [8] 즉 지역구 당선가능성을 보고 간을 보다가 지역감정으로 안 될 거 같으니 전국구로 도망간 거 아니냐는 비아냥이다. 실제 당대표이자 영남권에서 가장 정치경력도 길고 지명도가 높은 이기택이 지역구 출마를 주저하면서 민주당의 영남권 선거전략이 제대로 꼬인 건 사실이다. 결국 노무현, 김정길과 몇몇 정치지망생들이 각개전투에 나서는 모양새가 되면서 모조리 낙선하였다.
뭘하던 당시 부산에서 김영삼을 넘기는 힘들었겠지만... - [9] 이때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특사 파견을 주장했는데, 이게 실제로 성사되면서 주가를 높혔다.
- [10] 동교동계는-- 사실상 김대중 --이종찬 전 의원을 주장했고, 이 공천과정에서 동교동계와 이기택 양자간에 감정적인 골이 생겼다. 게다가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서자, 모든 언론과 유권자들은 김대중만 주시했고 이기택은 순식간에 존재감을 상실했다. 거기에 김대중은 다른 후보는 전부 지원유세를 다니면서도 장경우 후보 유세장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 [11]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민주화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
- [12]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양천구의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부산광역시에서는 전원 낙선이었다. 그나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몇 개의 의석을 건지긴 했으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 [13] 게다가 상대가 포항의 경제를 쥐고 있는 포항제철의 창립자이니 이건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
- [14] 이때 조순,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절연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
- [15] 고려대 상대 후배이고, 고향(포항) 후배이기도 하다
- [16] 뒤늦게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로 돌아왔지만 아무 실익이 없는 때늦은 결정이었다.
- [17] 늙어서도 미모가 죽지 않았다. 사진 참조
- [18] 부산 동래구 을
- [19] 부산 동래구
- [20] 전임자 허화평 12.12 군사반란으로 피선거권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