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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요시다 증언 : 위안부 문제 증언 ¶
요시다 세이지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주장했으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1900년대 아시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위 '요시다 증언'에는 의혹도 뒤따르게 되었다.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 부터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전남, 경남, 제주 등에서 끌고간 한국인 징용자의 숫자는 종군위안부 1000명을 포함하여 6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의 저술에서는 "종군위안부 징용은 한 마디로 노예사냥이었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여자들을 후려갈겨 트럭에 강제로 태우고, 울며 매달리는 젖먹이를 억지로 떼어냈던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되어 있다.
4.2. 요시다 증언 검증 ¶
1989년 8월 14일, 제주도의 향토 사학자는 요시다가 진술한 지역에 가서, 해당 지역 현지 주민들에게 증언을 들었으나 이를 입증할 수 없었으며 이를 제주신문에 발표했다. 주민들은 그러한 사건은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제주일보는 이를 요시다가 "상술"로 엉터리 체험 수기를 출판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제주일보가 마이너 해서 그런지 이 조사는 묻혀버렸다(…).
1992년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제주일보 기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제주도를 직접 취재하여 이 사실을 산케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에 알리게 되었다.
1993년 6월 요시다 저서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조사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강정숙은, 요시다 증언과 합치하는 증언을 현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아사히 신문은 2014년 4~5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70대 후반에서 90대까지 약 40여명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건어물 제조 공장에서 수십명의 여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한 제주도 북서부의 마을에서는, 생선을 다루는 공장이 1개 박에 없었고 경영자의 아들은 "통조림 밖에 만들지 않았다. 여자 종업원이 사라진 일은 없다."고 증언했으며, 요시다 세이지가 '초가지붕'이라고 썻던 공장의 지붕은 한국에서 당시 수산산업을 연구했던 리츠메이칸대학 역사지리학 전공 가와하라 노리후마 교수에 따르면 함석판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1]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 5월에 서부군의 동원명령으로 제주도에 갔으며, 그 명령서의 내용이 아내의 일기에 남아 있다고 저술했다. 하지만 요시다의 장남은 어머니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시중 조선반도 동원을 연구한 토노무라 마사루 도쿄대부교수는, 요시다가 소속되었다고 주장한 노무보국회는 후생성과 내무성의 지시로 만들어진 명령으로서, 지휘계통을 생각해보면 군이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도, 그 직원이 직접 조선에 가는 것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요시다는 1943년 5월 당시 제주도에 '육군부대본부'가 '군정을 펼치고 있었다'고 설명했으나, 일본근현대사를 전공한 나가이 카즈 교토대 교수는 제주도로 육군 대부대가 집결한 것은 1945년 4월 이후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기술이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기사를 모두 철회하게 되었다.
4.3. 요시다 증언을 이용한 언플 ¶
2014년 이래 일본 우익들은 요시다 증언이 허위로 드러난 것을 이용하여 '위안부 강제연행'은 허구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노 담화의 폐기 등을 시도하고 있다.
4.4. 요시다 증언의 영향과 한계 ¶
사실,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한정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증거는 요시다 증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유엔 보고서 역시 위안부 강제 동원을 다룬 1996년 보고서에 요시다 증언을 언급했으나, 여기에 대해서는 '신빙성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함께 직시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위안소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 " 자체에 제기되는 인권 문제이며, 강제연행의 유무나 피해자들 증언에 관한 세부 논란은 '각론'에 불과하다.
5. 가족사 ¶
요시다 세이지의 장남(2016년 당시 66세)는 일본 월간지 '신쵸 45'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소녀상을 크레인으로 철거하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위안부 강제연행 날조에 대해, 요시다 가문의 장남으로서, 일본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가능하다면, 전세계에 있는 소녀상을 크레인으로 철거해버리고 싶습니다.(중략) 나 자신도 아버지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는 한 번도 제주도에 간 적이 없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아버지는 제주도 지도를 보면서, '나의 전쟁범죄' 원고를 썼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