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인에 속하는 안정복·정약용·권철신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학문연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조카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오자, 이에 흥미를 느끼고 이벽 등과 함께 교리를 번역·연구했으나 입교는 하지 않았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게 되자 교리의 연구를 중단했고,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 때는 광주 부윤으로 자신이 천주교를 탄압했다. 그 후 형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1795년 청나라의 주문모 신부가 몰래 입국한 사건으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고 충주 목사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도 여전히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필법이 뛰어났다.<ref name="글로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가환〉</ref>채제공을 잇는 남인 시파계의 대가였으나 당시 정권이 반대파로 기울자 천주교신자로 몰아세워 장살로 정치적인 희생을 당하게 되었다.
평소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였는데 신유박해 당시“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113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