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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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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윤석중 (1893년)|일제 강점기의 관료]]}}
{{작가 정보
| 이름 = 윤석중
| 원어이름 = 尹石重
| 출생일 = {{출생일|1911|5|25}}
| 출생지 = {{국기|일제 강점기}} [[경성부]]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2003|12|9|1911|5|25}}
|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 필명 = [[호 (이름)|호(號)]]는 석동(石童)
| 장르 = 아동문학<br/>동화<br/>음악평론<br/>동시<br/>시문학<br/>영화제작<br/>작사
| 학력 = [[조치 대학교]] 신문학과 [[학사]] [[졸업]]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 요한)
| 소속 = 前 한국방송위원회 위원장
| 직업 = 아동문학가, 동화작가, [[시인]]
| 활동 기간 = [[1924년]]~[[2003년]]
| 배우자 = 박용실
| 자녀 = 슬하 3남 1녀
| 친척 = 윤양중(이복 아우)<br/>윤영모(이복 아우)<br/>윤경모(이복 아우)
}}
'''윤석중'''(尹石重, [[1911년]] [[5월 25일]]~[[2003년]] [[12월 9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작가]], 아동문학가로, 호는 석동(石童)이다.
 
== 개요 ==
그는 [[양정고보]]를 거쳐 [[1942년]]에 [[일본]] [[도쿄]]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윤석중'''(尹錫中, <small>일본식 이름: </small>平岡永宇, [[189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 생애 ==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를 재학하였으나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발발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 '자퇴생의 수기'를 투고한 후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퇴]]를 한다. [[1930년]] [[가을]]에는 [[일본]]으로 [[유학 (교육)|유학]]을 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1942년]]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그의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 가사를 창작·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1956년]] 새싹회 동요집 엄마손 등을 비롯하여 윤석중 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등 30여 편에 이른다. [[2003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12년]]에 [[강원도 ()|강원도]] [[삼척시|삼척군]]의 임시직원으로 채용되면서 관계에 들어섰다. 삼척군 내무계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 군서기로 채용되어 정식 직원이 되었다.

== 학력 ==
* [[일본]] [[조치대학교]] 신문학 학사
1918년부터 강원도 에서 군서기로 근무했으며, [[1921년]]에는 총독부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총독부 군속으로 [[삼척시|삼척군]]에 발령받았다. [[정선군]], [[강릉시|강릉군]] 등 강원도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 상훈 ==
* [[1961년]] : 3·1 문화상 수상
* [[1965년]] :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ref>세 번째『고마우신 선생님』=윤석중 선생님 뽑아, 《동아일보》, 1965.3.27.</ref>
* [[1966년]] : 문화 훈장 수여
* [[1973년]] : 외솔상 수상
* [[1978년]] : [[막사이사이상]] 수상<ref>인터뷰 막사이사이賞수상 尹石重씨, 《동아일보》, 1978.8.4.</ref>
[[1934년]]에는 서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횡성군]] 총독부 전매국 경성지방전매국 금성출장소, [[철원군]] 근무를 거쳤다. [[1938년]] 1월에는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고, 강원도 정선군과 [[양양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 참고 자료 ==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서무주임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1941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7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각주 ==
<references/>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우익]] 계열에 가담하였다. [[1950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강원도지부 부지부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국민회 강원도지부, 임원을 개선
|출판사=동방신문
|날짜=1950-06-08
}}</ref>

== 외부 링크 ==
*[http://www.isaessak.co.kr/main/index.php?page=new&no=22 윤석중 사이버 기념관]
*[http://www.isaessak.co.kr/main/index.php?page=new&no=8 윤석중 문학상]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윤석중
|대수 =
|직책 = 초대 [[대한민국 방송위원회|방송위원회 위원장]]
|임기 = [[1981년]] [[3월 30일]]~[[1982년]] [[3월 18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윤석중
|후임자 = [[정희택]] 
|대수 = 2
|직책 = [[대한민국 방송위원회|방송위원회 위원장]]
|임기 = [[1982년]] [[3월 19일]]~[[1984년]] [[4월 24일]]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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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아동문학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방송위원회 위원장]][[분류:인촌상 수상자]][[분류:막사이사이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분류:양정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조치 대학 동문]][[분류:파평 윤씨]]
== 참고자료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8_10401|윤석중|尹錫中}}
 
== 각주 ==
{{각주}}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삼척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윤석중(尹錫中, <small>일본식 이름: </small>平岡永宇, 189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생애

1912년강원도 삼척군의 임시직원으로 채용되면서 관계에 들어섰다. 삼척군 내무계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조선총독부 군서기로 채용되어 정식 직원이 되었다.

1918년부터 강원도 에서 군서기로 근무했으며, 1921년에는 총독부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총독부 군속으로 삼척군에 발령받았다. 정선군, 강릉군 등 강원도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서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횡성군과 총독부 전매국 경성지방전매국 금성출장소, 철원군 근무를 거쳤다. 1938년 1월에는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고, 강원도 정선군과 양양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서무주임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1941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7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우익 계열에 가담하였다. 1950년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강원도지부 부지부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국민회 강원도지부, 임원을 개선
|출판사=동방신문
|날짜=1950-06-08
}}</ref>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8_10401|윤석중|尹錫中}}

각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