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정보
| 법명 = 의상(義湘)
| 그림 =
| 그림설명 = 의상대사 영정
| 출생일 = 625년
| 출생지 =
| 입적일 = 702년 (78세)
| 입적지 =
| 종파 = 화엄종(해동 화엄종)
| 속명 =
| 스승 = 지엄(智儼)
| 저작 =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br />《입법계품초
기(入法界品鈔記)》<br />《화엄십문간법관(華嚴十門看法觀)》<br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br />《제반청문(諸般請文)》<br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br />《화엄일승발원문(華巖一乘發願文)》<br />《투사례(投師禮)》외
}}{{한국의 불교}}
| 법명 = 의상(義湘)
| 그림 =
| 그림설명 = 의상대사 영정
| 출생일 = 625년
| 출생지 =
| 입적일 = 702년 (78세)
| 입적지 =
| 종파 = 화엄종(해동 화엄종)
| 속명 =
| 스승 = 지엄(智儼)
오진]](悟眞){{.w}}지통(智通){{.w}}표훈(表訓){{.w}}진정(眞定){{.w}}진장(眞藏){{.w}}도융(道融){{.w}}양원(良圓){{.w}}상원(相源){{.w}}능인(能仁){{.w}}의적(義寂) 등{{개행 금지 끝}} |
기(入法界品鈔記)》<br />《화엄십문간법관(華嚴十門看法觀)》<br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br />《제반청문(諸般請文)》<br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br />《화엄일승발원문(華巖一乘發願文)》<br />《투사례(投師禮)》외
}}{{한국의 불교}}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ref name="글로벌-의상">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의상|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br/>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문화#의상|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유학과 교육 ¶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師兄)인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당항성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ref name="글로벌-의상"/>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당나라에 체류 중 그의 설법에 참석하던 여성 중 그를 사모하는 선묘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던 날, 선묘의 집에 찾아갔지만, 선묘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접한 이 선묘는 자신이 죽어 그를 지켜주겠다며 황해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의상이 영주 봉황산에 산사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와서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어느 날 사람 수백 명의 머리를 덮고도 남을 크기의 바위가 공중에 떠다니면서 주민들을 따라다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였고, 의상은 사찰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수행과 정진 ¶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692년(효소왕 1)에 현수는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ref name="글로벌-의상"/>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죽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사망 당시 향년 78세였다.
사후 ¶
일화 ¶
*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는 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ref name="글로벌-의상"/>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ref name="글로벌-의상"/>
* 범어사의 전설에 따르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ref name="글로벌-의상"/>
* 범어사의 전설에 따르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ref name="글로벌-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