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소(白以昭, 1557년 경상북도 경주시 ~ 1597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융원(隆遠), 호는 부암(傅巖)이다. 본관은 청도(淸道)이나 옛 지명인 오산(鰲山)으로 쓰기도 한다.
==생애==
고려 때 박경순(朴慶純) 일당의 난을 진압한 청도 호장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인 선략장군(宣略將軍) 백희(白熹)의 둘째 아들로 경주부 서면 부산촌(富山村) 출신이다. 풍채가 크고 힘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25) 6월 경주지역 의병장으로 경주부윤 윤인함, 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노모와 아내를 산 속에 피신시킨 후 산에서 내려와 가복들을 이끌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선조 27)에는 갑오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에 특제되었다.<ref>《부암실기》</ref>
고려 때 박경순(朴慶純) 일당의 난을 진압한 청도 호장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인 선략장군(宣略將軍) 백희(白熹)의 둘째 아들로 경주부 서면 부산촌(富山村) 출신이다. 풍채가 크고 힘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25) 6월 경주지역 의병장으로 경주부윤 윤인함, 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노모와 아내를 산 속에 피신시킨 후 산에서 내려와 가복들을 이끌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선조 27)에는 갑오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에 특제되었다.<ref>《부암실기》</ref>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입해오자 적을 공격하던 중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 고통을 무릅쓰고 다시 출전하자 경주 판관이 만류했으나 '신하된 도리로 죽을 뿐'이라 말하며 영천 창암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장 최봉천(崔奉天)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ref name="dg">《동경잡기》</ref>
사후 ¶
가족관계 ¶
참고문헌 ¶
* 경주읍지(慶州邑誌), 1919년
* 동경잡기(東京雜記), 1669년 민주면(閔周冕)
* 부암실기(傅巖實記), 백수장(白受章)
* 강고선생문집(江皐先生文集)
* 고계문집(古溪文集)
* 동경잡기(東京雜記), 1669년 민주면(閔周冕)
* 부암실기(傅巖實記), 백수장(白受章)
* 강고선생문집(江皐先生文集)
* 고계문집(古溪文集)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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