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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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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만년설이 아니다.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李昌珉 혹은 李昌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렸다.

생애

1915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1]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통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2]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활동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위키의 친일인명사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문화예술인의 경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는 자발성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다.

더군다나 대중 예술인의 경우 당시엔 기획사에 묶인 처지였기 때문에 자발성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일본리샹란[3]이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29만 원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정부기관은 공식적으로 백년설을 친일 인명 사전에서 삭제하였다. 백년설이 실제로 친일파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보다 그 근본적인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분들의 흑역사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유명한 곡

  • 나그네 설움
  • 번지없는 주막
  • 알성급제
  • 복지 만리
  • 대지의 항구
  • 눈물의 수박등
  • 고향설
  • 산 팔자 물 팔자
  • 만포선 길손
  • 삼각산 손님

여담

가수 배금성 씨가 이 분의 외손자다.출처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에 가수로 데뷔했으나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 중. 가요무대를 보면 라인업에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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