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이강돈(李康敦 / Gang-Don Lee) |
생년월일 | 1961년 2월 27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포항시[1] |
학력 | 포항청림초 - 포항중 - 대구상고 - 건국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
소속팀 | 빙그레 이글스 (1985[2]~1993)br 한화 이글스 (1994~1997) |
지도자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연수코치 (1998) br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1999) br 한화 이글스 2군 주루코치 (2002~2003) br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4) br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감독 (2006~2008) br 청주고등학교 감독 (2008~2009) br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0~2012) br 북일고등학교 감독 (2013~2016) |
해설위원 | 대전MBC 해설위원(임시) (2013) |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33번 | |||||
팀 창단 | → | 이강돈(1985~1997) | → | 이종운(1997~1998) |
1988 ~ 1990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1987년 | 1988년 | 1989년 | 1990년 | 1991년 | ||||
이광은(MBC 청룡) br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br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 → |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br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br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 → | 김일권(태평양 돌핀스) br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br 고원부(빙그레 이글스) | → |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br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br 이호성(해태 타이거즈) | → |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br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br 이호성(해태 타이거즈) |
1989, 1990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 |||||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 → |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 → | 장종훈(빙그레 이글스) |
1990년 한국프로야구 득점왕[3] | |||||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 → |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 → | 장종훈(빙그레 이글스) |
1993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 |||||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 → |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 → | 정명원(태평양 돌핀스) |
빙그레 이글스 역대 주장 | ||||
유승안 BR (1991) | → | 이강돈BR(1992~1993) | → | 강정길 BR (1994~1995) |
목차
개요 ¶
선수 경력 ¶
1985년 당시 신인 시절의 이강돈.[4] |
오랫동안 빙그레-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전 사람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포항 사람이다. 대구상고(1978년~1981년 졸업)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1981학번)에 진학했는데, 대구상고 시절에 비해 건국대학교에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1984 LA 올림픽 국가대표[5]로 발탁되는 등, 일약 대학 무대 최고의 톱 타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대구 지역의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여기서 삼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지명해 놓고서는 이강돈에게 먼저 군대를 갔다 오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한 것. 다른 선수에게는 관대하게 입단 조건을 걸고서, 유독 자신만 군대를 걸고 넘어지는 것에 화가 난 이강돈은 전격적으로 빙그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드래프트의 질서를 해치는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갔다.[6]
왜냐면 당시 빙그레는 막 생긴 신생팀으로서 기존의 6개 구단들보다 전력이 한참 빈약했기 때문이었다.[7] 여기에 당시 빙그레의 초대 단장인 노진호는 바로 직전까지 삼성에서 프런트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삼성은 전관예우 + 신생 구단에게 선심쓰는 차원에서 무상으로 그의 지명권을 양도했다. 그래서 이강돈은 빙그레에 입단할 수 있었고,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드래프트 질서를 거부하고도 별 일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공개되었는데, 군대부터 다녀오라는 삼성 라이온즈의 요구를 거부한 이강돈이 다른 팀으로 보내 주기를 희망했고 놀랍게도 삼성 라이온즈가 신생 팀에 대한 예우 차원인지 빙그레 이글스에 조건 없이 지명권을 양도하여 보내 주는 대인배스러운 결정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강돈뿐만 아니라 중장거리형 1루수 강정길도 삼성의 지명권 양도로 빙그레에 입단했다.
1987년 8월 27일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후.[8] |
빙그레에서 이강돈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데뷔 첫 해 .297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빈약했던 빙그레 타선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 비록 신인상은 MBC 청룡의 에이스로 급부상한 김건우에게 내줬지만, 이강돈은 빙그레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정훈, 장종훈, 강정길, 이중화같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신생 빙그레는 일약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리며 프로야구를 풍미하기 시작했고, 막강 해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빙그레는 결국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며 1988, 1989,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했고, 1992년에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고도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면서 또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때 이강돈은 모두 출전했고, 그리고 이강돈이 은퇴한 시기가 1997년이니 이강돈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시리즈 우승은 못 했지만, 선수 시절 이강돈은 1번 이정훈의 뒤를 받치는 강한 2번 타자로서 맹활약했다. 1990년에는 .335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7사 차이[9]로 한대화에게 밀려 타격 1위를 놓쳤고,[10] 1992년에는 다시 .320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래도 이강돈 본인은 타율보다 안타에 더 애착을 가졌던 만큼, 타격왕을 놓친 것에 큰 아쉬움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 시즌 막판 한대화 등과의 타격왕 경쟁에서도 마음만 먹었다면 타율 관리 명목으로 쉴수도 있었지만, "정정당당히 승부하겠다"면서 이를 사양했다. 대신 그해 이강돈은 최다 안타 1위를 차지했고, KBO 리그 역사상 최다안타 부문에서 정식으로 시상을 받은 첫 주인공이 되었다.
안타 제조기로서 그의 의욕적인 타격은 구질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이른바 '마구잡이 타법'이라고 불렀다. 이후 LG 이병규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배드볼 히터였던 셈.
어쨌거나 빙그레의 주축으로 매년 10개 가량의 홈런을 기대할 수 있고, 3할 근처의 타율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 결과 이강돈은 두 차례 최다안타 1위와 1988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연속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97년 은퇴식을 앞두고 찍은 사진. |
이강돈은 1992년의 최후의 전성기를 끝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슬럼프에 빠지고, 여기에 여러 부상이 겹치면서 조금식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벅지, 무릎, 어깨가 아프고 점차 그 자리를 신인들이 메우면서 이강돈의 입지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결국 199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하기에 이른다.
특이한 기록도 두 가지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1987년 8월 27일 OB전에서 수립한 프로야구 통산 2번째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다. 그런데 이강돈은 전날 저녁, 다음 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만 믿고 밤새 술을 들이붓고 고주망태가 되었는데, 정작 경기 당일 비가 오기는 커녕 쨍쨍한 날씨인지라 정상적으로 경기가 거행되었다. 당연히 숙취에 찌들어 고통스러워하던 이강돈은 대충 휘두르고 죽자는 생각으로 출장했지만 뜻밖에도 홈런에 2루타, 번트 내야안타, 3루타를 차례로 때려내며 대 기록을 작성하였다. 나중에 이강돈은 사이클링 히트 기록에 대한 소감으로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공이 수박만하게 보이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찬가지로 술기운에 7타수 7안타 날린 오시타 히로시와 오버랩된다
1993년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이강돈.[11] |
다른 하나는 1993년 올스타전 MVP 수상인데, 원래 팬투표로 선발되지 못해 추천 선수로 나갔지만 1회 홍현우가 2루타를 치고 부상당하면서 대주자로 투입되고, 이후 타석에서 홈런까지 날리며 맹활약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베스트 10 외의 선수로 올스타전 MVP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
또 하나 기록할 만한 점은 바로 징크스인데, 현역시절 장타력을 올리기 위해서 노팬티로 출전한 것이 유명하다.
지도자 경력 ¶
은퇴 후 다이에 호크스에서 연수를 받고 한화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한화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그 뒤 청주고 감독도 잠시 역임했다가 롯데 자이언츠로 건너가서 타격코치로 재임했다. 그러나 프로구단 코치로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3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올라가 지역 라이벌인 공주고와 맞붙었는데, 0:4로 끌려가던 중 상대 선발인 김훈호의 볼질로 한점차까지 따라간 상황에서 뜬금없는 스퀴즈를 지시했다. 결과는...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다.[12]
2014 시즌 중 정수근과의 인터뷰에서 한화의 현실에 대한 씁쓸함(...)을 표시했다. 한화의 약점으로 마무리의 부재를 꼽았는데, 당시 한화는 마무리를 정하지 못하고 박정진, 윤규진 등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2016년 10월 말에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에서 물러나고, 대전MBC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기존의 여정권[13] 해설과 로테이션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2013년 홈경기 임시 해설 이후 4년만.
연도별 성적 ¶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6 | 빙그레 | 104 | 347 | .297 | 103 | 14 | 6br(2위) | 10 | 36 | 42 | 11 | 41 | .458 | .370 |
1987 | 106 | 369 | .268 | 99 | 13 | 4 | 3 | 42 | 42 | 4 | 29 | .350 | .321 | |
1988 | 103 | 377 | .313 | 118br(3위) | 26br(1위) | 3 | 4 | 56 | 57 | 8 | 27 | .430 | .355 | |
1989 | 120 | 464 | .295 | 137br(1위) | 24br(3위) | 4 | 9 | 66br(3위) | 67br(2위) | 12 | 35 | .422 | .342 | |
1990 | 117 | 436 | .335br(2위) | 146br(1위) | 20 | 6br(3위) | 16br(4위) | 84br(3위) | 81br(1위) | 12 | 51 | .518br(3위) | .400br(5위) | |
1991 | 114 | 385 | .265 | 102 | 15 | 5 | 11 | 55 | 49 | 7 | 42 | .416 | .335 | |
1992 | 121 | 403 | .320br(5위) | 129 | 27br(5위) | 8br(4위) | 13 | 60 | 73 | 7 | 42 | .524 | .379 | |
1993 | 108 | 348 | .233 | 81 | 18 | 0 | 6 | 33 | 31 | 11 | 37 | .336 | .303 | |
1994 | 한화 | 108 | 309 | .278 | 86 | 15 | 0 | 4 | 46 | 33 | 8 | 35 | .366 | .348 |
1995 | 105 | 290 | .248 | 72 | 20 | 2 | 4 | 40 | 29 | 4 | 31 | .372 | .319 | |
1996 | 96 | 229 | .240 | 55 | 10 | 0 | 6 | 35 | 26 | 3 | 32 | .362 | .331 | |
1997 | 15 | 22 | .182 | 4 | 0 | 0 | 1 | 3 | 3 | 1 | 2 | .318 | .250 | |
KBO 통산(12시즌) | 1217 | 3979 | .284 | 1132 | 202 | 38 | 87 | 556 | 533 | 88 | 404 | .420 | .347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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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항시 태생이다. 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보냈다.
- [2] 1985 시즌은 빙그레 창단 첫 해라 2군 리그 참가.
- [3] 최다 득점 부문은 1999년에 신설
- [4] 왼쪽에 있는 선수는 현 kt wiz 코치인 이광길, 가운데는 박상조 코치, 오른쪽이 이강돈.
- [5] 이 당시에는 야구는 시범종목이었다.
- [6] 그렇긴 한데, MLB에서 스캇 보라스의 유명세를 알린 loop hole FA사건 원인이 드래프트 지명 후 15일 안에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의무 불이행이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인 만큼, 삼성 측이 계약하지 않고 군입대를 제안한 것이 의무 불이행으로 해석될 가능성 때문에 법적 공방 들어가도 이강돈에게 승산이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 [7] 원년 참가 팀들을 제외하고, 1군 첫 시즌을 보낸 팀들 중 최저승률 기록을 갖고 있다.
- [8]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고 받은 사사키 제품의 배트 세 자루와 KBO에서 준 황금배트를 들고 이강돈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9] 할푼리모 다음 오는 단위가 사. 1모 차이가 났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반올림하면 0.3349로 모 단위까지 똑같았다.
- [10] 한대화 0.334928, 이강돈 0.334862.
- [11] 이글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MVP로 선정되었다.
- [12] 공주고는 김경문이 활약하며 MVP로 선정됐던 1977년 이후 36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이었다. 이 날 경기는 월요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진행되었으며 공주고 동문인 손혁, 박정배, 조동화가 와서 관전했다. 박찬호는 아예 덕아웃 옆에 있었고...
- [13] 현직 체육교사(체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