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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1909년)

{{작가 정보
| 이름 = 박태원
| 원어이름 = 朴泰遠
| 사진 =
사진설명 = 이상이 박태원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옆의 글은 "아, 이거야말로 꼬리표가 달린 요시찰 원숭이 / 때때로 인생의 울타리를 탈출하기 때문에 / 원장님께서 걱정한단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9/06/26/0902000000AKR20090626152400005.HTML|제목="이상 마지막 자화상 속 주인공은 구보"|날짜=2009-06-26|뉴스=연합뉴스|확인날짜=2018-07-02}}</ref>
| 출생일 = {{출생일|1909|12|7}}<ref>호적상의 출생년월일은 1910년 1월 17일.</ref>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
1986|7|10|1909|12|7}}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울특별시
직업 = [[시 (문학)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
| 부모 = 박용환(부), 남양 홍씨 부인(모)
| 배우자 = 권영희(재혼)
|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 활동 기간 = 1926년 ~ 1986년
| 소속 = 전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분과위원회 대표위원
| 자녀 = 슬하 2남 3녀<br/>장녀 박영은(월북)<br/>차남 박재영(대한민국에 머무름)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장르 = 시문학, 문학평론, 소설
학력 = [[일본]] [[호세이 대학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중퇴
| 친척 = 숙부 박용규(의사)<br/>누나 1명<br/>남동생 3명<br/>둘째 남동생 박문원(미술평론가) <br/> 누이동생 1명 <br/> 외손자 봉준호(영화감독)
| 웹사이트 = 구보학회

}}
박태원(朴泰遠, 1909년 12월 7일 ~ 1986년 7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친일 사회주의 계파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밀양(慶州)이며 호(號)는 구보(丘甫, 仇甫, 九甫), 몽보(夢甫), 박태원(泊太苑)이다.

생애

1909년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부가 의사, 숙모가 교사로 일하는 개화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재학 중이던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일본 호세이 대학 유학 이후 귀국한 1930년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3년 이태준, 정지용, 이상, 김유영 (1907년), 김기림 등과 함께 순문학적, 유미주의적 성향의 구인회를 결성했다. 1934년 10월 27일 한의원 김중하씨와 이연사씨의 무남독녀 김정애 金貞愛(1912년)와 결혼. 신부는 숙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사범 본과(1931년)를 졸업한 재원이었음.

광복 후인 1946년 좌익 계열의 문학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잠시 남로당 계열의 문예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했다.<ref>문학과지성사,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저자 소개 {{웨이백|url=http://www.moonji.com/booklist/book_detail.php?pf_id=2005000320001756&sub_mm=booklist# |date=20051027222031 }}</ref>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 정인택, 이용악 등을 따라 남조선문학가동맹평양시찰단원으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 7월경 조용만에게 목격된 것이 남쪽에서 박태원을 보았다는 마지막 증언이다.

1950년 한국전쟁중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1952년 로동신문리순신장군을 연재하였으며, 임진조국전쟁 360주년기념 리순신장군전을 발간했다. 1953년 평양 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국립고전예술극장 전속작가로 활동. 《갑오농민전쟁》은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 권영희가 구술을 받아적어 완성했으며, 마지막 3편은 구술 능력마저 잃은 후에 권영희가 대신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영희는 박태원의 경성 제일고보 동창이자 구인회 시절 동료였던 정인택 (소설가)의 아내로, 정인택 사후인 1956년 박태원과 재혼한 것이다. 특히 권영희는 박태원과 막역한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던 이상의 연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1979년 12월 1일에는 국기훈장 1급 수여와 70회생일상 하사. 1998년 11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애국렬사로 승인하여 평양 신미리 렬사능으로 이장함.

작품으로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을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를 비롯하여 남동생 박문원 (1920년)(朴文遠)이 장정을 맡은 소설집 《천변풍경》(1936년), 월북 후 북한에서 집필한 대하 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갑오농민전쟁》 등이 있다. 한국 전쟁 중 1951년 월북한 아우 박문원(朴文遠)은 사회주의 계열의 미술평론가로 유명하다.

1973년 4월 28일에는 함께 월북하여 지낸 아우 박문원심근 경색으로 잃었다. 아울러 박태원은 사망 시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남로당 계열 문인들과는 달리 1986년 7월 10일에 고혈압으로 사망을 한 즉시 《조선문학》에 부고 기사가 실렸다. 또한 정인택과 권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로 현재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태은이 2000년 평양에서 〈나의 아버지 박태원〉이라는 글을통일문학에 발표하여, 다른 월북 작가들에 비하여 월북 이후 행적이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서울에 2남 3녀와 부인 등 가족을 모두 두고 단신 월북했다. 이중 중학생이던 맏딸, 박설영은 1951년 월북했으며, 대한민국에 남은 가족 중 둘째딸의 막내 아들이 영화감독 봉준호이다.<ref>퍼슨웹,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반백(半白)의 아들 - 소설가 구보씨의 아들 박재영 씨 인터뷰 {{웨이백|url=http://www.personweb.com/sub5/gubo/01.html# |date=20070928080612 }}, 2006년</ref>

학력

* 1931년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중퇴

이외 이력

* 前 조선공산당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1943년)

사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한 《군국의 어머니》(1942년)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소극적 협력'으로도 불리고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민족문학연구소
|제목=탈식민주의를 넘어서
|날짜=2006
|출판사=소명출판사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5626-201-7}}
|장=소극적 협력의 한 양상: 일제 말 박태원의 친일문학 (고인환)}}</ref>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예비 명단을 정리했을 때 포함되었으나,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되어 있다. 선정 당시 친일 작품은 일화 모음집인 《군국의 어머니》 외에 《조광》과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이 각각 한 편씩 있어, 총 3편이 밝혀졌다.<ref>{{저널 인용
|저자=김재용
|제목=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연도 = 2002
|작성월 = 8
|issue = 67호
|쪽=123~148쪽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ref>

참고 자료

* {{서적 인용
|저자=조영복
|제목=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날짜=2002-09-10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199-150-3}}
|장=박태원 - 역사소설에 꿈을 묻은 모던 보이}}
* 조영복, 월북지식인들의 행로 (9) 박태원 《조선일보》 (2001.3.4)

각주

<references/>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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