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
생애 ¶
1920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공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7월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감리국 파견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군수감리국 근무를 이유로 등재 언급이 나왔다가, 유족들의 이의신청에 따라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일본측 자료가 발견되면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1968년부터 몇 년 동안 기업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신민당 김창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야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한편, 1975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에 임영되었고, 1978년 남덕우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날 때는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이 모여 있던 가운데 박정희 유고를 비밀에 부치고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을 보였다. 12.12 군사반란 때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수사해야 한다며 결재를 받으려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우선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결재부터 받으라고 호통을 쳤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신현확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TK(대구-경북) 출신이었고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며 보수층의 환심을 사는 등 일련의 독자적 정치기반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래서 신군부와 결탁하여 창당을 추진한다는 등의 정치풍문이 나돌기도 하였으며, 당시 민주화 세력은 신현확과 전두환을 한통속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4월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고딩직속후배인 노태우는 도와달라고 싹싹 빌다가 귀싸대기를 쳐맞았다고 한다.
1980년 5월 17일(5.17 내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중앙청에서 주재하였다. 그 다음날 신군부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매체에서 ¶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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