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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영 (1891년)

{{공직자 정보
|이름 = 신태영
|그림 =
|그림설명 =

|국가 = 대한민국
직책 = 제4대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
국방부 장관]]
|임기 = 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대통령 = 이승만
|전임 = 이기붕
|후임 = 손원일

출생일 = {{출생일
1891|2|1}}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
1959|4|8|1891|2|1}}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 [[평산 신씨
평산]]
|자녀 = 신응균(장남) <br /> 신철균(차남) <br /> 신박균(삼남)
|종교 = 불교
|서훈 =

|군복무 = 일본제국 육군<br/>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 일본제국 육군(1912~1945)<br/>대한민국 육군(1948~1954)<br/>대한민국 육군(1954~1956)
계급 = 일본제국 육군 [[중령
중좌]]<br/>대한민국 육군 중장
|지휘 = 대한민국 육군본부<br/>전라북도 편성관구<br/>민병대사령부
근무 =[[조선군 (일본군)
일본 조선군]] 제19사단<br/>일본 조선군 제20사단
|참전 =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br/>태평양 전쟁<br/>한국 전쟁
}}

신태영(申泰英, <small>일본식 이름:</small> 平山輔英 <small>히라야마 호에이</small>, 1891년 2월 1일 ~ 1959년 4월 8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대한민국 육군 장성 및 정치인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일본군 장교, 학생 동원을 위한 군사교관 등으로 참전과 병력 동원을 위한 선전에 협력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을 올렸다.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14세 때에 대한제국의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어서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28일 제26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동기 중 한국인은 후에 일본군 중장을 지낸 홍사익을 비롯하여 지청천, 이응준, 조철호 등 13명이었다.<ref>{{서적 인용
|저자=역사문제연구소
|제목=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
|날짜=1995-03-01
|출판사=역사비평사
|출판위치=서울
id={{ISBN
8976962249}}
|페이지=146쪽}}</ref>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일본이 군을 파병한 ‘시베리아 간섭전쟁’ 당시, 신태영은 북만주 이북에 파견된 일본군 연대 소속 장교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가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중좌였다. 그는 특히 1943년 무렵에는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해 병력 동원의 선전, 선동에 협력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발표한 ‘잡아라 철의 신념,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제목의 수기에서는 “제국의 신민이 되어 대화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개척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자신의 첫 출진의 목표가 “야스쿠니 신사(안장)”였다고 밝히기도 했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69&aid=0000409460
|제목=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출판사 =한국일보
|날짜=2019.07.30}}</ref>

광복 후 육사 동기생 대부분이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참여하였으나, 그는 근신하는 뜻으로 군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진 이후 자진 입대, 1948년 11월 대령계급과 함께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겸 국방부 제1국장이 되었다.

1949년 준장으로 진급, 호국군참모부장이 되었으며, 1949년 10월 소장진급과 함께 제3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재임 기간 7개월 만인 1950년 4월에 스스로 물러났다. 그것은 당시의 국방부 수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 정세 판단에서도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 당시의 미국 고문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전라북도 편성관구사령관으로서 이 지역의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당시의 국방장관 신성모와 작전상의 의견충돌을 빚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7월 해임되었다. 1952년 1월 복직되면서 곧 중장으로 승진하였으며, 2개월 후 1952년 3월, 육군 중장 예편과 동시에 국방부 장관이 되어 휴전 협정이 성립되기 직전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대한 제대장병보도회 회장)도 지냈다.

1959년 사망하여 국립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은 신응균이다.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신이며 국방부 사무차관 겸 장관 직무대리를 지냈다. 막내아들 신박균 육군 하사(지금의 상병)는 6.25에 참전해 전사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1950년 8월 한국 전쟁에 참전을 지원해 포병이 되었고 최전방을 지원하여 가평지구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1951년 1월 2일 전사했다. 한국군 고위층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사례는 신태영의 막내 아들 신박균 하사 단 한 명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수록

각주

<references/>

참고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91_1_0006515|신태영|申泰英}}

{{전임후임
|전임자 = 채병덕
|후임자 = 채병덕
|대수 = 3
|임기 = 1949년 10월 1일 ~ 1950년 4월 9일
직책 =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
육군참모총장]]
}}

{{전임후임|
|전임자 = 이기붕
|후임자 = 손원일
|대수 = 4
직책 =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
국방부 장관]]
|임기 = 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