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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尹錫中, <small>일본식 이름: </small>平岡永宇, [[189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 생애 ==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를 재학하였으나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발발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투고한 후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퇴]]를 한다. [[1930년]] [[가을]]에는 [[일본]]으로 [[유학 (교육)|유학]]을 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1942년]]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그의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 가사를 창작·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1956년]] 새싹회 동요집 엄마손 등을 비롯하여 윤석중 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등 30여 편에 이른다. [[2003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12년]]에 [[강원도 (남)|강원도]] [[삼척시|삼척군]]의 임시직원으로 채용되면서 관계에 들어섰다. 삼척군 내무계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에 [[조선총독부]] 군서기로 채용되어 정식 직원이 되었다.
1918년부터 강원도 에서 군서기로 근무했으며, [[1921년]]에는 총독부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총독부 군속으로 [[삼척시|삼척군]]에 발령받았다. [[정선군]], [[강릉시|강릉군]] 등 강원도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서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횡성군]]과 총독부 전매국 경성지방전매국 금성출장소, [[철원군]] 근무를 거쳤다. [[1938년]] 1월에는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고, 강원도 정선군과 [[양양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서무주임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1941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7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각주 ==
<references/>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우익]] 계열에 가담하였다. [[1950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강원도지부 부지부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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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후임자 = [[정희택]]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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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8_10401|윤석중|尹錫中}}
== 각주 ==
{{각주}}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삼척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생애 ¶
1918년부터 강원도 에서 군서기로 근무했으며, 1921년에는 총독부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총독부 군속으로 삼척군에 발령받았다. 정선군, 강릉군 등 강원도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서무주임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횡성군과 총독부 전매국 경성지방전매국 금성출장소, 철원군 근무를 거쳤다. 1938년 1월에는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었고, 강원도 정선군과 양양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서무주임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1941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7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우익 계열에 가담하였다. 1950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신인 국민회 강원도지부 부지부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국민회 강원도지부, 임원을 개선
|출판사=동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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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국민회 강원도지부, 임원을 개선
|출판사=동방신문
|날짜=195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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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8_10401|윤석중|尹錫中}}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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