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정보
| 이름 = 서월영
| 본명 = 서영관
| 출생일 = 1905년
| 출생지 = 부산광역시
| 사망일 = 1973년
| 사망지 = 대한민국
| 다른이름 =
| 배우자 =
| 웹사이트 =
}}
서월영(徐月影, 1905년 4월 8일 ~ 1973년 2월 26일)은 한국의 배우이다.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말년에는 영화 배우로 주로 활동했다.
| 이름 = 서월영
| 본명 = 서영관
| 출생일 = 1905년
| 출생지 = 부산광역시
| 사망일 = 1973년
| 사망지 = 대한민국
| 다른이름 =
| 배우자 =
| 웹사이트 =
}}
서월영(徐月影, 1905년 4월 8일 ~ 1973년 2월 26일)은 한국의 배우이다.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말년에는 영화 배우로 주로 활동했다.
생애 ¶
본명은 서영관(徐永琯)이며, 월영(月影)은 예명이다. 부산 출신<ref>{{뉴스 인용
|url=http://www.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18
|제목= 친일미술단체들, 전쟁동원에 '회화보국'나서 - <nowiki>특집 경남.부산 친일예술인 연구 2 미술과 연극영화단체들</nowiki>
|저자=전갑생
|출판사=거제타임즈
|날짜=2004-11-04
|확인날짜=2008-06-15
}}</ref> 으로 토월회를 통해 연극배우가 되었다. 현철이 세운 조선배우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페이지=353쪽}}</ref> 초기에는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 소속으로 활동했다.<ref>예술로, 한국연극의 황금 시대를 구현한 동양극장 {{웨이백|url=http://www.art.go.kr/vli_dir/vli_dir07_detail_sp.jsp?ar_vvm_cd_seq=5601# |date=20071108040933 }}</ref>
|url=http://www.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18
|제목= 친일미술단체들, 전쟁동원에 '회화보국'나서 - <nowiki>특집 경남.부산 친일예술인 연구 2 미술과 연극영화단체들</nowiki>
|저자=전갑생
|출판사=거제타임즈
|날짜=2004-11-04
|확인날짜=2008-06-15
}}</ref> 으로 토월회를 통해 연극배우가 되었다. 현철이 세운 조선배우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9788990626264}} |
그러나 신파극의 인기와 함께 동양극장이 지나친 상업주의 경향으로 흘러가자 1937년 심영, 박제행, 남궁선 등과 더불어 청춘좌를 탈퇴한 뒤에는 신파극과 신극 사이의 타협점으로 중간극을 표방한 중앙무대를 창설했다.<ref>{{웹 인용 |url=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제목=신파극(新派劇) |확인날짜=2008-04-22 |웹사이트=서울六百年史 |출판사=서울특별시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2039/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보존날짜=2007-09-28 |깨진링크=예 }}</ref> 1939년 조직된 극단 고협에서도 활동했다.<ref>{{서적 인용
|저자=권영민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날짜=2004-02-25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페이지=28쪽}}</ref> 1927년 《운명》과 《불망곡》으로 영화계에도 데뷔해 《지나가의 비밀》(1928) 등에 출연했다.
|저자=권영민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날짜=2004-02-25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8952104617}} |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흙에 산다》 (1942), 《젊은 모습({{llang|ja|若き姿}})》 (1943), 《조선해협》 (1943), 《우러르라 창공》({{llang|ja|仰げ大空}}) (1943), 《거경전》 (1944) 등 국책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친일 영화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에도 연기자 대표격으로 참여하여 임원을 맡은 바 있다.<ref>이효인, 영화계 친일행위의 논리와 성격 《디지털 웹진 Now Art》 (2002년 광복 57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 문화예술의 친일 논리와 성격)</ref>
토월회와 청춘좌, 중앙무대, 고협 등에서 꾸준히 함께 했던 심영과는 광복 후 좌익과 우익 계열로 갈라졌다. 심영은 김두한에게 피습을 받고 월북했고, 그는 극단 청탑을 창설하고 반공 영화 《성벽을 뚫고》(1949)에 출연하는 등 남한에 남아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마지막 작품은 1967년 신상옥이 연출한 《다정불심》과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