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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상(가수)


이름 유현상(柳賢相)
출생 1954년 1월 30일 충청북도 청주시
성좌/지지 물병자리 / 말띠[1]
본관 진주 류씨 토류계[2]
그룹 백수단,백두산
소속 백두산엔터테인먼트 (대표)
학력 광운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데뷔 1976년 재즈 록밴드 사계절
가족 2남 1녀 중 셋째, 부인 최윤희, 아들 2명
종교 개신교#
링크 홈페이지, 팬카페

목차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1954년생으로 2015년 현재는 락밴드 백두산의 리드보컬로 활동 중이다. UP IN THE SKY~!!! 내가 무슨 산? 백두산~!!!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청주시는 1973년 청주시로 편입이 돼 현재의 청주시 됐고, 그는 현재 청주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청주시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팝송을 많이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 또래 음악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미8군 그리고 밤무대 출신이다. 방송에 같이 출연해서 밝힌 내용으로 인순이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인데 미 8군 무대에도 같이 섰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그룹 '라스트 찬스' (후기) 로 무대 데뷔를 했었으며, 76년 사계절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로 음반 데뷔 .[3] 사랑과 평화가 대마초 파동으로 방송이 금지되어 나이트클럽을 뛰던 시기의 멤버였으며[4], 문화방송 전속 관현악단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물론 80년대 테크닉의 절정을 보여줬던 기타리스트들 과의 비교는 힘들지만, 그 전세대의 기타 리스트로서 유현상의 커리어도 상당한 편이다. 오히려 보컬 유현상보다는 기타리스트 유현상으로서의 평가가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싱어송라이터로 대 히트한 트로트 곡 여자야는 물론이고, 갈테면 가라지 그리고 백두산 곡의 상당수도 그와 김도균의 합작품이다.

락커와 트로트 가수를 병행하는데 락커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트로트 가수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라고는 하지만 음색으로보나 외모로 보나 트로트 가수 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여자야는 트로트 곡이다.

백두산

1986년 KBS2 TV의 인기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백두산의 리드 보컬 겸 리듬 기타로 본격 데뷔하였다. 부활, 시나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방송에 얼굴을 내밀면서 대한민국에 일종의 열풍을 몰고 왔는데, 후발주자인 백두산은 사운드 자체로는 가장 하드하지만, 멜로디 라인은 뽕끼가 섞인 묘한 한국적 메탈 사운드로 팬층을 확보하였다. 1집의 최고 히트곡은 "어둠 속에서" 였는데 중후한 헤비사운드에 유현상의 호소력있고 힘있는 보컬이 매력적인 수작이었다. 1집 웅비나 말할걸 같은 곡이 후기의 백두산의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였고 2집때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영향을 받아 국내 헤비메탈 앨범중 걸작으로 불리는 2집 King Of Rock'N Roll을 발매하여 밴드 시기의 리즈 시절을 맞이한다.

유현상의 목소리는 거칠고 터프한 매력이 있는 반면 음역대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방송에서는 '샤우팅'으로 불리는, 특유의 가성 창법으로 보완했다. 1집때는 이 가성을 코러스 정도로 이용했지만, 2집에서는 이 가성을 전면적으로 들고 나왔는데 초반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리었다.

가요적이지만 중후한 매력이 있던 보이스를 버리고 주다스 프리스트 카피에 불과한 가성 보컬로 전곡을 끌고 가는것에 대한 기존 팬들의 반감이 있었고, 1집의 가요적인 보컬 보다는 카피라고 하더라도 보다 서구권 헤비메탈에 가까워진 보컬을 열렬히 선호하던 새로운 팬층들이 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유현상의 이 가성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았고, 2집에서는 up in the sky 등이 대 히트 하면서 시나위 부활 등과 함께 당시 국내 3대 헤비메탈 밴드의 선두주자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본인들이 지금까지 해왔더 음악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당대 서구의 메탈 사운드를 강조하여 섞어내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서구 메탈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집어넣어서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나는것 아니냐라는 비판도 있긴 하다. 그러나 '붙여넣기'나 단순한 '녹여내기'일지 언정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서구적인 사운드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평가야 어찌 됐건 당시 유현상의 보컬은 백두산 그 자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미있는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유현상의 창법은 TV프로나 쇼 프로에서 그저 개그 코드로 많이 쓰이곤 했다. 탁재훈이 흉내내던 우리가 무슨 싸안

절친노트에서 유현상이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백두산에서 보컬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유현상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그러나 보컬을 모집하다가 적당한 사람이 없어 자신이 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는 서라벌 레코드사의 음반기획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헤비메탈 붐이 일자 사비를 털어 기타리스트 김도균을 스카웃하여 백두산을 결성하게 된 것.

급조된 밴드였기에 초기 5인조에서 음반 발표 당시 김도균 유현상을 제외하고 모두 교체 되고 1집은 가요도 아니고 락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80년대를 살던 사람들의 평가로도 연주력은 최고로 쳐줬다. 특히 나이트클럽 을 비롯한 무대 경험이 많았던 리듬섹션 멤버들 (한춘근, 김창식(고인돌), 2집의 김주현) 의 영향으로 늘상 꽉 짜여진 사운드가 나올수 있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87년 KBS 10대 가수상 그룹 부문 후보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헤비메탈 밴드가 10대 가수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척박한 씬에서 큰 성과라면 성과라고 볼 수도 있을것이다.

당시 일본 BURNN!의 내용이다.

《한국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헤비메탈 밴드가 등장했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그들의 출신지인 것인가? 그들이 바로 얼마전 Loudness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장본인들이다.[5] 우선 이 자켓에 실린 멤버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 옛날 일본의 록 밴드를 서양의 음악 팬이 기이한 눈으로 봤던 것과 같은 시선으로 아마 그들을 보고 있을게 틀림없다. 호사가들은 그들이 일본에 비해 10년이나 뒤쳐진 사운드를 낸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들려주는 사운드를 들어보면, 일본의 다른 밴드보다도 진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보컬의 샤우트도, 스트라토캐스터의 플레이도 그럭저럭 OK. 이 다음의 후발주자들도 기대해볼만하다.
- 「점수 : 70점」 - 죠지 아즈마 》

수난의 시대

1987년 부활의 김태원대마초로 잡혀갈 때 신군부가 한국 록 씬에 철퇴를 내리면서 유현상 역시 잡혀들어갔다. 자신은 대마초는커녕 술담배도 하지 않지만 '너는 대마초를 피웠으니까 자백하라'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연히 밴드활동 금지에 리더 유현상이 수감되어 백두산 활동을 못하자 버틸 수 없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탈퇴하면서 자연스레 밴드 백두산은 와해된다. 이후 풀려난 유현상은 기획사 사장님으로 변신하여 여성 아이돌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전설적인 가수 이지연의 매니저로 활동한다.

또한 시나위에서 탈퇴한 김종서를 영입해 <카리스마>라는 밴드를 만들어 슈퍼밴드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밴드 결성 후 제대로 된 뒷받침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결과는 시망이였고 카리스마는 이지연의 백밴드를 하기도 했다. 결국 자존심 상한 밴드 멤버들은 밴드를 해체하겠다고 유현상을 찾아갔으나, 이미 자금이 바닥난 유현상은 말리기는커녕 악기는 두고 가라고 했다 한다. 김종서가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이 때의 앙금이 아직도 있는지 유현상이 나올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유현상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야차(..)[6]와 같은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나오는 아이돌을 키우는 둥 여러가지를 시도했지만 이지연의 돌연 은퇴선언[7]

또한 세간에서는 당시 미혼으로 노총각 매니저였던 유현상이 이지연을 짝사랑하는 맘으로[8] 애지중지 키우다가 배신당했다라는 식의 조롱거리로 회자되기도 했으나 ..

결혼

얼마후 유현상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함으로써 범국민적 패닉을 부르며 질시와 부러움과 저주를 한 몸에 받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공의 적 자리에 올랐다.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3관왕,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수영 2관왕인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쇼킹 그 자체로 백두산 이후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납치혼을 했다는 루머도 실존했다. 워낙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결혼식도 절(봉선사)에서 조용히 올렸다. 이날 이후 방송국 PD들은 유현상의 레코드 판을 깨뜨리며 절대 방송 출연이나 음악을 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최윤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현재의 손연재김연아를 합친 셈이다. 최윤희가 포카리스웨트 CF를 찍었던 때 무려 광고료로 1억을 받았다. 2018년 현재에도 큰 돈이지만, 저때는 감히 헤아리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당시엔 강남의 아파트 1채값이 5000만원, 승용차인 현대 포니가 100만원이였다. 나중에 유현상이 세바퀴에 나왔을때 mc인 이휘재박미선김연아김구라한테 시집간꼴이라고 비교했고, 최윤희씨도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직접 언급하기를 요즘 같으면 김연아육중완한테 시집간 꼴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그 누구도 부정하지못했다.

이 때문에 결혼식은 1991년 6월 6일에 절에서 극비리에 진행됐었다. 훗날 라디오 스타(황금어장)[9]에서 밝히길 하객으로는 DSP 이호연 사장, 가수 이승철, 백민(전 BIG엔터테인먼트 대표), 작곡가 하광훈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최윤희는 "그 분들도 결혼식인 줄 모르고 오셨다가 비밀 결혼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놀라셨다"고 밝혔다. 결혼사진이 없다고 한다.

나이 차이(최윤희가 1966년생으로 유현상보다 12살 연하)도 꽤 나는 편인데, 행복하게 잘 사는 듯 하다. 자식들이 바라보기에는 오히려 최윤희가 유현상을 더 사랑한다.라고 한다. 둘이 결혼할 때 최윤희의 집에서 결사반대를 했는데 이 때 최윤희가 단식투쟁을 해가며 결혼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최윤희가 결혼을 허락할 때까지 집밥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고 오직 유현상이 사주는 밥만 먹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아들이 두 명[10] 있으며, 둘다 유수한 미국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큰 아들은 워싱턴 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뭔가 부럽다. 작은 아들은 전문 요리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솔로

90년대 초 결국 그는 머리를 자르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 여자야를 발표해서 락 음악 후배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음악 잘모르는평론가 임진모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가혹하고 충격적인 변신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 여파나 충격이 심했는데, 트로트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일요일 일요일 밤에나 다른 쇼 프로에서도 유현상의 리즈시절을 농담 따먹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사실 가족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서 부양의 문제가 생겼고 결국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고 후에 기술했다. 하지만 트로트를 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한다.

사실, 백두산으로 복귀한 지금도 개그의 소재나 음악 프로에서 이런 걸 했었다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여자야 외에도 갈테면 가라지같은 곡을 히트시켰다. 또한, 밴드 결성 전에 솔로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시절에 이미 버젓한 성인가요 앨범을 낸 바가 있으니 딱히 변절이라기도 뭣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의 반작용으로 여자야를 부르던중 백두산의 팬들이 그에게 실망하여[11] 유현상을 질타하며 물병을 투척하거나, 얼마 줄테니깐 백두산 노래 부르라고 하는 둥 개인적으로 수난도 상당했다고 한다. 원래 유현상의 뿌리는 미8군과 나이트클럽이므로 트로트, 디스코, 혹은 록의 장르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트로트 가수로써의 유현상도 독특했는데 상상플러스에서 에서 김영호는 '백두산에서 하던 대로 부르는 거 같다'라고 평할 정도로 일반적인 트로트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오히려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본인 스스로 말하는 '트로트가 아니라 미디움템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여자야' 이후 2003년에 "갈테면 가라지" 를 발표한 바 있으며, 이로부터 12년이 지난 2015년에 새로운 트로트 앨범 "고삐" 를 발매하였다. 이건우 작사 유현상 작곡으로, 기존의 창법보다 좀 더 트로트에 가깝게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여담으로 이 일화를 이야기할때 부활의 김태원이 음악은 거대한 파도와 같다. 락이 트로트보다 우위에 있는 음악이냐며 유현상을 두둔한적있다.

백두산 재결성

2008년 김도균 등과 동두천 락 페스티벌에서 백두산을 오리지널 멤버로 재결성히여 활동하고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쌩쌩히 활동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시절에도 헤비메탈이 하고 싶어 술, 담배를 일절 대지 않고 목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보컬의 기량은 많이 쇠태하였지만 그 시절의 곡을 원키로 그대로 소화하며, 누구보다도 메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에서만큼은 귀감이 된다.

지금은 폐지된 세바퀴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케이블 프로같은 데서 망가지는 것도 불사하는 탓에, 유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연장에서의 카리스마에 놀라는 경우가 적지않다. 하지만 고정출연 후 자신을 개그맨으로 인식하는 젊은 층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세바퀴에서 하차하고 예능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12] 이 시기에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에서 부활과 함께 출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라디오 스타에서 씨엔블루와 함께 출연하여 레전드편을 하나 만들어내기도 했다. 내용도 좋으며, 재미도 있으며, 백두산의 유현상, 김도균의 개인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면 추천해 줄수 있는 편이다.

나는 가수

나는 가수다 2에 백두산 이름을 걸고 밴드로 출연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졸지에 좀 더 젊은 층의 밴드 가수들이 나올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훼이크를 날린 셈이 되었다. 출연 당시에는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왔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운 수준의 편곡과 곡들이였고, 백두산이란 이름에 맞지 않게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때의 쿵따리 샤바라는 나가수 사상 적우의 나홀로 뜰 앞에, 장윤정의 Never Ending Story, 장혜진의 미스터와 함께 최악의 곡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나마 회자가 되었던것이라면 박미경의 국어책 리액션과 함께 나왔던 백수단 선배님정도.

근황

현재는 백두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제작자로 다시 부활하였다. 백두산의 성인가요 활동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그 후에는 다시 백두산 쪽의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며 현재는 앨범 작업 중이라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유현상의 열린 음악회라는 바를 운영중이다. 백두산 공연이나 팬미팅을 이곳에서 하고 있다고. 장사도 잘되며, 주중에 유현상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거나, 사람들이 노래하는 무대도 설치해놨다. 또 실제로는 상당히 젠틀하며 자상하다고 한다. 매너도 좋고.

현재 장윤정 못지 않게 행사를 많이 뛰고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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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띠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띠를 나누는 정확한 기준은 없고 개인에게 띠를 나눌때는 보통 양력을 기준으로 나눈다. 학계에서도 현재 그렇게 보고 있으나, 사주상으로는 입춘(2월 4일)을 기준으로 따진다.
  • [2] 진주 류씨 토류계 29세손 '相'자 항렬이다.
  • [3] 당시 같은 팀에 있던 가수가 윤시내.
  • [4] 이 시기의 사랑과 평화는 유현상 말고도 수많은 멤버들이 거쳐갔다.
  • [5] 아마 부활의 1집 속지에 실린 문구를 착각한 듯.
  • [6] 일본 그룹 히카루GENJI의 컨셉을 모방한 그룹. 뒤에 ZAM에서 리더를 맡는 조진수가 팀의 리더였고, '맨발의 청춘'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듀엣 에서 활동하는 김병수도 이 때의 멤버였다. 이들이 발표한 '애타는 마음'은 원래 '백두산'의 음반에 실린 곡이었다.
  • [7] 이지연이 사랑에 빠진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지연의 갑작스러운 미국행과 현지에서의 결혼, 그리고 일방적인 은퇴선언은 매니저로서 당시까지 이지연의 활동에 거의 지원과 투자만 하고 이렇다 할 수익도 가져보지 못한 유현상에게는 인간적 배신감과 함께 금전적 손실도 컸던 사건이었다.
  • [8] 실제로 불금쇼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냐구 물으니까 부정 못하면서 정말 아름다웠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귄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은 있었던듯
  • [9] 2011년 05월 18일자 방송
  • [10] 동균, 호균
  • [11] 사실 굉장히 안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의 락/메탈 팬들은 대중들이 질색하는 메탈을 자기만 이해하고 듣는다는, 이른바 부심이 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시나위의 보컬이었던 임재범이 대중가요로 빠지자 욕을 먹은 것도 이 때문. 그런데 그냥 대중가요도 아니고,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트로트를 하니 충격인 것. 지금에 와서는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이런 메탈부심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음악 장르 자체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 자체가 웃기는 것이다. 만약 유현상의 트로트 가수로서 "실력"을 비평했으면 몰라도 이들은 "메탈 보컬"인 유현상이 "트로트"를 한단 사실 자체를 욕했기 때문.
  • [12] 사실 "80년대 락스타"가 그대로 늙은 듯한 외양, 이에 대비되는 수더분한 성격과 최신 예능 트렌드에 적응못해 어버버하는 모습 등 예능에서 유현상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 웃음을 자아낸 거지, 유현상 본인의 예능에서 모습을 보면 의도적으로 개그를 치는 건 적다. 본인은 스스로를 아직도 뮤지션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웃기는 아재"라고만 여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