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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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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44년 출생]][[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홍천군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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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 인물]]



윤정희의 주요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윤정희 문희 남정임
2세대 여배우 신트로이카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3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원미경 이미숙 정애리[1]

이름윤정희 (尹靜姬)
본명손미자 (孫美子)
국적대한민국 width=28
출생1944년 7월 30일 (age(1944-07-30)세) 강원도 홍천군
학력파리 대학교 대학원(Université de la Sorbonne Nouvelle) 예술학 석사
직업배우
가족타쿠마 마모루(1974– ),
종교가톨릭 (세례명: 데레사)
활동1967년현재
신장160cm

목차

개요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배우.

대한민국의 여성 배우.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부인이며, 1976년에 결혼했다. 본명은 손미자.[2] 1944년 7월 30일에 출생하였고, 서울에서 태어나 강원에서 성장 홍천군과 우석대(고려대학교로 통합)를 졸업하였다.

활동

1960년대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3]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데에 그치지 않고 폭넓은 배역폭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사에 굵직한 기여를 했다. 한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여배우의 맡는 통상적인 역할은 어머니상이나 요부상에 그쳤는데, 윤정희의 경우에는 이 두 역은 물론이고,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단순히 트로이카들과 비교해도 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하이틴 스타와 같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역을 연기한 남정임, 우수에 빠진 눈매로 비련의 여인을 연기했던 문희에 비해 폭넓은 역을 맡았다. 또 그녀의 이미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인 세련미이다.

1970년대

그러나 문희미워도 다시한번의 흥행 이후 1969년에는 벽속의 여자, 꼬마신랑 등을 대거 흥행시키며 1970년대부터 윤정희를 능가하여 조금 위축된 감을 보여줬지만 1971년 문희,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에는 윤정희를 탐낸 박정희 대통령의 바람기 덕에 육영수 여사가 개입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찌됐든 부부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다. 1977년에는 야행이 그 해 흥행영화 5위권 안에 들어가며 저력을 보여줬다. 당시에는 영화 말고 드라마가 크게 성장했는데 윤정희는 드라마에서도 활약을 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그러다가 1981년, 자유부인 '81이 그 해 흥행 1위 영화가 되면서 남정임, 문희가 이미 이룬 영화 1위 흥행 여배우 자리에 늘그막에 올랐다. 1987년에는 위기의 여자로 흥행을 했다.

만 66세인 2010년 영화 ""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진가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한때 일가족이 북한으로 납북될 뻔한 큰 위기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백건우 항목 참고.

여러 이야기

백건우와 결혼 과정에 육영수 여사가 개입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윤정희를 총애하자 이에 육영수가 백건우와 서둘러 결혼시켜 프랑스로 쫓아냈다' 류의 소문이 떠돌았다. 위의 지식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도 윤정희와 관련된 뜬소문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TV로 생중계 되었던 2006년 제 27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으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등장과 동시에 울먹거리더니 당시 수감되어 있던 절친한 동료 배우 신성일을 선처해달라는 매우 적절치 못한 망언발언으로 엄청나게 비난받았다.이를 본 시청자들은 어리둥절

또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영화배우가 있느냐'면서 영화와 TV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들을 비판하였는데 정작 그 자신도 1972년 TBC드라마 사모곡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냥 가만히 계시지

중학교 동창인 어느 어르신의 회고에 따르면, ~마의 16세~ 소녀 시절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뒤돌아서 다시 볼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인기 절정이던 20대 시절, 의외의 부업을 한 적이 있다. 다름아닌 통닭집. 워낙 바쁜 일정 탓에 경영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셨으나 엄연히 ‘사장’은 윤정희였다.가게의 주인이 톱스타 윤정희인데다 음식의 맛도 좋아서 한동안 성황리에 운영되었다고.

국내외의 각종 영화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무려 24번이나 수상한 대배우이다.[4][5]

파일:20100812000861_0.jpg
앙드레김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출연 작품

영화

제목 상영일자 관람인원 배역
청춘극장 1967.07.01 206,000명 오유경 역
강명화 1967 100,000명 강명화 역
안개 1967.10.19 136,000명 하인숙 역
내시 1968 320,400명 자옥 역
천하장사 임꺽정 1968 152,000
일본인 1968 118,000
장군의 수염 1968 102,000
독짓는 늙은이 1969 136,627명 옥수 역
야행 1977.04.23 135,047명 현주 역
자유부인 '81 1981.06.13 287,919명 선영 역
2010 약 220,000명 양미자 역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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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이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보희를 참고바람.
  • [2] 배우 금보라와 본명이 같다.
  • [3]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 [4]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원로배우 그 누구도 윤정희의 발끝에 못 미친다. 그도 그럴것이 윤정희는 젊은 시절에 무명이었던 이들과 달리 젊은 시절에도 연기력, 흥행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로배우들 중에서는 단순히 상 몇번 타거나 광고 몇번 출연한 것 가지고 연기의 화신처럼 대접받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원로배우들 상당수가 젊은 시절에 무명인 경우가 많다.
  • [5] 반대로 젊은 시절에 정점을 찍은 배우들 상당수는 말년에 잘 활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은퇴를 해서 대중에 잊혀지는 경우가 많다. 이미 인기에서 정점을 찍어 더 이상 연예계에 미련이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