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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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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이름 = 이 아가타
|출생일 = 1824년
|사망일 = 1840년 1월 9일
|축일 = 9월 20일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그림 =
|크기 =
|설명 =
|출생지 = 서울<ref name=faithweb>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ref>
|사망지 = 서울
|직업 = 순교자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상징 =
|수호 =
|매장지 =
|성당 =
|기도 =
}}
이 아가타(李亞加大, 1824년 ~ 1840년 1월 9일)는 조선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국 천주교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아가타(Agatha)이다.


생애

이 아가타는 이광헌권희의 딸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열심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녀는 또한 동정을 결심하고 지켰다.

이 아가타는 16세이던 1839년 4월 8일에 그녀의 아버지 이광훈 아우구스티노와 어머니 권희 바르바라 그리고 남동생 이 다미아노와 함께 투옥되었다.

이 이가타는 반복적으로 심문고문을 받았다. 포장은 처음에 그녀가 배교토록 설득했지만, 듣지 않자,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폭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에 놀랐다. 어린 이 아가타는 온갖 협박과 고문을 용감히 견뎌냈는데,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그러한 하느님은총을 좀처럼 믿지 못하였다.

마치 야수와 같은 형졸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처녀성을 지킬수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형졸들은 그녀의 부모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고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동생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제 부모가 배교하셨든지 안 하셨든지 간에, 저희와는 상관 없습니다. 저희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아가타는 300 여대의 장형과 90여대의 태형을 받았다.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질병 등의 고통도 그녀의 용기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통 받는 내내 1839년 5월 24일9월 3일에 각각 참수되어 순교한 그녀의 부모를 생각했다. 이 아가타는 6개월 간의 수감 생활 끝에, 1840년 1월 9일 17세의 나이로 한양에서 김 테레사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시복 · 시성

이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ref name=103saints_britannica>{{백과사전 인용
|url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
|제목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백과사전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확인월일 = 2014-12-07
|인용문 =
}}</ref>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ref name=blessed>{{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2-07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1017165028/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보존날짜 = 2014-10-17
| 깨진링크 = 예
}}</ref> 1984년 5월 6일서울특별시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각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